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라피난이 세운 공을 이레이에게 돌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레이를 자제시켜야 할 지경이었다.
그 미친놈이 전투가 시작되기만 하면 어찌나 더 미쳐 날뛰어 대는지, 기세가 흡사 역신이 현신한 수준이라 항복할 적조차 남기지 않고 몽땅 쓸어버리기 일쑤였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함께 전투에 참여한 아군들마저 후유증을 토로한다는 점이었다. 꿈에 피 칠갑을 한 이레이의 얼굴이 나온다나 뭐라나.
겨우 다섯 번의 전투를 거치는 사이, 이레이는 원정대 안에서 최고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아무도 그가 황태자의 막사를 제집인 양 드나드는 데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 안에서 해시트가 얼마나 뒷목을 잡아 대는지도 까맣게 모르는 채로.
“야, 이 미친놈아.”
퍽!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투구를 벗어 던진 해시트가 거칠게 핀잔했다.
“너 때문에 내 소중한 병사들이 단체로 정신병 걸리기 일보 직전이라잖아! 적당히 못 하겠나?”
핀잔의 상대는 당연히 뒤따라 들어오는 이레이 린이다. 글쎄, 불경스럽게도 황태자 앞에서 짜증 난 표정을 마구 지어 보이는 저치 말이다.
“나더러 뭘 어쩌라고. 그럼 날아오는 칼을 그냥 맞고 있으리? 너처럼?”
“뭐?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해시트의 미간이 더욱 좁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레이가 이렇게 날뛰기 시작한 시기가 그녀의 부상 이후부터였다. 신체의 비밀 때문에 군의관을 부를 수는 없고, 언제나 그렇듯 대충 동여매고 끝내려던 부상을 그가 직접 치료해 주었던 날.
설마하니 이런 불량배 떠돌이에게 의사로서 재능이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심지어 그가 해시트의 성별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으리라곤 전혀 의심조차 못 했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이레이가 영원히 그때 일을 우려먹을 줄 미리 알았더라면 해시트는 환부가 썩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이 새끼에겐 치료받지 않았을 것이다.
“왜겠어. 이러다 내가 기껏 꿰매 준 상처가 다 터져서 다시 꿰매 줘야 할까 봐 그러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진심으로 짜증 나서 돌아 버릴지도 모르니 하루빨리 전쟁에 이겨서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아.”
“이미 과히 돌아 버린 놈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이 자식을 정말 솥에 넣어 삶아 버릴 수도 없고 환장하겠군.”
“말이 심하잖아. 나야말로 억울하군. 내가 오늘 가만히 지켜봤는데, 라피난 그놈도 혼자서 족히 열 명은 떡을 만들어 놓던데 왜 나한테만 잔소리지?”
“몰라서 묻나?”
되묻는 해시트의 얼굴에는 설명 못 할 찜찜함이 가득 찼다. 제 입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려니 벌써부터 비위가 상했다.
그때 마침 막사의 입구가 걷혔다. 라피난의 등장이었다.
그는 들췄던 입구를 단단히 여며 둔 뒤 다가와서 해시트를 대신해 대답을 차처했다. 여느 때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레이. 내가 언제 너처럼 적장의 두개골로 포환던지기나 그 비슷한 행동이라도 한 적 있나. 그것도 천 푸스(pous)가 넘어가는 성벽 꼭대기를 향해서? 눈앞에서 머리통이 쏘아 올라가 성벽 울타리에 꽂히는 꼴을 목격했으니 다들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아, 그거는…… 투포환이 아니고 과녁 놀이 같은 거지. 울타리에 꽂아 넣으면 명중하는.”
“그래서 그게 오늘만 세 명이었잖아.”
“으음, 그나마 신분깨나 있어 보이는 놈들이 달랑 셋뿐이더라고. 졸병은 전시해 봤자 본보기가 안 될 테니 참았다.”
라피난은 더 듣지 않고 빙글 몸을 돌려 해시트에게 제안했다.
“내치시지요. 하루빨리.”
“역시 그래야 할까?”
해시트가 침통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제국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저 꼴을 보느니 빨리 정리하는 게 낫습니다.”
“이봐, 그런 얘기는 나 없는 데서들 하는 게 어때?”
곧장 불만을 터뜨린 이레이의 얼굴에선 애석하게도 반성의 반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계속 구시렁댈 뿐이다.
“치사한 놈. 자기가 능력 없는 걸 왜 나한테 분풀이야? 그렇게 서러우면 너도 똑같은 짓 하든가, 근위대장 나리.”
이레이에겐 천하의 라피난도 분노에 휩싸이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그것이 고작 몇 마디 말로 가능하다는 게 가장 놀라운 지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꾸벅 해시트에게 묵례한 라피난이 곧장 이레이를 다시 돌아보았다.
“내가 너같이 천지 분간 못 하는 철부지 같나? 그런 짓은 할 줄 알아도 안 하는 게 맞다.”
“허풍은. 못 하는 거면서.”
“안 하는 거야.”
“그만 인정해라. 인정하면 편해져.”
“못 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내 귀에는 그렇게 안 들리는데?”
서서히 좁혀지는 두 남자의 간격을 지켜보다가 해시트가 돌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첫 단추를 잘못 끼웠지 싶다. 첫 만남이 암살자와 경호원이었어서 그런가, 말만 섞었다 하면 몇 마디가 채 흐르기도 전에 이렇게 으르렁거리니 번번이 귀 따갑고 눈 불편해서 못 살겠다. 결국 그녀가 나서 싸움을 저지해 버리곤 한다.
“둘 다 그만해. 쫓겨나기 싫으면.”
“…….”
“…….”
“잘 생각했어.”
재잘거리던 소리가 뚝 그치면 흐뭇하게 칭찬해 주기도 했다.
매번 누가 더 잘했네 누가 더 잘못했네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것도 참 피곤한 노릇이었다. 그냥 둘 다 못났다고 땅땅 못 박아 버리면 제일인 것을.
그나마 라피난은 사리분별이 되는 어른이라 망정이었다. 안 그랬으면 매일매일 철없는 짐승 새끼 두 마리를 앉혀 놓고 훈계하는 나날들이었을 테지.
그리하여 해시트는 라피난이 나이를 헛먹지 않은 어른이라는 사실에 남몰래 안도하였으나, 당연하게도 겨우 하루 만에 그 생각을 고쳐먹게 될 줄은 몰랐다.
겨우 하루 만에 말이다.
“……전하.”
“……저기, 해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박자씩 늦게 그녀를 불러 대는 라피난과 이레이를 앞에 두고, 해시트는 평소 물 대신 즐기는 헤라꽃 차를 마다한 채 냉수를 들이켜기 바빴다. 탁! 단숨에 비워 낸 컵을 내려놓은 뒤에야 무표정으로 입술을 떼어 낸다.
“글쎄, 오늘은 두 놈이 사이좋게 과녁 놀이를 했다지? 하하. 내 기가 막혀서.”
그것도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그 짓거리를 했단다. 그래 놓고 지금에 와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까지 둘이 아주 똑같았다.
“이 정신 나간 놈들아. 그냥 둘이 같이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
흥분을 가라앉히려던 노력도 잠시, 해시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연거푸 한숨을 토해 냈다.
“라피난, 이레이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너까지 이럴 수 있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기분이 아마 이런 것이겠다. 심란한 마음을 담아 라피난을 다그쳤는데 웬걸, 대답은 뜬금없이 이레이에게서 돌아왔다.
“아니, 왜 나는 그렇다 쳐? 이게 누굴 내놓은 자식 취급하고 있……”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경솔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라피난이 냉큼 이레이의 입을 틀어막고 사죄했다. 으읍, 솥뚜껑만 한 손에 호흡기관이 몽땅 가로막힌 이레이가 발버둥 치든 말든 절대 풀어 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는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나마 해시트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이레이도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레이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것만은 도무지 용인할 수 없다면서.
“집어치워. 네가 뭔데 날 관리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왜 날!”
“……노력하겠습니다.”
거의 팔이 꺾인 채로도 태연하게 했던 말을 반복하는 라피난이나 그깟 발언이 뭐 그리 거슬린다고 분기탱천한 이레이나 해시트의 눈에는 그러니까, 그냥 도긴개긴이었다.
멀대같이 덩치 큰 인간 둘이서 만담을 하고 자빠진 것도 아니고 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꾸욱, 그녀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애써 웃음을 삼킨 뒤엔 여태 참고 있던 질문을 꺼낸다.
“그래서 둘 중에 누가 이겼는데?”
“예?”
“어?”
웬일로 두 사람 모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두 눈만 동그랗게 치뜬다. 굳이 듣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결국 해시트는 삼켰던 웃음을 토해 내며 풀썩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승부라 이거로군.”
말 돌리는 데 귀재인 라피난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의자 팔걸이에 손을 걸친 즉시 언제 챙겨 왔는지 모를 지도를 꺼내 테이블에 넓게 펼쳤다. 그리고 태연하게 회의에 돌입했다.
“이 기세면 내일 해가 지기 전에 성벽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겁니다. 성 안에는 힘없는 아녀자들이 대다수고요. 새벽쯤 그들의 목숨을 보장하면 먼저 투항해 오리란 예상입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잖아도 슬슬 일 얘기를 할 때가 됐다. 해시트는 곰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도 위의 성벽을 짚었다.
“당연히 피를 덜 보는 쪽이 낫지. 포로들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개종을 요구해라. 그런 명목으로 시작된 전쟁이니 그 정도 겉치레는 해 줘야지. 군의관을 대기시켜 놓고 먼저 항복하는 자들을 성심껏 치료해 주도록. 그럼 결정이 빨라질 거다.”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럼 이제 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겠군.”
“그것도 준비하겠습니다.”
라피난은 유다른 반응 없이 테이블의 지도를 뒤집었다. 휙. 또 다른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거쳐야 하는 사막의 지도였다. 중간중간 까만 점으로 표시해 둔 지점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그에 내내 심드렁하던 이레이의 눈이 반짝 이채를 띠었다.
“무슨 작당을 하려는 거지? 나도 좀 알면 좋겠는데.”
해시트와 라피난이 그를 빼놓고 재미있는 일을 벌일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해시트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당연히 너도 알아야지. 네가 할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