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레이의 얼굴이 삽시간에 뭐 씹은 표정으로 돌변했다. 꾸욱, 엄지와 검지를 벌려 관자놀이를 짚더니 짓씹듯 덧붙였다.
“젠장. 그래서 치료받을 거야, 말 거야?”
저 성격에 이쯤이면 최대한 양보했음을 안다. 이랬는데도 해시트가 계속 치료받지 않겠다고 버텼다간 강제로 옷이 벗겨져 치료 당할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그녀의 환부를 직접 확인하고 말리라는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도리 없다.
“라피난. 넌 나가 있어.”
“……예.”
마뜩잖은 표정의 라피난을 막사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이레이가 보는 앞에서 갑옷을 하나씩 끌러 냈다.
단단한 갑주를 모두 풀어내고 마지막 셔츠 한 장을 옆으로 젖히는 동안, 해시트는 혹시라도 이레이가 예의 그 노골적인 눈빛으로 그녀의 육체를 훑어볼까 봐 내심 긴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뻣뻣한 천으로 압박한 흉곽이 훤히 드러날 때까지도 이레이는 별말이 없었다. 다만 핏물로 물든 명치 아래쪽을 확인하고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을 뿐이다.
“생각보다 심하군.”
평소에 사람의 목숨을 파리보다 쉽게 죽이는 작자가 빨간 얼룩깨나 봤기로서니 심각해질 일은 아니지 싶었으나…….
“그나마 가슴을 천으로 압박해 둬서 출혈이 이 정도인가? 다행이야.”
묘하게 무생물을 앞에 둔 사람처럼 진찰하는 이레이를 보자, 해시트도 그를 의원으로 대해 줄 생각이 손톱만큼은 들었다.
“의원 생활은 몇 년이나 했나?”
“경험은 충분하니 걱정하지 마. 아, 내가 개인적으로 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원래 갑옷 입을 때도 가슴을 이렇게 꽁꽁 싸매나? 이런 거 두르나 마나 별로 티도 안 날 것 같은데 뭘 그렇게까지.”
“죽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 봐.”
아무튼 판단을 재고해 볼까 하면 다시 그 판단을 재고하게 만드는 놈이다. 환멸 어린 해시트의 눈빛을 다 보아 놓고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죽으면, 저 밖에 머리가 하얗게 센 애늙은이 근위대장에게 의원 공부를 시키게?”
“라피난은 백발이 아니고 금발…….”
“그만 떠들고 눕기나 해. 보는 내가 다 아프군.”
“…….”
해시트의 말문이 막히게끔 쏘아붙인 그가 금세 불에 소독한 바늘과 각종 약초를 챙겨 침대로 다가왔다.
“천천히 누워. 이렇게 팔을 짚고.”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그의 설명대로 침대에 드러눕다 말고 문득 해시트가 물었다. 이레이는 그녀의 환부를 파고든 천 조각을 떼어 내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어떻게?”
“그냥 알았어. 그래서 널 따라온 거고.”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여자라서 널 따라왔다고. 못 알아듣겠나? 그럼 너처럼 생긴 애가 남자라고 우기고 다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니 네 나라 백성 눈깔은 모두 해태인 게 틀림없어, 라고 해 두지.”
“……그…….”
“경고하는데, 괜한 말로 받아쳤다가 본전도 못 찾느니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그러마.”
해시트는 냉큼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해태’가 뭐지? 뒤늦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제 와 입을 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사이 이레이의 시선은 오직 해시트의 상처에 고정된 채였다. 연거푸 피를 닦아 낸 그가 능숙한 손길로 바늘을 고쳐 잡더니 말했다.
“아프면 욕해.”
그리고 짧은 간격을 두고 덧붙였다.
“그래도 때리진 마라. 봉합 비틀어지면 흉터 남아.”
해시트가 코웃음을 쳤다.
“상관없다. 흉터 따위.”
“뭐야. 그래서 때리겠다는 건가? 싫거든. 맞으면 나도 아파.”
“……그럼 진통제라도 주든지.”
다행히 상자 안에 알맞은 약재가 들어 있었나 보다. 이레이가 말없이 건네준 말린 나무껍질 몇 조각을 입에 넣고 기계처럼 씹고 있으려니, 금세 날카로운 바늘이 살갗을 꿰는 통증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늘 이런 식이었나?”
질긴 실이 상처를 얽고 있었다. 해시트는 고통을 견뎌 내기 위해 발가락에 잔뜩 힘을 줘야 했다.
“뭐가.”
“기껏 황족으로 태어나 놓고 다칠 때마다 제대로 치료 한번 못 받는 일.”
“내가 황족인 걸 알면서도 자나 깨나 반말뿐인 놈이 할 말이냐.”
“아, 혹시 나한테 죽고 싶나? 내가 예를 갖추는 건 곧 내 손에 죽을 포로 앞에서 뿐인데.”
“죽여 버린다.”
“말본새하고는.”
“누가 할 소리를…….”
“알겠어. 나중에 네가 황제가 되거든 그때부턴 제대로 모셔 줄게.”
“……정말인가?”
감히 황족에게 그따위 거짓말을 씨불일 종자가 어디 있겠나. 해시트는 눈앞의 남자를 만나기 전까진 그렇게 믿고 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밤에 침실 한정해서.”
“진짜 죽…… 아! 제기랄! 네놈의 그런 시답잖은 농담엔 이제 화내는 것도 귀찮아.”
“잘했어. 아프면 계속 그렇게 욕을 해.”
“이 새끼 순 변태 아니야?”
상스러운 욕설이 울려 퍼진 순간 그녀의 배 위에서 낮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 처음 듣는 평간데.”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정말이야. 아마 네가 날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지.”
“…….”
“흠.”
그는 손이 매우 빠른 편이었다.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벌써 여덟 바늘을 꿰매고 바늘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내 시답잖은 농담이 머잖아 잔소리로 변하기 전에 본인 옥체부터 챙기시지, 황태자 전하. 온몸에 흉터가 아주 장관이네. 저기 옆구리에 칼빵은 누가 놓은 거지?”
흘긋, 이레이가 해시트의 한쪽 옆구리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네놈이 알아서 뭐 하게.”
“뭘 물어. 가서 사지를 찢고 늑대 밥으로 던져 줘야지.”
“이미 죽여 놓았으니 주제넘는 소리는 집어치워라.”
“오, 네가 직접 죽였나?”
그의 눈자위가 가늘어졌다. 의도가 빤한 질문이라 불쾌했지만 해시트는 굳이 거짓말로 회피하진 않았다.
“라피난이.”
그러자 알 만하다는 듯,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허공에 흩어졌다. 이윽고 꿰맨 상처 위에 약초와 붕대를 감아 주면서 이레이가 말했다.
“둘이 아주 오래됐는걸. 저 흉터 언뜻 봐도 몇 년은 되어 보이는데 말이야. 오 년? 아니면 육 년? 그때부터 주군을 위해 살생까지 마다치 않았다니 그 녀석도 참 대단한 충신이군. 혹시 그 녀석이 널 연모하는 건 아닐까?”
“입조심 해.”
탁, 해시트가 매섭게 그를 뿌리쳤다.
“이 몸의 아량에도 한계가 있다. 네 무례를 참아 주는 이유는 단지 네가 쓸모 있기 때문이야. 그 이상으로 건방지게 굴지는 마라.”
그녀는 남은 붕대의 끄트머리를 제 손으로 직접 마무리 짓고는 재빠르게 상체를 일으켜 셔츠를 여몄다.
이레이는 저를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저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의 안위가 걱정된 나머지.”
“…….”
“하지만 당사자께서 기분이 나빴다니 사과드리지. 미안하다. 그리고 내가 입에 넣어 준 그건 이제 뱉는 게 좋겠어. 삼키면 안 되는 약재라서.”
손과 혀에 기름칠이라도 했는지 유독 매끄럽게 굴면서 그녀에게 깨끗한 손수건을 내민다. 사과라기엔 그저 어르고 달래는 행위에 불과했다. 어린애 취급을 받는 기분이다.
해시트는 그가 내민 손수건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채서 나무껍질을 뱉어 내고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홱 그를 돌아보고 외쳤다.
“누가 너한테 걱정해 달라고 하던? 그런 관심도 허락한 적 없다.”
“그럼 라피난에겐 허락했나?”
“그것도 틀렸어. 그 녀석이 나에게 바치는 건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 따위가 아니다. 대의를 위한 희생과 신뢰, 단지 그뿐!”
“그렇다면 그 녀석은 직무태만이로군.”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이레이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또 허락도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었고 억지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조금 전 꿰맨 상처가 덧나지 않으려면 잠자코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런 해시트를 내려다보는 이레이의 표정에는 별안간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 딴에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골라내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해시트는 새삼 기함할 테지.
그야 당신 예쁜 얼굴에 가득 담긴 심통이 너무 깜찍해서 목을 비틀어 버릴 뻔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과연 심통이니 성장통이니, 그런 불경한 단어를 입 밖에 내었다간 필시 앞으로 어디서 칼을 맞고 와도 그에겐 비밀로 할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이레이 린 경이 황태자 해시트의 옆구리에 남은 흉터를 단단히 움켜쥐고서 실제로 꺼낸 말은 상당히 점잖은 편에 속했다.
“매사 이런 치명상을 달고, 심지어 제때 치료도 못 받으며 살다간 대의고 뭐고 소박한 꿈조차 이루기 전에 요절할 거다. 솔직히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신기할 지경이야.”
“닥쳐.”
“너와 라피난이 동시에 죽어 버리면 넌 가장 치욕적인 형태의 장례를 맞이하게 되겠지. 그런 각오도 되어 있나? 그래?”
그를 노려보는 해시트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아무렴!”
단지 분노뿐이었다면 그토록 억울함에 차 토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고 있잖아. 너 같은 불량배에게까지 권세를 약속해 가면서!”
어느덧 그녀는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이레이의 팔을 떨쳐 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이레이가 까딱 눈썹을 들썩이더니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에게서 한 발 떨어져 주었다. 벌어지는 두 사람 사이로, 그의 시선이 해시트의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랐다.
“그거 아나? 해스.”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어떤 절대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