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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5화 (15/104)

15화.

얼핏 강아지를 부르는 손짓 같아 기분이 상할 법도 했으나 이레이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정말 개라도 된 것처럼 쪼르르 그녀에게 다가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해시트가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몇 명을 손봐야 해. 원래 전투 중에 몰래 처리할 예정이었는데, 웬 힘만 센 미친놈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보름도 안 돼서 전쟁이 끝나 버렸거든.”

“오. 그거 혹시 내 얘긴가?”

“어제까진 네 얘기였고 오늘부턴 라피난도 포함이고, 알아들었으면 둘 다 반성하고. 아무튼, 이 건은 은밀하게 진행해야 해. 또 요란법석을 떨어서 들켰다간 네 단독 행동이라고 우길 거니까 알아서 하도록.”

“흐음……. 그건 알겠는데, 이놈들이 누구기에 나더러 죽이래?”

시큰둥하게 질문한 이레이가 이내 지도에 적힌 이름들을 가리켰다.

“예키, 포렌네리아, 히르멜.”

톡, 톡, 톡.

그 손가락을 따라가던 해시트의 눈가로 뜻 모를 미소가 깊어 간다. 그녀는 조금 전 이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세 명의 이름을 순서대로 건드렸다. 간단한 설명이 뒤따른다.

“예키, 내 이복동생의 대부. 포렌네리아, 내 이복동생을 낳은 여자의 금전적 후원자. 히르멜, 그녀의 아버지.”

“아하.”

감탄사는 짧았고 다른 질문은 없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해시트는 알아서 부연해 주었다.

“나도 알아. 겨우 여섯 살 난 아이는 죄가 없어.”

그것만이 해시트와 그녀의 이복동생 제릴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었다. 죄 없이 태어났다는 것.

“비록 사생아일지언정 황가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응당 그에 걸맞은 예우를 갖춰 줄 것이다. 훗날 그 애가 어른이 되어 ‘어떤 선택’을 하기 전까지는 일단…….”

그 선택이 원죄가 될지 해방이 될지는 그때 가 봐야 알 터였다. 짤막한 한숨을 내쉰 해시트가 금세 목소리를 굳혔다.

“하지만, 아직 글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어린아이를 이용해서 내란을 꾀하려는 놈들은 일찌감치 죽어 마땅하지.”

“그놈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지금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귀찮아져.”

그들을 살려 두었다간 제 목숨이 위험해진다고는 곧 죽어도 인정하기 싫었다.

어느새 이레이는 팔짱까지 끼고 진지하게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야 슬며시 시선을 떼어 내고 해시트와 라피난을 돌아보았다.

“좋아. 사인은 사고사로 하자. 좀 쪼잔하긴 하지만 의심 안 사고 확실하게 보내 버릴 수 있으니까.”

곧장 라피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돼. 세 명이나 죽여야 하는데 그때마다 사고로 위장했다간 의심을 살 거다. 차라리 포로 이송 중에 폭동이 일어났다고 위장하는 편이 낫다.”

“손발 묶인 포로들이 퍽이나 무장한 장정 셋을 죽일 수 있겠군. 너라면 그 말을 믿겠나?”

“그러니 규모를 크게 벌여야지. 열댓 명쯤 희생이 따르겠지만 감수하고.”

“젠장, 꼼꼼도 하셔라. 알겠어. 그럼 여기 언덕쯤에서…….”

부루퉁하게 중얼거린 이레이가 다시 지도를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점을 콕 찍어 놓고 두 사람을 돌아보다가, 문득 해시트의 눈가에 드리워진 수심을 발견하곤 흠칫 눈빛을 굳힌다. 그 뒤엔 태연하게 방금 했던 말을 번복했다.

“귀찮아. 그냥 사고사로 할래.”

라피난의 얼굴이 냅다 구겨졌다.

“이레이. 지금까지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나?”

“걱정하지 마. 아무도 의심 못 하게 처리할게.”

이레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사고는 한 번이면 충분해.”

꾸욱, 그가 손바닥을 활짝 펼쳐 지도 위를 덮었다. 예키, 포렌네리아, 히르멜. 세 사람의 이름이 큼지막한 손바닥에 가려져 단숨에 모습을 감췄다.

그래서 해시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이레이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가 어쩐지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본 것 같기에.

*

전쟁은 유례없이 빠른 승리를 역사에 새기고 끝났다.

결과적으로 미케나 군이 적과 싸운 기간보다 사막을 왕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더 길게 남을 예정이다. 실제 전투는 고작 보름밖에 이어지지 않았고, 이제 미케나로 돌아가기 위해선 열흘이 넘도록 모래바람을 헤치고 서쪽으로 내달려야 했으므로.

그건 출정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정이었지만, 출정길과 귀향길에 한 가지 차이점을 꼽자면 바로 황태자 해시트의 옆자리라 할 수 있었다. 출정 때까지만 해도 십만 대군 중 단지 한 명이었던 이레이 린 경이 귀향길엔 당당히 해시트의 옆자리를 꿰찬 것이다.

“해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나팔수의 승전보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용케 그 사이로 파고든 나직한 목소리에 해시트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해 주었다.

“뭔데.”

“네 나라는 왜 이런 전쟁을 벌이는 거지?”

정말이지 전쟁 영웅이 가질 만한 의문이 아니었다. 혼자서 수백이 넘는 적군을 베어 낸 남자가 이제 와서 품을 의문은 더더욱 아니고말고. 황당해진 해시트는 그제야 헛웃음을 치며 이레이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졌는데?”

그때 이레이의 시선은 웬일로 앞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 꿋꿋이 정면만을 응시하며 질문을 잇는다.

“이 학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어져서.”

“……굳이 알 필요 없어.”

해시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언뜻 씁쓸해진 눈빛이 천천히 허공을 쓸다가 여타의 감정을 비워 낸 뒤에 다시 이레이를 담았다.

“어차피 이 몸이 즉위하면 사라질 역사다.”

“그래. 그렇군.”

“…….”

“그렇다면야 기꺼이.”

거대한 흑마에 올라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이레이 린은 지금껏 평범한 군인들 틈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목을 잡아끌었다.

모래바람에 나부끼는 어두운 빨강 머리가 보는 사람의 기분을 몹시 이상하게 만든다. 제국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붉은색. 그게 너무 낯설어서, 왠지 가슴이 시큰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레이는 그런 해시트의 감상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는 작게 덧붙였다.

“하면 나는 역사 속 마지막 괴물이 되겠군.”

“…….”

분명 그 속삭임을 들었으나 해시트는 곰곰이 곱씹은 끝에 듣지 못한 척 넘겨 버렸다. 어차피 그즈음 라피난이 말을 몰고 다가왔기에 더는 노닥거릴 수도 없었다.

“가시죠, 전하.”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라피난은 해시트에게 길을 내어줌과 동시에 이레이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직까지 약간의 불신이 깃든 눈초리였지만 이레이는 신경 쓰지 않아 했다.

“아, 나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지. 용병 나부랭이답게.”

그저 언제나처럼 비아냥거리며 행렬의 뒤편으로 말머리를 돌렸을 뿐이다. 그러니까, 미리 계획한 대로.

해시트는 돌아서는 그의 그림자를 잡고 물었다.

“이레이. 너 정말 자신 있나?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라.”

“장담하는데 다음부터는 그런 질문조차 안 하게 될걸.”

그의 그림자는 뒤를 돌아보기는커녕 그 흔한 손 인사도 없이 멀어져 갔다. 어쩐지 불길하고도 믿음직스러운 뒷모습이었다.

*

그리하여 끔찍한 비극은 닷새 후에 찾아왔다.

어느덧 귀향길이 절반에 접어든 한낮의 태양 아래. 뙤약볕을 피해 잠시 바위산 아래에서 쉬었다 가자고 제안한 이는 다름 아닌 황태자 해시트였다. 덕분에 모두가 사이좋게 안장에서 뛰어내려 시원한 그늘에 드러누웠을 때, 행렬 끄트머리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다들 일어나! 전갈이다!”

운이 나쁘기도 하지. 평화롭던 휴식 시간에 하필이면 붉은 전갈 떼가 나타나다니 말이다.

그 위협적인 무리는 거대한 바위산 틈바귀에 숨어 있다가 인간 냄새를 맡고 기어 나온 것 같았다.

맹독이 통통하게 차오른 전갈의 꼬리를 본 순간 모두가 쭈뼛 소름이 돋아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는데, 와중에 몇몇 병사가 말을 달래지 않고 막무가내로 안장에 오르려다가 말들을 놀라게 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힘 좋은 군마들이 콧김을 내뿜으며 발길질을 내리쳐 대니 그야말로 난리법석이 따로 없었다.

히이잉!

사나운 군마의 콧김에 사막은 더 뜨겁게 달궈졌고, 급기야 몇 마리는 묶였던 줄이 풀리면서 비명과 욕설이 뒤엉겼다.

해시트는 그 모든 광경을 가장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누군가가 소리치기를.

“저, 전갈이 나를 물었다! 빨리 어떻게 좀 해 봐라! 어서!”

……시작이다.

우악스러운 외침이 흩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고개를 쳐들어 절벽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뙤약볕에 드러난 금색 눈동자가 마치 조각난 유리 조각처럼 빛을 사방으로 흩트렸다. 반짝! 큰 바위 하나가 절벽 아래로 추락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이익…….

쾅!

“으아악!”

모래 먼지가 폭발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희뿌연 지옥 속에서 저마다의 아우성이 울려 퍼진다.

“허억! 여, 여기 사람이 깔렸다! 군의관! 군의관을 불러!”

“황태자 전하는 어디 계시냐! 어서 전하를 호위하라!”

“다들 무사한가? 이봐! 대답해!”

“제기랄, 아무것도 안 보여!”

해시트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모래 먼지 너머를 확인하기 위해 내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머잖아 라피난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에 깨끗한 천을 둘러 준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러나 기껍게 복종하면서.

“눈을 감고, 잠시 숨을 참으십시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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