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여전히 라피난과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녀는 빠르게 뒤를 돌아 창가로 걸어갔다. 거친 손길로 커튼을 걷어 내자마자 감당하기 힘든 밝은 빛이 방 안으로 빗발쳐 들어왔다.
탁 트인 정원이 끝없는 녹색을 자랑하며 봄의 뙤약볕과 씨름하고 있었다. 꿋꿋이 침묵하는 해시트와 마냥 기다리는 라피난도 다를 바 없었다. 해시트는 그가 답을 얻기 전엔 이 방을 나서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눈을 감는다.
“잊었나? 나는 황제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곧장 어떤 핑계도 섞이지 않은 사죄가 뒤따라왔다. 고개를 조아리는 그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치자, 해시트는 참지 못하고 울컥 사족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죄송합니다.”
“넌 대체…….”
말문이 막힌 해시트의 뒷모습에 대고 라피난이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더 화를 내 봤자 괜한 분풀이에 불과할 터다. 해시트는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짓누르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슬슬 헤라꽃이 필 철이지?”
“예.”
“가서 전해라. 올해는 그 꽃을 더욱 정성껏 말려서 황제궁에 바치라고. 뿌리와 나뭇잎, 꽃잎까지 전부 거둬들여 보관하게 해. 신임 재상 때문에 관료들이 과로사할 지경이니 미리 피로 회복제라도 만들어 두어야지 안 되겠군.”
“직접 감독하겠습니다.”
“나가 봐.”
별수 없다. 미우나 고우나 그녀에게 믿을 건 라피난밖에 없었다.
머잖아 그녀가 혼인하고 나면 정말로 그렇게 될 예정이다.
이레이가 떠나는 건 그만큼 시간문제였다. 굳이 따지자면 단지 이레이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으나…… 왜인지 그 생각을 하면 심장이 나락까지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곤란했다.
하지만 글쎄, 어쩌면 아주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같은 것.
다시 홀로 남은 방 안에서, 해시트는 커튼으로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가렸다. 툭 떨어져 흔들리는 천 자락이 결국엔 미봉책에 그칠지라도 지금은 그럭저럭 쓸 만했다.
“……그게 벌써 삼 년이나 됐나.”
삼 년 전, 이레이와 처음 만났던 그날에도 그녀의 심장은 그토록 빠르게 달음박질쳤더랬다.
“지금 너를 죽일지, 나중에 네 백성들을 죽일지 고민 중이야.”
오직 공포 때문이었다.
*
세이레 뒤.
예정보다 열흘이나 일찍 돌아온 이레이 린 대장은 성 문지기 앞에서 삐뚜름하니 눈썹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불만 가득한 목소리다.
“지금 저 안에서 누구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고?”
아니, 불만을 넘어서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가 만발이었다. 졸지에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문지기는 지은 죄도 없이 쪼그라들어만 갔다.
“황제 폐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왜, 왜 그러십니까? 이레이 대장님.”
“이런, 겁도 없이.”
피식, 딱딱하던 이레이의 얼굴에 불현듯 실소가 퍼져 나갔다. 그마저도 유쾌함보다는 선득함에 가까워 문지기의 어깨는 점점 더 움츠러들 따름이었다. 어쩐지 주변 공기가 싸늘해진 기분이 드는 와중에, 눈앞에 선 남자의 눈초리는 겪어 본 적도 없는 지옥 불을 연상하게끔 매서웠다.
문지기가 와락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다! 저 보기보다 겁 많습니다!”
“너 말고.”
그러나 이레이의 반응은 담박하기 짝이 없었다. 팽개친 자존심이 민망하다. 문지기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예? 그, 그럼…….”
“흠.”
이제는 아예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새 문지기의 존재 따위야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 버렸다는 듯이, 별안간 그는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곰곰이 자신의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축복이 곱씹을수록 아쉬워,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었던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부랴부랴 수도로 달려온 참이었다. 소대원들의 귀경길은 쥰에게 맡기고 냅다 튀어 버린 수준이라 어느 정도 잔소리는 감수할 생각이었지만, 설마 이런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차피 딸린 군식구가 없었다면 혼자서는 닷새면 오갔을 거리, 그래도 명분 하나쯤은 만들기 위해 산 채로 잘라 낸 산적 우두머리의 모가지를 옆구리에 살뜰하게 끼고 돌아왔거늘.
‘여기에 벌레가 들끓기 전에 바치려고 급히 달려왔지.’
그런 핑계를 대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한 성문 너머에선 해시트의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과연 겁이 없다는 말 외에는 적당한 표현이 없었다.
이레이가 중얼거렸다.
“뭐……. 겁이 없어서 홀리긴 했지. 비켜라, 들어가게.”
백날 천날 고민해 봤자 당사자에게 직접 따져 묻느니만 못할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지기의 어깨를 밀치고 성문을 넘었다.
성 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짐을 짊어지고 쏘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느 귀족들은 시종의 양어깨에 비단을 한 무더기씩 얹어 두고는 녹색이 낫네 푸른색이 낫네 햇빛 아래에서 옥신각신 설전을 벌이고 있기에,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이레이는 싸늘하게 한마디를 던져 두었다.
“관둬. 둘 다 걸치게 될 일 없을 거다.”
“응? 자네 뭐라고?”
제대로 듣지 못한 귀족이 그를 돌아봤지만 그는 이미 한참 멀어져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정원 한쪽에선 시종들이 만개한 붉은 헤라꽃을 뽑아 수레에 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새로 흙을 채워 새하얀 프레이니아 구근을 심기를 반복했다.
제아무리 제국의 역사에 대해 무지렁이인 이레이라 할지라도, 저 하얀 꽃이 혼인을 축하하는 의미로 쓰인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맹랑하긴.”
그리고 다행히, 그의 화가 폭발하기 전에 정원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쳤다.
“……이레이.”
이레이 린의 단 하나뿐인 친우, 라피난 카일이 언제나처럼 그린 듯한 무표정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당연히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레이는 바로 알아차렸다. 여느 때와 같은 침착함을 가장했을 뿐, 사실 라피난이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임을.
그야 찔리는 구석이 있을 테지. 이레이는 모처럼 반색했다.
“오랜만이군, 라피난. 잘 지냈나?”
인사는 라피난에게 건넸으나, 그의 시선은 라피난의 옆에 서 있는 낯선 청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이 희고 샛노란 금발을 가진 자였다. 눈동자 색도 라피난과 비슷한 녹색 계열이었지만 훨씬 더 탁한 빛깔이다. 나이는 이제 갓 열일고여덟이나 되었을까. 전체적으로 라피난에 비해 색소가 짙은 것으로 추측건대 아주 완벽한 순혈은 아닌 듯했다.
물끄러미, 눈동자를 굴려 청년을 관찰하던 이레이의 시야에 문득 라피난이 한 발자국을 끼어들었다.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군.”
성큼, 그러면서 청년을 제 등 뒤로 숨겨 버린다. 이레이는 인내심 어린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됐어.”
“열흘 뒤에나 볼 줄 알았다.”
“네가 그러길 바란 건 아니고?”
“또 부대원들을 팽개치고 혼자 움직였나 보군. 그 버릇 고치라고 했을 텐데.”
라피난이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한 보람이 없었다. 찰나 라피난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샛노란 금발 청년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렇게 외쳤으니까.
“맙소사! 혹시 이레이 린 대장이 아니십니까?”
“나를 아나?”
아,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이레이가 안광을 빛냈다. 라피난이 질끈 눈을 감은 것과 동시였다. 아찔한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청년은 밑도 끝도 없이 명랑한 목소리를 내며 라피난을 제치고 이레이 앞에 섰다.
“알다마다요. 저는 리히티 가문의 덴체라고 합니다. 여태 그대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렇게 만나는군요”
“리히티……. 역시 그랬군.”
이레이의 말끝이 묘연히 가물어졌다.
덴체는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설마하니 리히티 가문의 사내가 겨우 저잣거리의 영웅인 ‘이레이 린 대장’을 열렬하게 숭배하는 부류였을 줄이야, 천하의 라피난조차 미리 조사하지 못했다.
하기야 지난 삼 년간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승전보를 울린 사내의 소문이란 전쟁터엔 얼씬거려 보지도 못한 젊은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해 주기 충분했다. 글쎄, 그 출신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른다는 점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재차 덴체가 물었다.
“그런데 대장, 산적 토벌을 떠나셨다더니 벌써 돌아온 겁니까?”
“그래.”
“하하. 그대가 무사히 돌아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래?”
이레이의 눈썹이 까딱였다. 찰나 라피난을 훑어보는 시선에 슬슬 지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라피난은 이번에야말로 덴체를 끌고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막무가내로 이어지는 덴체의 질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잠깐! 그런데 어깨에 멘 자루는 뭐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아아……. 이거.”
이레이가 시큰둥하게 제 어깨를 확인했다. 이어진 대답은 더욱더 무심했다.
“죄인.”
그래 놓고는 왜 그렇게 선득한 눈으로 덴체를 돌아보는지.
“눈알이 뽑힌 산적 우두머리의 머리다. 황제께서 원하시기에 살뜰히 잘라 왔지.”
그러고 보니 흔들리는 자루 틈새로 피비린내와 살점 썩는 냄새가 뒤엉겨 흘러나오는 중이다. 소름이 끼칠 만큼 적나라한 이레이의 설명에도 덴체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짜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흥분을 드러냈다.
“폐하께서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대장의 위상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번 크샨 왕국과의 전쟁에서는 겨우 백 명의 소대로 몇 배가 넘는 적을 궤멸했다지요?”
“그건 아냐. 원래 소문이란 게 과장되기 마련이라.”
“겸손하시긴! 요새 성 밖의 술집에선 모두 이레이 린 대장과 그 대원들의 무용담으로 매일 시끄럽습니다. 그저 뜬소문이 아니라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안다고요.”
“오, 우리 재상 나리께서 웬일로 병사들 입단속에 실패한 모양이네.”
별안간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레이가 라피난을 쳐다봤다. 의미가 분명한 그의 시선에도 라피난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