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6화 (16/104)

16화.

“괜찮다.”

“공기가 탁합니다. 말씀은 삼가시지요.”

“…….”

이럴 때에 라피난은 유독 상냥해지곤 했다. 여기서 ‘이럴 때’란 해시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줄 수 없을 때라고 해야 옳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녀도 묻지 않는다. ‘또 몇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었지?’ 그런 나약한 질문은.

해시트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바위 파편이 뺨을 긁고 갔는지 따끔한 동통이 퍼진다. 그때 귓가에 홀연히 다가온 인기척이 속삭였다.

“걱정 마. 다들 무사하다. 문제의 세 사람 외에는.”

“……이레이.”

“응, 여기 있지.”

처음엔 목소리뿐이더니, 금세 귓가를 스치는 숨결이 느껴졌다.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시끄러운 혼란 속에서도 해시트는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아마 그가 해 준 말이 지금 해시트가 가장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라서 그랬겠지만…….

모래바람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때맞춰 몰려온 북풍에 많은 것들이 쉽게도 쓸려 나갔다. 그중에는 이 모든 난장판의 주범인 붉은 전갈 떼도 포함이었다.

마침내 희뿌연 공기가 완전히 걷힌 후엔 세 명의 시체가 미처 쓸려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예키.

포렌네리아.

히르멜.

죽어 마땅했던 세 명의 나이 든 사람.

라피난은 기다렸다는 듯 사고 지점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아직 전갈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신기하게도 한 명은 전갈에 물려 죽었고, 한 명은 말에게 걷어차여서, 또 한 명은 바위에 깔려 즉사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그저 우연에 부치기로 했다. 어차피 그런 의문을 품을 이는 해시트와 라피난 단둘뿐일 테니까.

그인즉슨 이런 일을 벌인 당사자에게는 설명의 수고를 덜어 준 셈이다.

라피난이 자리를 뜨고 잠시 후, 이레이는 오도카니 서 있는 해시트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웃음을 터뜨렸다.

“꼭 하탄국의 무희 같군.”

“하탄국?”

“그런 데가 있어, 동쪽 어딘가에 존재하는 작은 나라.”

노래하듯 말한다. 춤추듯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으며.

“그 동네 무희들은 이렇게 비단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아름다운 춤을 추거든.”

“…….”

“너랑 잘 어울려.”

그러고 보니 라피난이 둘러 준 천이 여전히 눈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해시트는 더럭 인상을 찌푸리며 천을 풀어내기 위해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렸다.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는군.”

“애매하지. 그들은 아름다운 춤으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은 뒤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관중 중에 한 놈을 죽이거든. 사실 나도 한 번 당할 뻔했어. 아, 그거 내가 해 줄까?”

“필요 없…….”

“해 줄게.”

불쑥 다가온 이레이의 손이 허락도 없이 해시트의 손을 밀어 내더니 그녀를 대신해 매듭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툭.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하얀 천을 낚아채 그녀의 손바닥 위로 고이 올려 주기까지 한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린 상황에 해시트는 성질을 부릴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다. 그저 황당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으려니 이번엔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왼쪽 뺨 가운데에 닿았다.

“아.”

무심코 신음이 튀어나왔다.

따가웠다. 아까 바위 파편이 스친 바로 그 자리다.

“이런, 또 다쳤나.”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상처 위를 뒤덮었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그 숨결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다친 정도는 아니야. 신경 쓰지 마라.”

“신경이 쓰이는데. 내가 그런 거라서.”

“……어떻게 한 거냐, 그거.”

“뭐. 그 큰 바위를 어떻게 떨어뜨렸냐고?”

“그래.”

이레이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으쓱이다가 이내 평소처럼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그 상처 치료하게 해 주면 말해 줄게.”

“치사하긴.”

타박하자 옳다구나 더 유들유들한 반응이 이어졌다.

“음, 맞아. 난 치사하니까. 그럼 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네 배에 실밥 먼저 풀자. 완전히 낫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알려 줄 거야.”

“됐다. 그딴 거 안 듣고 말지.”

“알겠어. 그럼 치료만 받아.”

“뭐라?”

“건강하게 살자고, 건강하게. 건강한 몸으로 황제 폐하가 되셔야지. 안 그런가? 해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할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알려 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해시트는 조금 심통이 나서 쌀쌀맞게 그를 노려봤다.

“앞으로 그렇게 부르지 마라.”

“싫어. 앞으로도 이 정도는 내 의지로 결정할 거니까 알아 둬.”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성큼, 예고 없이 다가온 그가 돌연 분위기를 바꿨다.

“미리 말해 두지. 난 부귀영화엔 크게 관심 없어.”

그리고 고백하건대, 그가 쉬이 말을 들어 먹을 놈이 아니라는 것쯤은 해시트도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그 방향성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 것이 문제였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널 부르고,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널 만나고, 내가 지키고 싶은 방법으로 널 지키고, 내가 널…….”

“…….”

이제 그녀는 종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에 휩싸여 이레이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심술이나 짜증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불길함에 가까운 것이 등허리를 감싸 오고 있었다.

계속,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해스.”

“…….”

“내가 너를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잖아.”

“…….”

문득 내려다본 아래에 이레이의 오른손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자.”

천천히 손짓한다. 어서 잡으라는 듯이.

그녀는 단지 그 위에 사뿐히 얹기만 하면 되었다. 다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본능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너 이 손을 잡으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뚜렷한 경고였다.

해시트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멍청이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위에 깔린 시체를 찾는 작업에 병사 수십 명이 달려들어 아직까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끈이 풀려 도망간 군마를 찾는 이들, 수습한 시체를 확인하고 있는 군의관, 성서를 들고 안식을 기원하는 사제, 마지막으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라피난이 있었다.

현장은 놀랍게도 어수선했다. 불과 반 시간 전까지 태평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장소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의 술수로 벌어졌다니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악마의 짓이라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레이의 강함은 가히 악마에 견줄 만했다.

그때껏 그녀가 만나 본 중에 가장 압도적인 유혹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해시트는 비로소 악마의 속삭임 앞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했다.

“…….”

얼마나 흘렀을까.

하염없이 무거워지는 침묵을 가른 것은 또다시 이레이의 목소리였다.

“뭘 그렇게 긴장해?”

시큰둥하게 핀잔한 그가 불시에 내밀었던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해시트가 무심코 움켜쥐고 있던 새하얀 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것 좀 줘 보라니까. 피는 닦아야 할 거 아냐.”

“……아.”

그런 말을 했었다고? 들은 기억이 없었다.

해시트가 착각을 했거나 이레이가 그녀를 봐줬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이레이를 올려다보면서 손끝에 힘을 풀었다. 억세게 쥐었던 자리가 저릿했다. 하얀 천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그는 해시트에게서 앗아 낸 천을 반듯하게 접어서 그녀의 뺨을 닦아 주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툭 한마디를 내뱉는다.

“흉은 안 지겠군.”

다행이야.

다정하게 접히는 미소가 그림처럼 눈에 와 박혔다. 그 상이 뱃가죽을 꿰멘 흉터보다도 더 오랫동안 그녀의 눈에 남을까 두려웠다.

*

사고로 죽은 세 사람의 장례는 전사자들과 함께 성대하게 치르기로 입을 모았다.

“최선의 예우를 해 줘야지.”

침통한 해시트의 묵념에 모두가 슬퍼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다시 미케나로 돌아가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죽은 동료의 장사를 지내고자 한마음으로 속도를 낸 덕분에 일정을 무려 하루나 단축할 수 있었다. 마음이 느긋해진 해시트는 문득 라피난에게 질문을 꺼냈다.

“혹시 하탄국이 어디인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라피난은 생각하는 기색조차 없이 즉답했다.

답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찜찜하다 여길 법도 했지만 그야 다른 사람일 때 얘기다. 라피난의 화법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해시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제국에서 휘 선생 다음으로 가장 많은 책을 읽었을 그가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 나라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인즉슨 이레이가 또 헛소리를 지껄인 게 틀림없었다.

수도에 들어서자마자, 황태자의 귀환을 반기는 인파가 거리 가득 물결치는 모습이 보였다. 끊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어김없이 승전보를 가져오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백성은 없었다.

해시트가 사막을 왕복하는 동안 제국엔 벌써 봄이 온 모양이었다. 웬 여자아이 하나는 해시트에게 직접 꺾은 꽃과 손수 깎은 조각을 바치려 까치발로 행렬을 졸졸 따랐다.

“전하! 액운을 쫓아 준다는 흰타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부디 받아 주세요!”

해시트는 냉큼 마차 밖으로 상체를 빼 선물을 받았다.

“고맙구나.”

“아,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뻐요!”

“그래, 내 무사는 네 덕분이다.”

색이 고운 노란 꽃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녀와 같은 마차에 타고 있던 이레이와 라피난은 일단 해시트가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다가 그녀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잔소리를 개시했다.

“너 그렇게 막 움직이다가 상처 벌어진다. 이따 확인했는데 실밥 비뚤어져 있기만 해 봐.”

“전하. 수상한 자의 선물은 함부로 받지 마시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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