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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8화 (8/104)

8화

“아마도 신께서는 신성제국 미케나의 황태자를 몹시 사랑하는 모양이다.”

“뭐라?”

“네가 요절하기 전에 나를 만나게 해 준 걸 보면, 너는 신의 은총을 받는 게 분명해.”

단호한 그의 속삭임에 해시트는 한동안 침묵할 따름이었다. 한참 후에야 짧은 탄성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하!”

그 눈빛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레이 린 경에겐 생소한 경험이었을 터다. 박박 이를 가는 표정? 지독한 실망감에 젖었다? 그런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떨어지라고 악을 쓸 땐 언제고, 기껏 떨어져 나가 준 이레이에게 스스로 가까이 다가가는 여자의 얼굴엔 환멸을 넘어선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

“세상에 신이 있다면 나를 여자로 태어나게 했을 리 없어.”

이 순간에조차 우아하게 달싹이는 입술이 침을 뱉는 듯 보였다면 가장 적당할까? 짧은 순간이지만 그 이레이조차 할 말을 잊어버린 듯했다.

해시트가 말했다.

“명심해. 내가 제위에 오르려는 이유는 신의 뜻 같은 게 아니다. 이 몸 스스로의 의지이며 제국의 미래가 될 것이야.”

그 말에 마침내 이레이도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맞아…….”

슬그머니 팔을 들어 올린 그가 손등으로 해시트의 뺨을 쓸어내렸다. 사르르 흐르는 감촉을 따라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경련했다.

“네 말대로……, 신이 있다면, 우리가 이러고 있을 리 없지.”

역시 널 따라오길 잘했어.

그러고 보면 그날,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 해시트의 귓가로 울려 퍼진 것 같기도 하다.

*

라피난이 가져온 혼례복을 미리 입어 보던 중에 해시트는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불현듯 옆구리를 더듬어 간 손이 살점을 주욱 늘려 본다.

“이 흉터가 언제부터…….”

삼 년 전만 해도 선명하던 옆구리의 흉터가 어느덧 희미해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명치께에 난 꿰맨 자국과 비교하면 그 변화가 더욱 도드라졌다.

그러니까, 앞엣것은 열한 살에 자객의 칼을 맞아 생긴 것이고 뒤엣것은 삼 년 전의 전쟁터에서 활에 스쳤다가 이레이에게 치료받은 흉터다. 앞엣것이 훨씬 더 오래되기야 했지만, 본디 관통상과 자상의 차이가 명확해 마땅했다.

고작 열한 살에 죽을 뻔하며 얻은 생의 증거인 것을.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치명상이었던 터라 처절하도록 선명했고 매일매일 몸을 씻을 때마다 과거의 각오를 되새김질하곤 했다. 한데 어째서 잊고 있었는지……. 그리고 잊어버린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희미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자연히 해시트의 기억은 그날, 흉터 위를 움켜쥐던 남자의 강인한 손길을 떠올리게 되었다.

“매사 이런 치명상을 달고…….”

그때였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폐하.”

커튼 밖에 대기하고 있던 라피난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감히 성별이 다른 신하가 황제의 옷 갈아입는 모습을 그림자로나마 지켜보고 있었다니 딱 능지처참감이나,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이래 온 사이에 이제 와 선을 긋기도 참 무의미했다. 어차피 해시트는 이미 황제가 되어 버렸으므로. 대신들이 제아무리 그녀에게 읍소한들 무시하면 그만인 것이다.

해시트는 라피난에게 ‘사라진 흉터’에 대해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오늘 이레이를 만났다지?”

그러잖아도 이레이에 관련해 논할 문제가 많거늘 굳이 자질구레한 안건까지 더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잠시 후 거추장스러운 혼례복 시착을 끝내고 비교적 편안한 평상복 차림으로 돌아온 해시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류 더미에 파묻힌 채 라피난의 보고를 들었다.

“우려한 것보다는 유순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래?”

“예. 덴체 님 앞에서 경어까지 써 가며 예를 갖추더군요. 화를 참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요.”

“정말인가? 혹시 짐을 안심시키려고 에두르는 거라면…… 으음, 물론 네가 그럴 리는 없지만…….”

“잘 아시는군요.”

“그래도 찜찜하단 말이야.”

해시트의 얼굴이 불신으로 가득 찼다.

이레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차, 저녁 늦게 라피난이 가져온 새 소식은 가히 희소식이라 할 만했으나 근심을 지워 낼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집무실로 쳐들어올 줄 알았더니.”

“어쩌면 폐하께 그 정도로 진지한 마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요.”

라피난이 넌지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이윽고 수긍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

“그래도 예의 주시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잖아.”

“알겠습니다.”

혼례가 당장 내일모레다. 고작 백인 소대의 대장 때문에 미룰 수도, 미룰 마음도 없었다.

이레이가 덴체에게 경어를 사용했다는 라피난의 증언이 도무지 안 믿기긴 했지만―행여 선황 앞에서도 반말을 지껄일까 봐 행사 때마다 황태자궁에 가둬 놓고 바깥은 얼씬도 못 하게 했던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남은 이틀 동안 결혼식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혹시 너무 화가 나서 미친 건 아닐까?

“원래 미쳐 있던 놈이니 한 번 더 미치면 정상이 되는 게 이론상 맞기는 하다만…….”

그런 의심이나 하면서, 해시트는 밤늦도록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 불면의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센 빗소리가 창문을 때려 그녀를 더더욱 잠 못 들게 했다. 오늘 밤엔 그치지 않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깊은 밤, 해시트의 침소에 찾아와 이불에 무릎을 괴는 사내의 성질머리처럼.

“웬 놈이……, 으읍!”

인기척을 느낀 해시트가 화들짝 상체를 일으킴과 동시에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체온이라는 표현이 무색하도록 차가운 손이었다.

그다.

쉿, 이레이가 검지로 제 입술을 가로지르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소리 지르지 마. 경비병들 죽이면 화낼 거잖아.”

사근사근하여 다정한 말투였다. 그렇다고 해서 해시트의 눈에 어린 노기가 가시는 일은 없었지만, 억지로나마 화를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여 주자 이레이가 씩 웃으며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해시트는 곧장 숨죽인 분노를 터뜨렸다.

“미쳤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몰래……!”

제아무리 황제가 아끼는 충신이라 할지라도 남들 몰래 침소에 기어드는 모습이 목격되기라도 하는 날엔 본보기로 참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치를 떠는 해시트를 지켜보던 이레이가 문득 딴소리를 꺼냈다.

“여전히 깊이 못 자는군. 왜지?”

“뭐?”

이 망할 새끼가, 적반하장을 부려도 분수가 있다. 곤히 잠에 들려던 사람 침실에 쳐들어와서 깨운 놈이 누군지 벌써 까맣게 잊었나 보다.

분노에 이어 황당함까지 뒤집어쓰게 된 해시트가 매섭게 인상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이레이는 여전히 얄미울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독촉했다.

“왜 못 자냐고 물었다. 소원대로 황제가 됐잖아? 이제 누구도 널 해치지 못할 텐데, 어째서.”

그러면서 해시트의 얼굴을 훑어보는 눈빛이 목소리와는 달리 묘한 혼란에 젖어 있었다.

“웬만하면 편히 자라. 그러라고 일곱 번의 전쟁을 거쳐 네가 황제가 되도록 도운 거다.”

저 눈빛이 손길이었다면 거침없이 밀어 냈을 텐데, 해시트는 속수무책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 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

별수 없이 기세가 꺾였다. 켕기는 구석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말소리도 자꾸만 작아지는 중이다. 혹여 침실 밖을 지키고 있을 경비병들이 들으면 어쩌나 걱정됐다.

이레이는 그런 해시트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이, 일순간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목덜미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그의 손끝이 턱을 지나 입술을 간질이다가 뺨에 닿은 뒤엔 가만히 감싸 쥐었다. 속삭임은 그다음이었다.

“복수하러.”

해시트는 당장에 그의 팔을 걷어 냈다.

“가당치도 않다. 짐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설마.”

그가 조소했다. 그가 절대 그럴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굳이 물어보는 해시트에게 괘씸함을 느끼기라도 하는지.

다행히 이레이 린은, 그런 여자를 바로 앞에 두고 되지도 않는 오기를 부릴 만큼 멍청한 남자는 아니었다. 사실 몸 쓰는 게 워낙 쓸 만해서 그렇지 머리 쓰는 게 아주 못 봐줄 수준도 아니었고, 오히려 못된 쪽으로는 라피난보다 더 머리가 잘 돌아갈 때도 많았다. 그는 나쁜 짓을 할 때면 살며시 눈가를 휘어 웃곤 한다.

지금처럼.

“받아.”

툭, 해시트의 무릎 앞으로 둥그런 자루 하나가 떨어졌다. 어둠 속에 선득한 미소가 이지러진다.

“네가 바란 죄인의 목이다. 눈알은 뽑아서 늑대 밥으로 줬어.”

흰 침대보에 움푹 주름이 파였다. 그제야 밀려드는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린 해시트가 둥근 자루와 이레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걸 꼭 이 밤중에 가져와야 했나?”

“그래야 네가 싫어할 테니까.”

“뭐?”

“복수.”

겨우 이따위 게 복수라니, 되물을 새 없었다.

“사실은 무서워하잖아. 이런 거.”

“…….”

“피 냄새도, 시체도.”

말문이 막힌 해시트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레이는 더욱 흥이 나서 떠들어 댔다.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같이 안 자 줄 거야. 적어도 오늘 밤엔.”

그래서 겨우 그따위 게 복수라는 것이다. 해시트는 울컥 치민 감정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앙다문 채 이불을 걷어 냈다.

그 겸사겸사 자루를 덮어 버렸지만, 어쩐지 이불로 뒤덮인 뒤에도 진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녀의 착각이었다. 벌써 열흘도 전에 목이 베인 시체에 핏물일랑 벌써 죄 말라붙었으리라.

“바란 적도 없다.”

“어련하시겠어.”

“빨리 가 버려. 미적거리다 경비병에게 들키면 죽여 버린다.”

“허세는 집안 내력인가? 아비가 이미 죽었으니 확인할 길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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