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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0화 (10/104)

10화

빗겨 간 이레이의 단검은 바닥을 뒹굴던 책의 정중앙으로 가 꽂혔다. 그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온 대륙을 다 뒤져 본들 쉬이 구할 수 없을 희귀한 고서적이었으나, 정작 책의 주인인 이레이나 본의 아니게 책을 훼손시킨 라피난 모두 잠깐이나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둘 다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검을 뽑아 든 라피난을 바라보며 이레이가 비죽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설마 저 단검을 너에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

곧장 라피난의 침통한 한숨이 이어졌다.

“결국엔 이 꼴이 날 것을……. 역시 처음 만났을 때 널 처리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네가 이 자리에 없었겠지. 해스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었을 테고.”

“폐하께서 황위에 오른 것이 전부 네 공이라고 말하고 싶나?”

“글쎄. 만약 그때 네가 괜한 객기라도 부렸다면 너와 해스, 둘 다 내 손에 죽었을 테니까.”

“이레이, 지금 네 행동이 바로 객기다.”

“먼저 검을 뺀 게 누구시더라.”

“그 전에 목을 조른 건 너였지.”

“네가 먼저 성질나게 했잖아.”

“억울하면 너도 무기를 들어.”

까딱, 라피난이 턱짓했다. 일련의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그의 눈은 여느 때만큼 냉랭해져서 이제 모든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이레이는 기꺼이 라피난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못할 줄 알고.”

그때였다.

“멈추시오!”

문밖에서부터 쩌렁쩌렁한 일갈이 터져 나오더니 곧 집 안으로 군인 수십 명이 우르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공간을 메운 행렬의 끄트머리에는 황제, 해시트가 시중드는 이들을 거닐고서 걸음을 디디고 있었다.

곱게 빗어 내린 흑발과 팔다리 곳곳에 두른 휘황찬란한 보석이 왕관 없이도 그녀의 신분을 과히 증명했다. 이미 이레이를 제외한 모두가 그녀를 본 즉각 한쪽 무릎을 굽혀 머리를 조아렸음이라.

이윽고 방 한가운데 들어선 해시트가 난장판이 된 바닥 꼬락서니를 빙 둘러본 끝에 말했다.

“다들 나가라. 이 몸이 직접 심문하겠다.”

“폐하.”

라피난이 더럭 고개를 쳐들었다. 해시트는 일부러인지 그에게 일별도 던지지 않았다.

“재상도 바깥에서 기다리도록.”

“……예.”

질끈, 두 눈을 감은 라피난이 예를 갖추어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그에게 황제의 결정을 거스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설령 그게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레이 린과 단둘이 대화해 보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일지라도. 하여 이런 상황에서조차 해시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레이의 눈빛이 더욱 못마땅할 따름이다.

그의 눈은 때로 너무나 솔직해서 지켜보는 이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하물며 저 시선을 직접 감당해 왔을 해시트에겐 두말할 필요도 없었을 터다.

그런데도 그녀는 모두를 물리고야 말았다.

“……죄다 때려 부숴 놨군.”

시중드는 이 하나 남기지 않고 혼자 남은, 아니, 이레이 린과 단둘이 남은 그녀는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어질러진 방바닥을 살폈다. 잠시 혀를 차다가, 두꺼운 고서를 관통한 단검까지 발견했을 땐 아예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은 가?”

“화내지 마. 난 내가 뱉은 말을 지켰을 뿐이야.”

“뻔뻔하기는.”

그제야 해시트의 언성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언제 귀족 자제를 죽이라고 시켰나? 산적 우두머리 목을 잘라 오라고 명했지!”

되도록 침착하려 했지만 잘 안 됐다. 사실 그와 독대할 적의 해시트는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감정의 밑바닥까지 직접 껍질을 벗겨 까발리고 만다. 그럴수록 이레이가 신이 나서 더욱 늦장을 부린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때도 됐건만.

“뭐야, 설마 잊어버렸어?”

아니나 다를까 금세 나긋해진 눈빛이 해시트의 심기를 거슬렀다. 여유로운 말투와 달리 그의 걸음은 순식간에 해시트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그녀가 피할 새 없이 턱을 낚아채 단단히 옭아매 버린다. 끌려가듯 고개를 치켜든 해시트가 안면 근육을 한껏 이지러뜨렸다.

“놔.”

“……잊지 않았군.”

피식, 이레이의 입술도 적잖이 비틀렸다. 잊지 않았으면서 왜 잊어버린 척하느냔 추궁이다. 그는 해시트의 입 밖으로 난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감히 잊어버린 척을 하다니 괘씸하다는 비난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해시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맹렬하게 내리쬐며 그녀가 숨겨 둔 속내를 낱낱이 훔쳐보려 들었다.

그러나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

“…….”

어쩌면 시간이 멈췄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의심을 깨부순 건, 결국 한발 양보해 스스로 정답을 실토하는 이레이의 입술이었다.

“내가 널 처음 발견했을 때, 경고했었잖아.”

“…….”

“지금 너를 죽일지, 훗날 너의 백성들을 죽여야 할지 고민된다고.”

종전 해시트가 모른 척한 모든 이유가 그 속에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보란 듯이 달싹이는 그의 입술 너머.

“그때 너를 살려 두었더니 결국 오늘날 네 백성을 죽이게 되었군.”

간악한 혀가 불시 속삭임을 멈추더니 그는 더럭 그녀에게 입술을 포갰다.

훅 끼쳐 오는 향기가 익숙해 억울했다. 밀어내도 밀려나기는커녕 더한 심술을 부리는 이 유치한 심보를 또 얼마간 참아 주어야 한다……. 지리멸렬하게 번져 가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해시트는 또다시 딴생각에 빠졌다.

시체의 머리와 한방에서 지내느라 잠을 설쳤다. 날이 밝기 무섭게 신랑감으로 점찍어 둔 청년의 죽음을 보았다. 밤새 그녀를 괴롭히던 피비린내가 바로 그의 것이었단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물 한 모금도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부대끼고 있는 남자의 숨결은 뭐랄까, 퍽 다정하지 않은가.

비록 다 거짓말일지라도.

이 안온함에 속아선 안 된다.

이 남자는 너 때문에 죄 없는 백성이 죽었다며 그녀를 나무라는 중이었다. 그녀의 그릇된 판단이 야기한 비극이라며 이죽거리는 중이었다. 다만 그런 뻔한 말 대신에 끈질기게 그녀의 숨을 탐할 뿐이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갈 적에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날숨을 흩트렸다. 숨이 막혀 젖어 든 눈자위가 불그스름했다.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이레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날 살려 둔 걸 후회하나?”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단호한 대답에 질문을 바꿔야 했다.

“그렇다면 날 후회하게 만들고 싶은 거냐? 그때 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네가 날 데려간 게 아니라 내가 널 따라온 거지.”

“건방진 놈.”

“사실이잖아. 그때 네겐 선택권이 없었어.”

“그럼 이런 결말도 각오했어야지!”

“…….”

“내가 너를 데려가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언젠간 나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도 각오했었어야지.”

웬일로 당장 반박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레이는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다가 잠시 후에야 툭 내뱉었다.

“그게 어렵더군.”

“…….”

“너는 어땠나? 해스, 네겐 쉽던가?”

이레이는 앞선 침묵이 장난이었다는 듯 쉽게 지껄였다.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해시트의 본심이 무색했다.

“아니면 어려웠나? 나처럼.”

불현듯 시선을 고꾸라뜨린 그가 해시트의 손가락을 헤집었다. 곧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 파고들어 깍지를 꼈지만, 어쩐 일인지 교접은 단단하지 못했다. 가끔 그는 해시트가 먼저 붙잡아 주길 기대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가 이럴 때마다 해시트는 가장 깊은 후회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한다. 죄 없이 목이 잘린 젊은이보다 이 죄인을 가여워하게 되는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정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쏘아붙인다.

“착각하지 마라. 이 몸이 황제가 되고자 결심했던 날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야. 난 한 번도 거스르려 한 적 없다.”

“야박하긴.”

작은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드리워진 앞머리에 눈가를 가린 채 이레이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은 아닐 테니 응당 비웃음일밖에. 과연 그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자 선득하게 빛나는 안광이 해시트를 향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뭘 모르는 것 같은데. 해스.”

“알아야 하나?”

“들어.”

그가 씹어뱉었다.

“나는 너의 몸이나 마음, 둘 중 하나만 가지는 걸로 만족하지 않아. 둘 다 내가 가질 거다.”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언제나 그렇듯 해시트의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해시트를 알아차렸는지 문득 입가의 미소를 짙게 패며 덧붙였다.

“네 손으로 나에게 주게 될 거라고, 직접.”

“……이레이 린 경.”

망설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매사 능숙한 시늉을 하지만 사실 해시트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소중한 한 가지를 버릴 때마다 아쉬움에 몰래 돌아보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돌아볼 수도 없는 상대라면 버리기도 전에 이미 아쉬워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분명 네가 원하는 건 추억이라고 말했었지. 내가 아니라.”

그래, 사실대로 고하건대 해시트도 이레이가 입 밖에 냈던 모든 말을 기억한다. 혼자만 간직하게 될 줄 알고 억지로 떨쳐 버리지 않았었다. 그를 버리는 날 남김없이 쥐어짜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삼 년 동안 쌓은 추억이라면 네가 죽을 때까지 꺼내 보기에 충분하겠구나.”

“……해스.”

“충분할 거야.”

“…….”

이레이의 손이 다시 그녀의 뺨을 감싸려 했다. 서늘한 체온이 닿기도 전에 시렸다. 해시트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어지럽게 몰아치는 후회는 꼭 지난겨울의 추위와 닮아 있었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발 아래에 선 기분, 그에 그녀는 문 바깥을 내다보며 차갑게 외쳤다.

“죄인이 모든 죄를 실토하였다. 연행하라.”

이젠 정말로 혼자서만 몰래 들여다봐야 한다.

그녀의 남은 인생 전부를 통틀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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