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렇군요.”
“그 어린 게 밤새 아비를 찾는다는데 한 번쯤은 찾아가는 게 부모 된 도리일 테지.”
“예.”
해시트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제국 미케나의 신법상 일찍이 황태자를 결정한 황제는 사별 후에도 새 황비를 들일 수 없었다. 한 번 신에게 맹세한 후계자가 바뀌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의도였는데, 덕분에 황비의 사거 이후 황제의 아들을 낳은 세르히라 양은 여전히 ‘미혼모’ 딱지를 달고서 ‘사생아’를 기르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해시트가 헬렌밀 대신전에서 주관하는 황태자 시험에 통과했던 나이가 바로 열한 살, 그녀의 이복동생 제릴이 세상에 태어나기 일주일 전이었기 때문이다.
“해시트 전하! 참 야속하십니다. 꼭 지금 시험을 치르셔야겠습니까?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배 속에 있는 이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으시냔 말입니다!”
“응. 하나도 안 불쌍하니까 눈물 짜지 말고 물러가. 이 몸이 황태자궁에 입성하면 감히 디어 가문의 여식 따위가 함부로 얼쩡거리지 못할 테니 하루라도 빨리 해치우고 싶을 뿐이다.”
“전하!”
“건방지게 어디서 언성을 높이는 거야? 그리 분해서 죽겠으면 내 앞에서 이러지 말고 폐하께 가 빌어라.”
물론 레오니스 황제 또한, 태어날 자식이 혹시 사내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어떻게든 해시트의 시험을 미루고자 알음알음 뒷공작을 펼쳤더랬다. 그래 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신전의 시험이란 황제가 아닌 신에게 치르는 것이었으므로.
그러니 이제 와서 세르히라와 제릴에게 황비와 왕자의 신분을 내리게 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였다.
황태자 자리가 공석이 되는 것.
그것 말고는 레오니스 황제 스스로 지금껏 해시트의 성별을 속여 왔노라 공표하고 제위에서 내려오는 방법뿐이었으니, 다시 말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황제를 알현하고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시트는 무의식적으로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정해진 수순으로 씁쓸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빨리 그 모자를 치워 버리든가 해야지.”
벌써 육 년이나 된 흉터가 아직까지 들쑤시니 곤란하기 그지없다. 문제의 시험을 하루 앞두고 들이닥친 자객의 검에 죽다 살아나면서 얻은 흉터……. 낡지도 않는 기억을 곱씹느라 하마터면 까무룩 감상에 젖을 뻔했다.
“치워? 뭐를?”
“헉!”
또 느닷없이 이레이가 허공에서 뛰어내리지만 않았다면 분명 걷는 내내 불필요한 감상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뭐야? 네놈은 자꾸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야?”
심지어 이번에는 나무 그늘 아래도 아니었다. 해시트는 미처 숨기지 못한 혼란스러운 눈으로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너 혹시…… 황제궁 소속 시종으로 위장 취업이라도 했나?”
“뭐래. 내가 그렇게 한가한 놈으로 보여?”
“그래 보이긴 한다만…….”
“아니야.”
이레이가 대놓고 얼굴을 이지러뜨렸다.
“말했잖아.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거라고. 기껏 부자 상봉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기다려 줬더니 반응이 영 섭섭하군.”
“……그래. 알겠다. 대체 그놈의 할 말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빨리 듣고 치워 버리는 게 낫겠다는 것만은 알겠어. 해 봐라, 그 할 말이라는 거.”
“오. 드디어 백기 투항…….”
“글쎄, 딴소리 말고 어서!”
결국 해시트의 언성이 먼저 올라갔다.
내일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백기 투항 같은 단어를 지껄이고 자빠졌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악담도 정도가 있지, 어디서 그런 불길한 소리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그녀가 언짢아하거나 말거나 이레이는 꿋꿋이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해시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나직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질문했다.
“내가 널 지켜 주는 건 어때?”
해시트는 말문이 막혀서 제때 욕설을 내뱉지 못했다. 한참의 침묵을 흘려보낸 다음에야 마땅한 반응을 돌려주었음이다.
“실성했나?”
“제정신인데.”
으쓱, 이레이가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그렇다고 하니 해시트도 더는 참지 않았다.
“웃기는군! 그럼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빨간 머리를 경호원으로 삼으란 게 진담이라고? 그것도 폐하의 사주를 받고 날 죽이러 왔던 살인청부업자를?”
“아. 그건 걱정하지 마라. 황제에게 내 얼굴을 보인 적 없어.”
“그런 문제 같으냐?”
“그럼 뭐가 문젠데?”
뻔뻔함도 이 정도면 멍청한 거다. 말이 통해야 호통이라도 칠 텐데, 해시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맥 빠진 타박만 흘려보냈다.
“필요 없다. 경호는 라피난으로 충분해.”
“필요할걸. 그놈은 제국을 위해 널 지킬 테지만 난 나를 위해 널 지킬 거거든.”
“뭐라?”
“말 그대로.”
유들유들하던 이레이의 목소리에 갑자기 단단한 힘이 깃들었다. 코끝을 싸하게 적시는 추위보다 더 명확하게.
“말 그대로라고.”
“…….”
순간 그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황제궁 담벼락이 해시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지금쯤 라피난이 저 바깥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해시트는 막연하게 라피난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그녀에게 충심을 약속한 첫 번째 신하. 그리고 유일한 신하.
생각해 보면 라피난도 어느 날 갑자기 해시트 앞에 나타났고, 다짜고짜 그녀의 죽음에 기웃거리다가 건방진 참견을 일삼았었다.
오늘의 이레이처럼.
“네가 살아 있는 편이 내 생에도 좀 더 위로가 될 테니까.”
그러나 이레이와는 확연히 다른 말을 한다.
“……너 이름이 뭐냐.”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불현듯 궁금해져서 내키는 대로 질문하고 말았다. 이레이는 그녀의 의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뿐히 웃었다.
“이제야 묻는군.”
“두 번은 안 묻는다.”
“이레이 린. 그냥 이레이라고 부르면 돼, 해스.”
“…….”
해시트는 조용히 입술을 가로 닫았다.
해스.
그날은 그녀의 이름을 줄여 부르는 자가 이 세상에 다시 두 사람으로 늘어난 날이었다. 그것도 퍽 다정하게.
*
이튿날, 레오니스 황제는 끝내 출정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시트는 황제를 대신하여, 또 제국의 십만 대군을 대표하여 신관 앞에서 원정 결의문을 낭독했다. 결의에 찬 경례가 쏟아졌고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사막으로 말을 내달렸다.
라피난이 해시트에게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인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을 때다.
“이방인을 곁에 두시려면 명분이 필요하겠지요. 그게 빨간 머리라면 더더욱.”
그는 기어코 원정대 행렬에 따라붙은 이레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흘긋, 차가운 눈으로 뒤따라오는 행렬을 잠시 곁눈질하고는 하던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저자에게 몇 가지 공을 돌리겠습니다. 우연히 실력이 눈에 들어 근위대로 영입했다고 둘러대십시오.”
의외로 현실적인 조언에 해시트가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니 치켜떴다.
“반대할 줄 알았더니?”
“쥬달의 검을 맨손으로 부러뜨리는 자를 제가 무슨 수로요.”
“그 정도는 너도 할 수 있잖아. 힘도 센 녀석이 왜.”
“할 수야 있지만 전 그런 짓 안 해서요.”
보아하니 판단은 이성적이었으되 상처받은 자존심은 아직 회복 중에 있는 듯했다.
해시트는 피식 웃으며 고삐를 내리쳤다.
“이랴!”
그리고 라피난과 함께 멀찍이 선두로 달려 나가 남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 건방진 놈이 내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나를 돕겠다던데.”
“그랬습니까?”
“네가 보기엔 어떠냐. 도움이 될 것 같나?”
“뭐……, 길을 잘 들이신다면 써먹을 곳이 있을지도요.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확인해 봐야겠죠.”
“어쨌든 쓸 만해 보인다는 거지.”
“판단은 전하의 몫입니다. 저는 따를 뿐이고요.”
달리는 말 위에서도 라피난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밝은 백금발이 사막의 뙤약볕 아래 흔들리는 모습이 일견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를 태운 짐승마저 주인을 쏙 빼닮아 얼룩 한 점 없이 새하얀 자태를 자랑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라피난 카일.
너무나 순결하고 강직하여 오직 주군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사내.
그 완벽한 충성심 앞에서도 초라해지지 않는 그릇을 타고난 것만이 분명 해시트 인생의 유일한 천혜(天惠)였으리라.
“이 몸의 판단이라.”
불현듯 그녀가 드물게 짓궂은 눈빛으로 라피난을 바라보았다.
“라피난.”
“예.”
“만약 이 몸이 황위에 오르기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건 무조건 너다.”
“…….”
“아무도 너를 대신할 순 없어.”
그 누구도 이 미케나의 황태자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부연이 제대로 가닿은 듯했다. 라피난의 얼굴로 흔치 않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해시트가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서 눈을 떼어 냈다.
이어 그녀의 시선이 돌아간 곳은 뒤따라오고 있는 십만 대군의 중심부였다. 정확히는 지금쯤 저 무리에 섞여 평범한 군인인 척하고 있을 웬 미친놈을 찾아서 잠시 눈을 가늘여 보는 것이다.
한데 진짜로 그 안에서 이레이의 새파란 눈동자를 찾아내고야 말았을 때, 해시트는 어쩌면 저 남자의 존재가 그녀의 본능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지 모를 저런 놈에게…….”
어지간히 조급했나 보다.
그렇게 죽기 싫어서…….
그게 아니라면,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반드시 미케나의 황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
원정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시트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번에도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