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1화 (11/104)

11화

#2. 마지막 겨울

해시트가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추억은 삼 년 전 겨울에서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던 마지막 겨울. 당연히 그때는 그와 세 번의 겨울을 함께 보내고 봄이 오자마자 그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다.

겨우 열일곱이었던 황태자 해시트는, 그날도 어김없이 찾아든 자객의 습격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웬 놈이냐!”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순식간에 베개 밑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하던 차, 그건 순전히 꿈자리가 사나웠던 탓이지만 그녀의 등줄기에 소름을 오소소 돋게 만든 정체는 열린 창틈으로 밀려든 찬 바람이었다.

그때, 이레이는 저를 향한 해시트의 검 끝을 내려다보면서 같잖게 웃었다.

“전하.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땀을 많이 흘리셨군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시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누구냐.”

“음……. 글쎄 누굴까, 이 밤중에 미케나 황태자 전하의 침실로 찾아온 괴한이.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빈정거리는 짧은 사이, 그의 입가에 빙글거리던 미소가 사라지고 차가운 인상만이 오롯해졌다.

이레이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냉혹했다.

감히 황태자의 안전에서 말을 놓아 버리는 오만함도, 그러면서 해시트의 얼굴을 훑어내리는 시선에도 훗날과 같은 흥미로움은커녕 오직 관성적인 비아냥거림만이 희미했다. 그의 차가움에 맞서기 위해 해시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쳐야 했다.

“네놈이 암살자라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겠다. 그런 거 말고, 누가 널 보냈느냐고 묻잖아! 이 멍청한 자식아!”

그러자 이레이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더니 돌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나 이 일 시작하고 그런 욕 처음 들어 봐. 신선한데?”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었다. 그런 실없는 농담 뒤엔 다시 감흥 없는 표정으로 돌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부러 소란을 부리고 싶은 거라면 관둬라. 바깥에 경비병들은 벌써 다 죽었고, 나는 네 말대로 너를 죽이러 여기 왔으니까.”

“건방진 새끼. 너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다. 누가 널 보냈느냐고 물었어.”

“이런, 그냥 입이 거친 거였나?”

“대답!”

거친 고함이 반복됐다.

이레이의 눈자위가 가늘어졌다.

“잠깐, 너 목소리가 아주…….”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침대에 한쪽 무릎을 괘 해시트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는 듯했다. 이제 와서 암살 대상을 거듭 확인할 마음이 들었을 리는 없는데, 거의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지자 해시트의 검날이 그의 목울대에 닿을락 말락 했다.

“더 다가오면 찌르겠다.”

“원하시는 대로.”

그는 귀찮은 표정으로 대충 대꾸했다. 그마저 거짓말이었는지, 그런 직후엔 거의 휘젓는 손짓으로 해시트의 양 팔목을 움켜쥐어 가차 없이 비틀어 버렸다.

“악!”

비명과 함께 검이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쨍그랑!

쇠붙이와 대리석이 만난 파열음이 찢길 듯 날카로웠으나 결코 이레이의 눈초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매섭다 못해 선득한 눈빛이 어느새 해시트의 모든 것을 낱낱이 훑어 대고 있었다.

이레이가 말했다.

“내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는지 알려 주면 뭘 어쩔 건데?”

슬며시, 그의 입가로 종전과 다른 미소가 떠올랐다. 해시트는 그에게 붙들린 손목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면서 사납게 이레이를 노려보았다.

“죽여야지!”

“죽일 담력은 있고?”

“살생은 너만 해 본 줄 아나?”

“호오, 이런 가느다란 손목으로 벌써 그런 짓까지…….”

어느덧 이레이는 흥미가 완연한 표정으로 해시트의 손목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 혼자만 재미있었고, 해시트는 조금 전 꺾인 손목이 흔들릴 때마다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거 놔!”

“소문에 미케나의 황태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홍복을 타고났다더니, 그 안에 강인한 신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나 보군. 아니면 다 헛소문이었나?”

“닥치지 못해?”

“너야말로 말을 좀 길게 해 보는 게 어때? 아까부터 나 혼자 떠드는 기분이라 영 머쓱하네.”

“허,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그 미친놈에게 궁금한 게 있잖아. 제대로 애원해 봐. 누가 날 보냈는지 알려 줄게.”

조롱 섞인 채근이 계속됐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해시트는 한껏 이지러뜨렸던 안면 근육을 천천히 가라앉히며 말했다.

“됐다. 그냥 알려 주지 마.”

“왜? 갑자기 진실이 두려워지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

해시트가 작게 실소했다. 진실이니 두려움이니를 운운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번 암살자는 제 뒷배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아는 모양이다. 그녀는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네놈 배후가 누구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뭐?”

“시간 다 끌었다는 소리다.”

그 말에 이레이의 미간이 확 좁아 들었다. 짙은 미소를 만면에 퍼뜨린 해시트와는 정반대였다.

“황제께서 보내셨겠지. 나의 아버지.”

“…….”

굳이 헤아리자면, 그것이 이레이가 본 그녀의 첫 번째 미소다.

찰나에 스쳐 사라진 흔적에 불과했지만 과연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긴 충분했다. 그런데도 마냥 넋 놓고 구경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목덜미에 싸늘한 한기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분 곁에서 떨어져라.”

“…….”

손바닥만 한 길이의 단검은 일격에 적의 숨통을 끊어 놓기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단검일 때나 그렇고, 제국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 쥬달이 만든 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이레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의 지척까지 접근한 실력자에겐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이레이는 눈동자를 굴려 제 목에 단검을 겨눈 사내를 곁눈질했다. 곧장 라피난이 반복했다.

“떨어져.”

“아, 미안. 그쪽이 소문의 잘생긴 근위대장인가 봐.”

탁, 이레이가 해시트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이어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라피난의 단검이 함께 움직였다. 감히 황태자를 죽이려 한 죄인을 라피난이 살려 보낼 리 없었다. 한순간에 전세가 역전되었음에도 이레이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천천히, 해시트와 라피난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연다.

“나를 보고 겁에 질린 눈은 연기가 아니었는데……. 하면 배후를 죽이겠다던 으름장이 거짓이었나? 감히 황제를 죽일 담력은 없을 테니.”

묘한 기대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해시트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받아쳐 주었다.

“담력은 충분하고 단지 기회를 엿볼 뿐이다.”

“허풍이 아니었다?”

“그래.”

“너 혹시 사생아?”

이번엔 설마 하는 의심이 깃들어 있다. 곧 죽을 죄인을 굳이 계속 상대해 줄 의무도 가치도 없었으나, 감히 그따위 의심을 품은 채 죽게 만들 수도 없었다. 해시트는 살벌한 눈으로 이레이를 쏘아보았다.

“입 다물어. 아무리 곧 죽을 놈이라지만 망발이 과하구나.”

“…….”

“죽기 전에 똑똑히 기억해 둬라. 나 해시트는 제국의 유일한 적통이다. 폐하의 뒤를 이어 이 제국을 다스릴 자는 이 세상에 오직 나뿐이야.”

완벽한 순혈. 장차 미케나의 황제가 될 단 하나의 주인.

이레이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 이미 해시트는 스스로의 입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할 말을 마친 그녀가 라피난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흘긋, 내리까는 그녀의 눈꺼풀에 맞춰 단검을 쥔 라피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급소를 찌를 때 그는 절대로 망설이지 않는다. 그것이 사냥감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아는 이답게.

콰득!

단단한 것이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말소리는 그다음이었다.

“성격이 급하군. 나만큼이나.”

빙그르, 두 동강 난 단검의 칼날 부분이 이레이의 손에서 장난감인 양 돌아갔다.

졸지에 날이 부러진 손잡이만 돌려받게 된 라피난은 못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차분하던 눈썹 산이 구겨진 뒤 원래대로 돌아갈 줄 몰랐다. 놀란 건 해시트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최고의 대장장이가 바친 검이 고작 떠중이 암살자의 손에 부러졌다니.

“너 정체가 뭐야.”

라피난이 다그쳤다. 이레이는 빙긋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널 이길 수 있는 남자.”

“증명해 봐.”

차갑게 일갈한 라피난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냈다.

자객을 처리할 때 그는 가능한 한 조용한 방법을 선호했지만 오늘은 소란을 피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레이는 그 판단을 존중한다는 듯 곰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얼마든지. 하지만 지금은 고민되는군.”

“두려운가?”

“설마. 고민 중이라고 했잖아.”

실제로 그는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내 손에 쥔 칼날 조각을 등 뒤로 집어 던지고는,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 없도록 빠른 몸놀림으로 바닥에 떨어진 해시트의 검을 주워 들었다.

휙! 공기를 가른 검신이 해시트의 턱 아래에서 멈췄다. 라피난이 눈을 부릅떴다.

“전하!”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

해시트는 쌀쌀맞게 핀잔했다. 이레이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치는가 싶더니 곧 무감한 말투로 해시트를 나무랐다.

“전하께서도 입은 다물고 있는 게 좋아. 이쪽이 급소라서 살짝만 긁혀도 치명상이거든.”

“이 몸이 그걸 모를 것 같나? 감히 내 앞에서 잘난 척하지 마라.”

“오.”

내뱉은 감탄사에 비아냥거림이 완연했다.

해시트는 턱을 치켜든 채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차가운 검날이 얇은 피부를 스치는 감각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모든 거리를 계산해 검을 휘두르면서도 라피난을 향한 경계는 흩트리지 않은 이레이를 보았더니 저절로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

“…….”

찰나 침묵이 오갈 제, 이레이의 새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해시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해시트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레이의 미소가 조금씩 깊어지는 광경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지금 너를 죽일지, 나중에 네 백성들을 죽일지 고민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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