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내 백성들은 왜 끼워 넣어.”
해시트의 눈 아래가 마뜩잖게 경련했다.
당장 급소에 칼을 대고 생과 사를 논하는 와중에, 갑자기 무고한 백성을 걸고넘어지는 이레이의 말본새가 거슬려서 그냥은 넘어가 줄 수 없었다. 오죽 가당치도 않은 이유를 들먹거려야지.
“이런 식이라면 내가 널 살려 줘도 곧 다른 놈 손에 죽을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백성들이 날 죽일 일은 없어.”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언정 나도 화풀이는 해야지.”
“뭐라?”
“네가 픽 죽어 버려서 다른 인간이 황제가 되어 버린다면 말이다. 나는 황실은 물론이거니와 이 나라 백성들까지 꼴 보기 싫어질 것 같거든.”
“미친놈이 심보까지 비뚤어졌군.”
“맞아. 그러니까 빨리.”
휙! 이레이가 반대편 손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라피난에게 휘둘렀다.
해시트가 시간을 끄는 틈을 타 그들에게 접근하던 라피난의 걸음이 단숨에 뒤로 물려졌다. 이레이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한 번 쳐다봐 준 뒤 하던 말을 계속했다.
“결정해라. 네 목과 네 백성의 목숨 중에 무엇을 고를 건지.”
이러다 그가 라피난의 목을 본보기로 삼아 버리기 전에 결정해야 했다. 망설이던 해시트는 더럭 언성을 높였다.
“못 골라! 전제가 잘못됐잖아!”
적잖이 짜증 섞인 외침도 이레이를 당황케 하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 되레 흥미에 찬 미소가 그의 만면에 피어오른 것을 보면.
“어떤 점이?”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는 내 백성들을 결코 죽일 수 없다. 내가 막을 테니까.”
“그럼 지금 너를 죽이면 그만이야.”
“……하지만 지금 내가 죽는다면, 앞으론 누구도 나의 백성들을 지킬 수 없겠지. 그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해시트는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악 따위 없는 곧은 눈빛으로 이레이를 노려봐 준 건 덤이었다.
불현듯 이레이가 피식 웃더니 그녀에게 겨누고 있던 검을 거둬들였다. 그것을 방 한쪽으로 멀리 던져 버린 뒤엔 언제 웃었냐는 양 무감한 얼굴로 되돌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미케나 황태자께서는 올해 열일곱이라더니, 일흔 먹은 늙은이처럼 궤변에 능하구나.”
“이 몸에 대해 아는 척 떠들지 마라.”
“나이에 비해 언변이 좋다는 칭찬이다.”
스릉, 이번엔 그의 검이 검집으로 되돌아갔다. 미련 없이 걸음을 떼어 낸 그가 라피난을 지나치며 속삭였다.
“아쉽군. 네 실력으론 얼마 못 가 죽어 버릴 아이야.”
“……닥쳐.”
일련의 상황으로 이미 한차례 자존심을 뭉갠 라피난에겐 더없이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라피난이 이를 악물고 그를 돌아보았을 때, 이레이는 벌써 창밖으로 한쪽 다리를 내밀고 있었다. 창틈으로 불어온 밤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이 너울거린다. 행여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세라, 라피난은 온 힘을 다해 부러진 단검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퍽!
투박하게 동강 난 단검의 날이 간발의 차로 이레이의 어깨에 부딪혔다가 방 안으로 튕겨져 돌아왔다. 창밖 저 아래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다.
“젠장! 피 나잖아! 아파!”
들키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를 수는 없다. 그게 아니라면 경비병에게 들켜도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지.
해시트는 긴장이 풀리기 무섭게 기가 막혀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중얼거렸다.
“허. 뭐 저딴…….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라피난은 우선 창문부터 굳게 닫아걸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그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미처 다른 무기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됐다. 쥬달의 검을 맨손으로 부러뜨리는 놈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저자에겐 수배령을 내릴까요?”
“그것도 됐어. 지금은 저런 놈한테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동의를 구하는 해시트의 눈빛에 라피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당시엔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늘 있어 온 암살 위협쯤이야 솔직히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문득 해시트가 입가에 가소로운 미소를 퍼뜨렸다.
“어차피 내가 살아 있는 걸 알게 되면 폐하께서 직접 그놈을 찾아 죽이려 드시겠지. 미친놈이어도 목숨은 아까울 테니 분명 날이 밝기 전에 이 제국을 떠날 거다.”
무엇보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아무렴 걱정하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어.”
추호도 그런 의심은.
*
그래도 의심 정도는 할 걸 그랬나. 이렇게 보기 좋게 빗나갈 줄 알았더라면 말이다.
“있잖아, 내가 며칠 동안 생각을 좀 해 봤거든.”
“악! 깜짝이야!”
대뜸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이레이와 마주치자마자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나가던 장소가 황제궁 후원 한가운데였기 때문이다.
새 출정을 하루 앞두고 황제를 알현하러 가던 길이었다. 심란한 와중에 며칠 전 저를 찾아왔던 암살자와 맞닥뜨렸으니 잠시 체통을 잊을 만도 했다.
“너, 너 뭐야. 네놈이 왜 여기 있나? 아니, 어떻게 들어왔지……?”
황제궁은 황태자 직속 근위대장인 라피난조차 동행할 수 없을 만큼 삼엄한 경비를 자랑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해시트는 잠시 말까지 더듬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이레이는 시큰둥하니 어깨를 한 번 들썩인 게 끝이었다.
“널 만나러 왔지. 너한테 해 줄 말이 있어서.”
“나는 들을 말 없다.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러기 싫다면?”
“그럼 저기 연못에 뛰어들어서 한시라도 빨리 세상을 하직하든가!”
“농담 한번 살벌하군.”
“난 농담 싫어해.”
“아, 그건 나도.”
“오. 얘기 끝났네. 얼른 저기 가서 처박혀라.”
눈을 부릅뜬 해시트가 단호하게 연못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꽁꽁 언 연못으로 달려가 풍덩 뛰어들지 않으면 직접 처넣어 주겠다는 듯이. 그러다 이레이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태도였다. 결국 이레이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한발 물러나 주었다.
“조그만 게 꼭 세상 다 산 것처럼 말하는군. 죽을 고비를 너무 많이 넘겼더니 그 나이에 겁대가리라도 상실했나?”
“그러게. 대관절 네놈은 몇 살이나 먹었기에 그렇게 건방질까?”
한데 정말로 몇 살이나 먹었을까 궁금하긴 하다.
스물? 스물다섯?
낮은 목소리를 비롯하여 당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였지만 웃을 땐 묘하게 어린 소년의 느낌이 났다. 의외로 해시트보다 어릴지도 모르겠다. 이놈이야말로 원체 험하게 살다 보니 겉늙었을지 알 게 뭔가.
“너보단 오래 살았으니 억울해하지 마시지. 해시트 전하.”
그때 불쑥 끼어든 이레이의 대답이 해시트의 의심을 만류하다 못해 단칼에 잘라 냈다. 해시트는 새삼 기분이 언짢아져서―그야 언짢지 않을 이유가 단 하나라도 있는 게 더 이상했지만―낯짝을 잔뜩 구기고 받아쳤다.
“감히 누구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거야?”
“음? 나 혼자만 네 이름 알고 있는 게 억울한가?”
“뭐?”
“좋아. 내 이름도 알려 줄게. 통성명하잔 소리를 뭐 그렇게 어렵게 하고 그래. 잘 들어라. 내 이름은…….”
“아니. 안 궁금해. 입 다물어. 다물고 그대로 꺼져.”
해시트는 거의 귀를 막을 기세로 도리질 쳤다. 왜인지 그 반응이 이레이를 더 즐겁게 만든 것 같았다. 급기야 보란 듯 팔짱을 꼈다.
“자질이 부족하군. 할 말 있어서 찾아온 사람을 이렇게 박대하면 쓰나.”
“처음부터 들을 말 없다고 했을 텐데?”
“들어 보면 생각이 바뀔걸.”
“안 바뀌어.”
끈질긴 공략과 굳건한 거절이 반복됐다. 시종일관 짜증으로 무장한 해시트와 달리 여유롭던 이레이의 표정에는 차츰 미량의 섭섭함이 쌓여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별안간 그가 해시트의 머리 너머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대화는 이따가 마저 할까. 나는 잠깐 실례하지.”
여태 벽에 대고 외쳤을 뿐 대화라는 걸 주고받은 기억이 없거늘 어처구니가 없다. 해시트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이따가는 무슨 이따가! 너 다신 내 눈에 띄지 말……!”
“쉿. 충고해 주는데 조용히 있어라.”
“뭐?”
어째 분위기가 바뀌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그녀의 시야에 저 멀리 황제와 수행원 무리가 들어왔다. 해시트는 깜짝 놀라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시 이레이를 돌아보았지만 빌어먹을, 황당하게도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그는 없고 버석한 겨울 낙엽만이 몇 개 떨어지는 중이었다. 황급히 머리를 쳐들어도 보았으나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만 즐비했다.
그사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 있었구나, 해스.”
“…….”
“찾아다녔단다.”
그녀가 생김새를 빼다 박은 레오니스 황제는 이렇듯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줄여 불러 주곤 했다.
‘해스.’
한때 세상에 그녀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이가 두 명이나 되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황제 하나뿐이다. 이제 죽고 없는 황제의 유일한 부인이 두 번째 사람이었다.
해시트는 거두절미 차가운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댔다.
“황태자 해시트가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고개를 들라. 간만에 아들의 얼굴 좀 자세히 보자꾸나.”
“황송합니다.”
이윽고 황제와 함께 낙엽 진 정원을 산책하다가, 해시트는 등 뒤의 수행원들을 곁눈질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직 날이 춥습니다. 어째서 안에서 기다리시지 않고요.”
“부른 시간이 다 되었는데 웬일로 기별이 없기에 걱정이 돼서 나와 보았지. 오는 길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느냐?”
“아……, 죄송합니다. 내일 전쟁터로 향할 준비를 꾸리다가 잠시 시간을 잊었습니다.”
며칠 전 당신께서 보낸 암살자와 무익한 설전을 벌였노라 대답할 수는 없었다. 해시트의 변명을 들은 레오니스가 허허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내일이냐. 매번 황태자를 전장에 보내려니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다.”
“…….”
그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표면상으로는 둘도 없는 부자지간이었다. 기실 따지자면 부자지간이라는 정의부터가 거짓이었으니 그 밖에 문제는 자연스레 자질구레하고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리기 일쑤였다.
“내일 출정식에는 나오십니까? 폐하의 옥안을 뵙고 나면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겁니다.”
“아직 모르겠구나. 오전에 세르히라가 찾아왔었는데, 어젯밤부터 제릴이 심한 열병으로 앓아누웠다지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