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7화 (17/104)

17화.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기엔 둘의 협공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해시트는 손마디로 눈썹께를 훑으며 겸연쩍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참 신기하지. 수도에만 입성하면 다들 잔소리꾼이 되더라고.”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라피난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저 천둥벌거숭이마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달리할 줄이야, 솔직히 조금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투닥거리는 사이 성문이 열렸다. 굽이진 언덕을 넘어가느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해시트는 습관처럼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할 일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래 봤자 다가올 훗날의 계획이었을 뿐, 지금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로 눈코 뜰 새 없는 게 현실이었다.

“라피난.”

“예.”

“알다시피 이 몸은 당분간 바쁠 예정이니, 이레이의 교육은 네가 알아서 진행하고 있어라.”

“철저히 감독하겠습니다.”

라피난이 벼르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 옆에서 이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바빠? 이제 집으로 돌아왔는데 바쁠 게 뭐가 있지?”

“집 같은 소리.”

차라리 전쟁 통의 막사가 훨씬 더 여유로우리라. 해시트는 구구절절 설명해 주기 귀찮아서 대충 손등만 내젓고 끝냈다. 어차피 이레이를 곁에 두기로 결정한 바였다. 조금만 관심 있게 지켜보아도 ‘성 안’에서 해시트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게 될 터였다.

가장 먼저 그녀는 레오니스 황제를 찾아가 전쟁의 결과를 보고했다. 그런 다음엔 이번 전쟁에서 개종을 약속한 미케나의 새 신도들을 신전으로 안내해 주었다. 바로 직후엔 병사들을 대동하여 전사자의 유가족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명예로운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꼬박 며칠을 거리에서 보내는 건 예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해시트가 찾아간 유가족 중에는 세르히나 디어 양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포함한 친지를 셋이나 잃게 된 그녀는 슬픔과 공포가 들이닥친 새빨간 눈으로 해시트를 노려보다가 문 너머로 쿵 넘어가 버렸다.

해시트는 기절한 그녀를 뒤로한 채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별로 미안하지 않군.”

그런 일정이 달이 가물었다 채워질 때까지 계속됐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거처로 돌아올 즈음엔 번번이 새벽녘이었다. 가끔은 동틀 무렵에야 침대에 몸을 누일 때도 있었다. 온몸이 찢어질 듯 피로했으나, 그렇다고 쉬이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혼자 의례실에 틀어박혀 장례식에서 날릴 풍등을 골라내곤 했다.

얼마 후 모처럼 맑은 날이 밝고, 그토록 고대하던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또다시 며칠에 걸친 장례가 모두 끝이 났을 때, 해시트의 체력은 그야말로 갈라진 우물 바닥처럼 끝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엔 지난 이틀간 레오니스 황제와 함께 신전에 칩거하며 전사자의 안식을 기도드린 노고가 크게 한몫했다. 황제는 해시트의 치성을 시험하겠다며 이틀 내내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게 하였다.

와중에 웃긴 건, 해시트가 쓰러지기 전에 이레이가 먼저 폭발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젠장. 난 참을 만큼 참았어.”

근 한 달 만의 재회였다. 그마저도 이레이가 황제궁 앞에서 해시트를 오매불망 기다린 덕분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그가 거의 납치하듯 해시트를 낚아채서―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실제로 납치했다―라피난에게 배정받은 자신의 처소로 끌고 가 버렸기 때문에, 해시트는 지독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강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마구 발버둥 쳤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그에게 퍼부은 건 덤이다

이 미친 새끼. 시건방진 놈아. 네놈이 드디어 완전히 돌아 버렸구나. 글쎄 라피난은 어쩌고 혼자 황궁을 쏘다니느냐 등등. 그러거나 말거나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이레이가 급기야 그녀를 억지로 소파에 누이고 옷자락을 헤집자 해시트는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부릅뜨고 그를 밀어 냈다.

“악! 너, 너, 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 말했잖아? 더는 못 기다린다고.”

맙소사. 그가 되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저 불온한 눈을 당장 뽑아 버려야겠다.

“멈춰. 거기서 손가락 하나라도 더 까닥했다간 너 내가 반드시 죽인다. 진짜로! 맹세코! 죽일 거야!”

“왜 이래? 지금 당장 봉합 수술 후처리 안 하면 네가 풍병으로 죽을 확률이 더 높거든?”

“……풍병?”

깜빡. 해시트의 눈꺼풀이 제자리를 왕복했다.

풍병이라면…… 그게 뭐지?

속마음을 들켰는지 재깍 설명이 뒤따랐다.

“아, 이 동네에서는 괴사라고 부르더군. 그러니까 피부가 썩는다고.”

짜증이 여실한 목소리였다. 이내 그는 자신의 팔목에 얹어진 해시트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덧붙였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놔라. 제발 썩기 전에 실밥 좀 풀자. 너는 네 배 한가운데에 시커먼 바느질 자국이 남아 있는데 찜찜하지도 않냐? 아무튼 예민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순 둔해 빠졌다니까.”

구구절절 사족마다 건방지기 이를 데 없었지만, 결론은 단순한 진료였던 셈이다.

한데 어째 간절한 느낌마저 들어서 뒤늦게 머쓱해진다. 이 미친놈이 그렇게 내가 죽는 게 싫은가……. 얼토당토않은 핀잔이 입 안에 맴돈 순간, 해시트는 파드득 놀라 그를 붙잡고 있던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됐어.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벗어. 벗기기 전에.”

이레이는 방긋 웃으며 인내심의 고갈을 알렸다. 내가 벗기면 곱게 안 벗긴다. 갈기갈기 찢어서 창밖으로 던질 거야. 결국 해시트는 그를 등진 채 스스로 옷을 벗었다. 하필 장례식용 예복 차림이라 이것저것 덜어 낼 게 많았다.

일단 목덜미를 가리고 있는 빳빳한 깃부터 풀어냈다.

“너는 한여름에도 그런 걸 두르고 다니겠네?”

“지금 초봄인데.”

“말고, 그 매끈매끈한 목선을 가리려면 말이야.”

“놀릴 생각이면 관둬라.”

한바탕 진을 뺐더니 이제는 화낼 기력도 안 남았다. 그러잖아도 졸려서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저 새끼 때문에 혈압 올라 기절할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이상 이레이의 말장난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탈의를 마친 해시트가 마지막 셔츠 한 장만을 남겨 두고 그를 돌아보자 그는 아주 근엄함 표정으로 자신의 침대를 가리켰다.

“저기 가서 누워라.”

“소파에서 하지.”

해시트는 단칼에 이레이의 말을 자르고 냅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암만 진료일 뿐이라지만 남의 방에서 타인의 침대에 눕는 건 좀 이상하다. 물론 라피난의 방에서 라피난의 침대에 누워 본 적은 많지만. 그래도……. 그냥 본능적인 꺼림칙함이 앞섰다.

뭐랄까, 좀.

아니. 사실 에두른 핑계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유를 알았다. 지금껏 이레이와 같은 방식으로 저를 대하는 사람을 만난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뭐. 소파가 좋으면 소파에서 하든가.”

그런 식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 그런 식으로 고스란히 내비치는 말투. 그렇게 들끓는, 뜨거운 욕망에 잠긴 무언가. 이레이가 절대로 숨기려 들지 않은 그 모든 것들에 해시트는 조금도 면역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의사 행세를 하는 동안엔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니 다행이다. 오늘도 해시트가 소파에 누워 셔츠를 적당히 끌어 올리기 무섭게 이레이는 흰소리일랑 집어치우고 그녀의 뱃가죽에 남긴 바느질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데 열중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쯧,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상처는 거의 아물었는데 꿰매 둔 실이 매몰됐어. 다 뜯어내려면 좀 아프겠는데.”

그러더니 제대로 된 경고도 안 해 주고 그대로 칼날을 잡았다. 서걱! 깊이가 얕은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피부를 스친다. 긴장한 해시트가 순간적으로 주먹을 바짝 말아 쥐었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고 있던 셔츠 자락에 거친 주름이 맺혔다.

갑자기 침묵을 견딜 수 없어졌다. 더럭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진통제도 없나?”

“뭐라도 예쁜 짓을 해야 챙겨 주지. 안 그래?”

까딱, 이레이는 동의를 구하듯 눈썹을 치켜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심드렁하던 말투와는 달리 금세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긴, 예쁘긴 하군.”

“…….”

“잠깐만 기다려 봐. 해스.”

……쓸데없이 다감한 구석이 있다.

그가 한쪽 손을 뻗어 서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보았던 말린 나무껍질이 이레이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그것을 집더니 별안간 방향을 돌려 해시트의 입술로 다가왔다.

꾸욱, 입술을 잡아 벌리는 손가락이 기이하게 서늘했다.

“기억하지? 삼키면 안 돼.”

그 당부를 듣고 나서야 입 안에 들어온 까슬한 물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혀에 닿은 맛은 아마 향긋하거나 씁쓸하거나…… 잘 모르겠다. 그 순간 숨을 참아 버려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레이의 손가락이 이윽고 그녀의 턱 끝을 부드럽게 밀어 닫으며 멀어졌다. 꼼꼼하기도 하지. 해시트는 목울대가 확 좁아 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성긴 나무껍질만 잘근잘근 씹어 댈 뿐이었다.

왜인지 이레이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수건 위에 올려 두었던 칼날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였다.

“이레이, 자네 여기 있…….”

벌컥! 느닷없이 현관문이 열리더니 라피난이 등장했다. 라피난과 약 십 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해시트는 그가 노크 없이 남의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지금 처음으로 알았다.

라피난은 빠르게 방 안의 풍경을 훑어봤다. 그의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소파에 드러누운 해시트와 그녀에게 올라탈 듯 무릎을 굽힌 이레이를 담아냈다. 바로 라피난이 말했다.

“그럼 이만.”

달칵,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아 버린다. 심지어 해시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