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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6화 (6/104)

6화

“사기를 북돋기 위해선 가끔 말도 안 되는 무용담이 필요하니까.”

“그럼 나한테 작작 날뛰라고 잔소리하지나 말든가. 왜? 개중에 절반은 내가 죽인 거라고 각주까지 달지 그랬나.”

“그건…… 아마 병사들이 본인 활약상을 부풀리느라 네 몫을 좀 줄인 듯한데.”

“그럴 리가. 내 대원 중에 그딴 허영심을 가진 놈이 있을 리 없어.”

“없을 리가. 네 앞에서 알량한 허영을 부렸다간 목이 날아갈 게 뻔하니 참고 있었을 거다.”

“뭐? 내가 내 대원 목을 왜 잘라?”

“글쎄. 녀석들이 보기엔 참수가 아사 혹은 동사와 비슷해 보였나 보지.”

“그건 내가 죽인 게 아니고 놈들이 알아서 죽은 거야.”

화제가 화제인지라, 잠시 상황도 잊은 채 속닥거리고 말았다. 또 말싸움 직전까지 치닫는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 낸 것은 아니나 다를까 덴체였다.

정확히는 이레이에게 불쑥 악수를 권한 그의 오른손이다.

“이레이 대장, 그대 같은 이가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곧 폐하의 동반자가 될 몸으로서 아주 든든합니다.”

“…….”

이레이는 덴체의 손을 마주 잡는 대신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저 빤히 바라보는 사이에 또랑또랑한 말소리가 계속되었다.

“이틀 뒤 저와 폐하의 결혼식이 치러지면, 그대와 자주 만날 수 있겠지요? 기대되는군요.”

“……결혼.”

기어코 문제의 단어가 그의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이레이의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라피난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덴체의 어깨를 감싸 반대편으로 돌려세웠다.

“덴체 님. 이제 그만 거처로…….”

“아니지, 라피난. 나는 아직 폐하의 예비 신랑에게 인사도 못 올렸는데.”

불시 이레이가 라피난을 나무랐다.

반듯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어쩐 일인지 정중하다고 생각했을 때, 이레이는 아예 덴체의 손을 붙잡더니 스르륵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태 악수조차 받아 주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공손해지다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저도 기대됩니다, 덴체 님. 이틀 뒤의 그날이요.”

그에 덴체도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이레이 린 대장은 황제 폐하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예를 갖추지 않는다 들었는데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원래 소문이란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그리고 덴체의 손을 놓아 주는 이레이의 행동에는 정말로 이상한 점이라곤 전무했다. 늘상 그래 왔다는 듯이 익숙한 몸짓으로, 다시금 꾸벅 고개를 조아린 뒤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라피난과 덴체를 배웅할 뿐. 그런데도 라피난의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을 뿐이다.

“그럼, 또 뵙지요.”

“덴체 님. 이제 정말 가셔야 합니다.”

질세라 라피난이 독촉했다. 덴체는 여간 아쉬운 게 아닌지 좀체 이레이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알겠소. 재상께서 오늘따라 급하게도 구시는군.”

하여 우여곡절 끝에 두 남자가 이레이 린 대장으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낮은 음성이 속삭이는 환청처럼 울려 퍼진 것은.

“예. 어서 떠나시지요. 귀하신 몸에 피 냄새가 배기 전에.”

“…….”

그 목소리에 넘실대는 서슬을 느끼고 곧장 뒤를 돌아본 이는 당연하게도 라피난 혼자였다. 그래 봤자 이미 이레이는 피 냄새 물씬 풍기는 자루를 흔들며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저 남자가 향하는 방향에는 황제궁이 아닌 군 숙소, 다시 말해 이레이 린 본인의 처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바칠 죄인의 목이 썩기 전에 바삐 성으로 들어온 이가 찾을 곳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라피난은 의구심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별수 없었다. 지금은 해시트가 진상받을 죄인의 모가지 따위보다, 순진한 리히티 가의 도련님을 저 잔악한 용병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것이 훨씬 더 급선무였으므로.

서로를 등지고 걷는 세 남자의 머리 위로, 쾌청하던 하늘에 때 아닌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

언제부터인가 이레이 린은 혼자 있을 때마다 해시트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운물처럼 밀려들어 모래알처럼 파묻히는 기분이 싫지 않아 마냥 내버려 둔 결과였다.

시 때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희미한 미소. 웃음을 숨기는 방법을 웃는 방법보다 먼저 배운 여자의 미소는, 그의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욕망을 찾아내서 껍질을 긁어내곤 했다.

그 생경한 감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번뜩 놀랐다가, 종국엔 그 새삼스러움마저 즐거워졌을 즈음에 그는 결심했다.

“도와줄게. 네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그때 이미 조급했었나.

사막의 모래바람에 나부끼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처럼 반짝이기에. 그러면서 동그란 입술로 톡 쏘아 내는 목소리가 그를 조금도 신뢰하지 않기에.

“네 녀석이 왜?”

“음……. 사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엄청난 장수 체질이거든.”

“뭐라?”

“그래서 노년에 떠들고 다닐 추억 좀 미리 만들어 둘까 하는데. 저 바다 건너 이국의 무희 뺨치게 아름다우신 우리 황태자 전하의 고견은 어떠하신지 궁금하군.”

“추억의 끝에 참수형을 놓아 줄 수는 있다.”

아무튼 간에 황족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참수형을 좋아한다.

이레이는 미케나 황가의 여자와 함께한 지난 삼 년을 돌이켜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료한 동시에 즐거운 나날들이 차근차근 쌓여 가는 동안 저도 모르는 새 깨닫고 말았다.

애당초 재미있어서 곁을 맴돌던 것이 어느새 곁을 맴돌기 위해 재미없는 일까지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산적 토벌 같은 일 말이다.

그를 사지로 내몰아 두고 그 여자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고서 마냥 빨리 돌아오려 애를 썼다.

눈을 감은 이레이의 입가에 돌연 얕은 실소가 흩어졌다.

“뭐, 단순히 겁이 없어서 홀린 것만은 아니야…….”

그리고 눈을 뜨자, 겨울 아침의 바닷물을 얼려 놓은 듯 새파란 눈동자가 물기도 없이 반짝였다.

창밖에는 오후부터 쏟아지던 장대비가 저녁까지 그치질 않는데,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방 안엔 서느런 달빛이 빗물을 헤치고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붉은 카펫을 비춘 달빛이 이레이의 파란 눈동자를 또다시 어떤 여자의 미소로 데려가 버린다.

맹랑하고 겁 없는, 아니, 그마저도 사실은 같잖은 위악을 뒤집어썼을 뿐 실제로는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일쑤인 인간. 너무나 유약하고 아름다워서 언제 명을 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싶었다. 처음부터.

“…….”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방문을 향해 돌아설 적엔, 또다시 그 여자의 생각에 잠겨 미소 띤 그의 얼굴을 달빛만이 끈질기게 비춰 주었다.

*

“해스.”

삼 년 전.

한차례 거칠었던 전투 후 황태자 해시트의 막사에 모여 참모 회의를 나누던 중이었다.

황태자의 참모라고 해 봐야 그때나 지금이나 라피난과 이레이 린 경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용병을 고귀한 황태자께서 가까이 둠에 모두가 의아해했더랬다.

“너한테서 피 냄새 나는데. 혹시 조금 전 전투에서 다쳤나?”

이레이의 질문은 갑작스레 튀어나왔으나 다행히 해시트는 당황하지 않고 지도나 마저 펼칠 따름이었다.

“내 피 아니야.”

“네 피 맞아.”

“…….”

“옆구리인가? 아니, 좀 더 위쪽이군. 명치? 많이 아팠겠어.”

이레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것도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부상 위치까지 정확하게 맞혀 버리기에, 해시트와 라피난은 잠시 눈빛만 주고받으며 침묵해야 했다.

다시 이레이가 말했다.

“의원을 불러와야겠군.”

“안 된다.”

더럭 정색하고 나선 이는 라피난이었다. 아마 이레이는 그런 반응을 기다린 듯했다. 곧장 흥미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왜. 우리 황태자 전하의 갑옷 속에 내가 보면 안 될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

가볍게 빈정거리면서, 그러나 노골적으로 해시트의 가슴께를 훑어보는 시선이 마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노라 으스대고 있었다. 이레이에겐 어지간해선 흥분하지 않는 라피난도 일단 미간부터 좁히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네놈은 도대체 적당히라는 걸…….”

“됐다, 라피난.”

해시트가 한쪽 팔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러자 우뚝 입술을 닫고 이레이를 노려보는 라피난을 넌지시 바라본 끝에, 해시트는 지도를 도로 돌돌 말아서 죽통에 밀어 넣었다.

“둘 다 나가. 처치는 내가 알아서 하마.”

“내가 치료해 줄까? 나도 한때는 잘나가는 의사였거든.”

시큰둥한 목소리가 막사에 울려 퍼졌다. 하필 너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해시트와 라피난 모두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흰소리 그만하고 조속히 꺼지도록.”

“너는 정말 적당히를 모르는군.”

한쪽 입술을 빼뚜름하게 올리고 단단히 면박을 주었는데, 왜인지 돌아온 이레이의 반응은 민망할 정도로 담담했다.

“음? 내가 말 안 했었나? 직업은 용병이지만 가업은 의사라고. 우리 아버지 닦달이 워낙 심하셔서 일찍이 가업을 이어받았었지. 그러다 회까닥 가출해서 용병이 되었지만 말이야. 뭐, 그런 것을 보면 뭐든 적당히 하라는 네 말도 일리가 있군, 라피난.”

까딱, 이레이가 턱 끝으로 라피난을 가리켜 동의를 구했다.

천연덕스럽게 과거사를 늘어놓는 와중엔 실제로 면허증 비슷하게 보이는 웬 나무패를 꺼내 보이기도 했다. 뭐라 뭐라 글귀가 새겨져 있긴 했지만 처음 보는 외국어라 제대로 검증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당황한 나머지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을 못 한 게 사실이다.

해시트는 모처럼 말을 더듬었다.

“노, 놀랍군…….”

“그래, 해스. 내가 네 생각보다 꽤 대단한 인재,”

“저 망나니에게 가족이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

“……놀라는 요지가 그쪽이라면, 그래. 심지어 꽤 화목했단다. 우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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