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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9화 (9/104)

9화

그는 끝까지 못된 말로 빈정거리면서 침대 밖으로 물러났다.

곧 그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창문 앞이었다. 비스듬히 열린 틈새로 달빛과 비바람이 함께 새어 들고 있었다. 어떻게 들키지도 않고 저런 데로 잘도 들락거리더라. 무심코 생각했을 때, 불현듯 이레이가 창턱에 손바닥을 짚어 놓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해스.”

한때는 그렇게 좀 부르지 말라고 정색을 떤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벌써 그리운지……. 해시트는 새삼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부러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왜.”

“혹시 나한테 뭐 할 말 없나?”

이레이의 고개가 슬며시 한쪽으로 기울여졌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 명확한 단어로 읊자면 그 눈동자엔 미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게 해시트를 등 떠밀었다.

“……있지.”

“해 봐. 뭐야.”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외면하고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역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다.

“제국을 떠날 거라면, 떠나기 전에 라피난을 찾아가 봐라. 너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싫어하니 가볍게 몸에 지닐 수 있는 것들로 준비했다.”

“…….”

“그래 봤자 대부분 보석이야. 지금껏 네가 해 온 일에 비하면 별건 아니지만, 적어도 남은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그만해. 진짜 복수하고 싶어지기 전에.”

더럭 그녀의 말을 자르고 끼어든 목소리가 종전에 비해 한없이 분노로 떨렸다. 마주할 자신이 없어지자 해시트는 고개를 숙이고 자그맣게 웅얼거렸다.

“웬만하면 가지고 가라. 빈손으로 떠나보내기엔 네가 한 일이 너무 많다.”

“정말 나를 치하하고 싶다면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걸 줘. 넌 알잖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더럭 창턱에서 손을 떼어 낸 이레이가 당장 그녀에게 달려들 기세로 몸을 비틀었다. 해시트는 그를 저지하듯 외쳤다.

“사람에겐 분수라는 게 있어.”

그러자 거짓말처럼 이레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습관 같은 실소가 흐른다.

“모욕적이군.”

“감당하지 못할 걸 욕망하지 말란 뜻이다.”

이레이는 두 번이나 모욕당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 그건 그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분수,

다른 말로 삶의 지름.

해시트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몇 곱절을 더 걸어야만 제 몫의 한 바퀴를 다 채울 수 있을까 궁금했다.

제자리에 오도카니 선 채로 이레이가 말했다.

“하면, 네 신랑이 될 거라던 그 철부지 꼬마는 너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이번에 해시트는 도무지 웃지 않고서는 대꾸할 수 없었다. 내내 침울하던 그녀의 입가로 허망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알 게 뭐야. 그런 건 내가 알 필요 없지. 제국이 리히티 가문에게 주는 건 황제의 신랑이자 국부라는 영광일 뿐, 나의 마음 같은 게 아니다.”

“…….”

“사랑은 더더욱 아니고.”

“아……, 그런 말이었나?”

이레이는 드디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창턱을 짚고 밖으로 뛰어내리는 마지막 뒷모습에 분노에 찬 빈정거림이 맴돈다.

“겨우 마음 정도는 내게 주겠다는 거로군. 빌어먹게도 황송해.”

“…….”

홀로 남은 해시트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미 떠나 버린 빈자리가 뻔히 보이는데도 혼잣말로나마 반박해야만 할 것 같아 곤란했다.

마음.

마음이라니.

언제나 그렇듯 넘겨짚기가 뻔뻔하기 이를 데 없더라. 그런데도 해시트는 왜 단 한 마디도 항변하지 못하고 있을까. 혼잣말은커녕 생각조차 되뇔 수 없는지. 비단 붙잡을 겨를도 주지 않고 떠나 버린 그 사내 때문만은 아닐 터인데…….

글쎄 그것을 누차 설명해 보자면, 그러니까 마음 따위가 뭐 대수이겠느냐는 것이다.

그따위 건 벌써 옛날에 짓밟아 낭떠러지로 굴려 떨어뜨렸는데.

*

고작 마음 같은 것.

그다지도 한심한 마음 따위.

어쩌면 그것이 썩 대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해시트가 알게 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꺄아아악!”

시종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 그렇지, 이레이가 두고 간 죄인의 목을 일러두는 걸 깜박했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폐, 폐하! 이리 좀 와 보십시오!”

솔직히 말하자면 수선 좀 그만 떨라며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밤새 피비린내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친 쪽은 시종이 아닌 해시트였으므로.

그러나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비명의 근원지를 바라보았을 때, 해시트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된 목소리가 샜다.

“……재상. 카일 재상은 지금 어디에 있나?”

목이 잘린 덴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걸 눈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단지 두 눈두덩이가 텅 비어서 시뻘건 핏물만을 뚝뚝 떨어뜨리는, 죄 없는 자의 머리가 거기에 있었다.

*

성에 머무를 적에 이레이 린의 하루는 대부분 예외 없이 흘러갔다.

아침, 커튼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에 잠에서 깨어나 가만히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벌떡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켠다. 바로 이불을 정리하고, 옷을 챙겨 입기 전에 테이블에 놓인 식수로 먼저 목을 축인다.

그리고 물컵을 쥔 채 창가로 다가가서 창밖 풍경이 훤히 드러나도록 커튼을 젖혀 버린다. 일순 실내를 가득 채우는 해일 같은 눈부심에도 그는 눈 한 번 깜짝하는 법이 없었다.

그 앞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내며 온몸의 근육을 천천히 맞춰 본다. 한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고,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기도 한다. 양 손바닥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가 반복하기도, 그러다 문득 몸을 돌려 느릿한 걸음으로 집 안을 누비기 시작한다.

아침 세안을 하고, 셔츠에 머리를 꿰면서 괜히 한 번 더 창밖을 흘긋거린다.

이따가 소나기가 내릴는지, 어쩌면 내내 맑을는지 구름을 가늠해 볼까 했다.

오늘 날씨는…….

“슬슬 오겠군.”

별안간 그의 잇새로 오늘의 첫마디가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거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군가 이 아침부터 체통도 잊고 그의 처소로 말을 달리고 있는지. 그런 무식한 이라면 당연히 노크 같은 예의를 차릴 리 없었다.

쾅!

거칠게 젖혀진 문짝이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벽으로 돌진했다. 문밖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라피난이었다. 그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레이에게 직행해 망설임 없이 멱살을 낚아챘다.

“왜 그랬나.”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듣기 싫다. 평정심을 잃은 녹색 눈동자는 그답지 않게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급기야 이레이의 멱살을 쥔 손끝마저 파르르 떤다.

이레이는 그런 라피난의 손을 흘긋 내려다보고는 천천히 팔을 올려 그를 떼어 냈다. 그리고 무감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그랬지?”

“카일 가문의 장자인 내가 어째서 온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폐하의 신랑감 후보에조차 들지 않았느냐 묻는 거라면, 당연히 내가 너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레이.”

기다렸다는 듯 라피난이 대답했다. 애석하게도 이레이의 마음에는 썩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내 친구가 내가 없는 사이에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지 도통 모르겠군.”

“그럼 나더러 조국을 배신하라는 건가? 친구 때문에? 꿈같은 소리 마라. 너는 나라가 없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본데 내게는 뿌리가 있다. 이 제국 백성이 몇 명인지는 아나? 폐하의 어깨에 무엇이 짊어져 있는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느냔 말이다.”

“없어.”

이레이도 라피난 앞에서 솔직해짐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애 어깨에 올라가 있는 염치없는 것들을 모조리 세상에서 지워 버릴 생각은 있다.”

“그래서 덴체를 죽였다고!”

어느덧 라피난의 고함은 비난이 아닌 증오에 가까웠다. 귀청 깊숙이 들러붙는 진득한 원망이 그들이 결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고 역설하는 듯했다.

“그게 뭐.”

불시 허공을 가른 이레이의 손이 라피난의 목을 움켜쥐었다. 콱! 목젖을 짓누르곤 단숨에 벽장까지 밀어붙인다.

쿵!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벽장의 물건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책, 촛대, 모래시계, 단검, 훈장. 하나같이 가치 없는 것들뿐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약해 빠진 꼬맹이 한 명의 목숨이 지금껏 너희들이 내게 죽여 달라 청한 수십 수백 명보다 더 중했다는 건가?”

차가운 이레이의 목소리가 신랄하게 방 안을 울렸다.

“이 세상에 귀한 목숨과 하찮은 목숨이 엄연하다느니 같잖은 가르침을 주고 싶은 거라면 집어치워라. 너희들 논리대로라면 나는 이 세상에 너와 그 애만을 살려 두고 다른 목숨은 전부 거둬 가야 마땅할 테니.”

라피난의 목을 조르는 그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가로막힌 맥박이 손바닥 바로 아래에서 펄떡거린다. 라피난은 얼굴만 잔뜩 이지러뜨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듯 창백해진 그를 보면서도 이레이는 태연하기만 했다.

“친구……. 그래, 우리는 친구지.”

“크윽…….”

“명심해라. 내가 지금 너를 죽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뿐인 친구가 알량한 우정을 빌미로 나를 농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고는 저 할 말을 다 끝냈는지 미련 없이 손을 놓아 버린다. 탁, 이레이의 손이 매몰차게 떨어져 나간 즉시 라피난의 몸이 허물어졌다.

“허억……!”

비틀거리며 무릎을 짚은 그가 새된 들숨을 헐떡였다. 졸도 직전까지 창백해졌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온다. 이내 그는 굽혔던 몸을 바로 세우고 바짝 충혈된 눈으로 이레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말한다.

“넌 역시 나와 반대군. 난 친구라도 죽여야 한다면 죽여.”

“젠장, 그래서 네가 친구가 없다고는 생각 안 해 봤나?”

“누가 할 소릴.”

“맞아. 너나 나나 피차일반인 거 다 아는데 무슨.”

피식 웃은 이레이가 바닥에 널브러진 단검 한 자루를 주워 들었다. 조금 전의 소동으로 벽장에서 떨어진 물건 중에 하나였다.

그는 검날을 이리저리 기울여 빛에 반사해 보다가, 찰나 방향을 틀어 라피난을 겨냥해 던졌다. 휙! 날카로운 쇠붙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다. 그러나 더욱 빠르게 움직인 무언가에 부딪혀 궤도를 달리하고 말았다.

챙!

두 개의 검날이 쓸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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