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간혹 대규모 출정을 앞두고 황제가 직접 기사들의 무사 생환을 빌어 주는 건 사실이었으나, 나라 하나를 섬멸하러 가는 정도면 모를까 겨우 산적 토벌대에게는 과분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런데도 해시트는 기꺼이 마차 밖으로 몸을 내렸다.
“재미있구나. 그대가 무운을 원하다니.”
되묻는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서려 있음에 추측건대, 무려 ‘감히’라는 표현을 붙여 가며 그녀를 떠받들어 준 게 기특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레이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대원들의 무사와 적들의 섬멸을 기원해 주십시오.”
“그쯤이야 경의 능력만으로 충분할 텐데? 전장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지 않나.”
“오늘부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전장에 임하는 제 마음가짐도 새로워져야겠지요.”
“……좋다.”
해시트가 이레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이마 근처에 그녀의 손등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짐의 축복을 받고도 실패했다간 크게 창피를 당할 줄 알아라.”
“설마요.”
이레이는 묘연히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
“당신께서 승리를 원하시는 이상, 절대로.”
그대로 손등에 입을 맞추자 남몰래 흠칫 떠는 여자가 느껴졌다.
커다란 반지를 세 개나 끼운 그녀의 손가락에선 오늘도 좋은 향기가 났다. 대관식을 위해 성수로 온몸을 흠뻑 적신 탓인지, 원래 타고나기를 그렇게 눈길을 끌도록 태어났는지.
해시트가 말했다.
“일어나.”
“감사합니다.”
이레이는 그녀의 손등을 천천히 놓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커다란 남자의 그림자에 뒤덮이게 된 해시트가 이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대에게 미케나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러자 이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짙은 미소를 퍼뜨렸다.
“거짓말.”
처음엔 단지 작은 입 모양뿐이었다. 그래서 해시트도 더럭 인상을 찌푸렸을지언정 그녀의 귓가로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밀어 내진 못했을 것이다. 이런 대화는, 남들에겐 들리지 않는 그들만의 밀어로만 남겨 두어야 했을 테니까.
“사실은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
“아름다우신 황제 폐하.”
나긋한 찬사를 남기고 이레이가 멀어지고, 해시트는 무심하게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켜보는 이들은 그저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런 평범한 속삭임이 오갔으리라 상상할 만큼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럼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폐하.”
이레이를 태운 흑마와 그의 백인 소대는 또다시 희뿌연 흙먼지를 남기고 멀리멀리 고개를 넘어갔다.
백 마리의 말이 말발굽을 부닥치는 소리가 성문 앞을 소란스레 흔들기에, 해시트는 어쩐지 오랫동안 그 출정식을 구경하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피곤하구나. 오늘 남은 정무는 내 방에서 보겠다.”
*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폐하. 접니다.”
라피난이었다. 해시트는 서둘러 서류를 고쳐 쥐고 대답했다.
“들어와라.”
딱히 정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상념에 빠져 있던 참이다. 이를테면 오늘 산적을 토벌하러 떠난 어떤 사내의 생각 같은 것. 스스로에게도 달갑지 않고 라피난에겐 더더욱 들키기 싫었으니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열린 문틈으로 군복 대신 관복을 입은 라피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상에 봉한 지 이제 겨우 반나절이나 되었던가. 그런데도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관료의 길을 걸어온 양 관복이 잘 어울렸다. 품에 안은 지류 뭉치마저 너무 자연스러워서 허리춤에 맨 장검만 아니었다면 무예와는 전혀 연이 없어 보일 성싶었다.
그는 들고 온 서류 뭉치를 해시트의 책상 한쪽에 턱 얹어 놓고 말했다.
“폐하의 신랑감으로는 리히티 가문의 덴체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마치 ‘후식으로는 딸기를 씻어 먹지요.’라고 말하는 듯 덤덤한 억양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듣고 있던 해시트는 필요 이상으로 솔직한 반응을 내비치고 말았다. 윽.
“내 혼인 상대를 벌써 결정했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만 하루도 지나기 전에…….”
무심코 항변하려다 급히 표정을 바꾼다. 라피난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 봐 조심스러웠다.
“검증을 철저히 하라 일렀을 텐데. 시간이 부족하진 않았나?”
“황가와 혼인할 수 있는 일곱 가문 중 폐하와 사이가 나쁜 디어와 제가 속한 카일을 제외하고, 또 폐하의 모계인 옌을 빼고, 남은 넷 중에 폐하와 나이대가 맞는 사내를 둔 집안은 리히티, 듀이, 휘캄, 이렇게 셋뿐입니다. 다들 여식만 금지옥엽 길러 둔 탓이지요. 지금껏 모두가 폐하께서 남자인 줄 알고 있었으니 당연합니다.”
라피난은 거침없었다.
“각설하고, 듀이의 자제는 얼굴이 박색이라 폐하께서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다가 결국 예식을 못 치를 게 분명하니 제외했고요. 반대로 휘캄의 청년은 얼굴도 반반하고 정치에 야망이 없어 제법 높은 점수를 주었으나 여자관계가 말도 못 하게 복잡하더군요.
지난해 신전에서 투신자살한 여자의 유서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니 만약 그를 폐하의 부군으로 들였다간 머지않아 폐하의 손에 직접 유명을 달리할 듯하여, 버러지 같은 생명일지언정 소중히 여기자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거침없어도 되나 싶게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겪어 보는 놈도 아니고, 해시트는 언짢게 눈 아래를 경련하면서도 어쨌든 라피난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그래서 어부지리로 리히티 가문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만, 실제로 덴체를 만나 보니 조금 멍청하다 싶을 만큼 순진해 빠졌지만 다행히 성 기능이나 사지엔 문제가 없고…….”
“잠깐, 라피난.”
결국 해시트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 라피난은 즉시 말을 멈추고 예를 갖췄다.
“예. 폐하.”
“짐이 네게 이 일을 맡긴 게 어제였던 걸로 기억한다만.”
“맞습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일곱 가문의 사내를 전부 뒷조사하고 심지어 생식 기능까지 확인했다고? 너 혹시 몸이 일곱 개인가?”
“정확히 말씀드리면 여섯 가문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후보에서 뺐으니까요.”
“넌 왜 뺐는데.”
이럴 땐 어떻게 빠져나가려나 궁금해져서 그냥 한번 물어봤다. 라피난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폐하께서는 정말 저와 혼인하고 싶으십니까?”
“……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신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서요.”
“……무슨 마음의 준비?”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개인의 미래를 어디까지 희생하는 게 옳을지 진지하게…….”
“됐다. 내 베개가 너보단 농담을 잘할 거다.”
이게 어디서 팔려 가는 부엌데기 시늉을 하고 있다. 해시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알아서 진행해. 휘캄의 난봉꾼도 적당히 증거를 찾아서 처벌해 두고.”
“진실로 밝혀지면 어떤 형벌을 내릴까요?”
“성 밖 저잣거리에 손발을 묶어서 매달아 두고 밤에는 감시하는 인력을 치워 버려. 만약 성 밖의 여자들까지 추행했다면 다음 날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겠지.”
“그건 그의 가문에서 반발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번 대 휘캄의 수장이 드물게 명예를 아는 인물이다. 진실이 밝혀지면 오히려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날뛸걸. 너는 그거나 잘 막아. 그 노인네가 직접 아들을 죽이고 여생 내내 기도원에 틀어박혀 속죄하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그러죠.”
“보고 끝났으면 그만 나가 보도록. 나도 일할 거야. 누구 때문에 첫날부터 정무가 많아서 말이야.”
흘긋, 그녀의 눈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훑었다. 너무 성실한 신하를 둔 주군의 업보라고 해야 할까. 라피난은 해시트의 감상에 토 달지 않고 순순히 수긍했다.
“예. 그럼…….”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해시트를 바라보고 있다. 그새 다음 서류를 집어 든 해시트가 그 안으로 시선을 파묻으며 물었다.
“왜. 더 할 말이 남았나?”
“…….”
“해 봐, 있으면.”
“솔직히 저는 좀 걱정됩니다.”
가볍게 독촉하기 무섭게 라피난이 실토했다. 해시트는 서류를 좀 더 위로 들어 올려 표정을 가렸다. 무심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어떤 게.”
“이레이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현실을 감당 못 하고 제국을 떠나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원래 작위이니 명예이니, 감투에는 영 흥미가 없는 떠돌이잖습니까.”
“그 녀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게 더 우습구나.”
해시트가 쓴웃음을 흘려보냈다.
라피난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여태 그런 미련을 품고 있었다니, 모르는 새 두 남자 사이에 전우애를 뛰어넘는 우정이 싹트기라도 한 모양이다.
라피난이 해시트에게 맹세한 충성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사. 종종 그 감정의 형태가 눈에 보이는 듯할 때마다 해시트는 못내 부러워졌다가, 또 금세 그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해지곤 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모두 버려야 할 텐데…….
다시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뭐가 걱정이냐. 이레이가 받을 상처? 아니면 그가 떠난 뒤 정비해야 할 군대의 전력?”
이제 보니 라피난이 해시트의 신랑감 후보에서 제 이름을 뺀 것도 그런 유치한 이유에서 기인한 게 틀림없었다.
둘이 친구라서.
한데 돌아온 대답은 해시트의 예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아니요. 저는 폐하가 가장 걱정입니다.”
우뚝, 서류를 넘기던 해시트의 손이 멈췄다. 절대로 동요하지 않겠다던 결심이 무색하게 바로 반문하고 말았다.
“뭐라?”
“외람되지만, 폐하. 폐하께서는 정말로 그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해시트가 벌떡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