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러나 거두절미 들이닥친 본론에 부지런히 대답을 내놓진 못했다.
잠시,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입술을 떼어 냈다.
“어쩌긴. 내일 대관식에서 널 재상으로 임명할 거다. 선황께서 갑자기 서거하셨으니 인수인계 기간 없이 바로 실무에 들어가야 해. 너야 어련히 잘할 테니 별걱정은 않는다만, 절대로 대신들이 설치게 두지 마라. 한 두어 명쯤은 죽여도 되니 참고하든지.”
“살려서 써먹는 쪽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기대되는군.”
전혀 설레지 않는 얼굴로 받아치고는 더 언짢게 덧붙인다.
“아, 내일 이레이에게 여비 좀 두둑이 쥐여 주도록. 꼭 다 쓰고 오라고 전해야 한다. 전부 다.”
“예.”
“이렇게라도 해 두지 않으면 보나 마나 소대원들 여관방도 제대로 안 잡아 줄 게 뻔해. 이 세상에 사흘 밤낮을 굶으며 야영해도 살아 있을 수 있는 인간이 저뿐이라는 건 죽어도 모를 자식이라니까.”
“황명이라고 전하죠.”
“아무렴.”
“하면, 폐하. 저는 그다음을 여쭙고 싶습니다만.”
“…….”
어쩌지. 해시트는 또 대답하지 못했다.
내리깐 속눈썹에 아득한 망설임이 걸려 있었다. 어쩌면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 아니, 아니다. 추억 같은 팔자 좋은 단어를 곱씹기엔 그녀는 늘 근심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상념이라고 해 두자.
“이봐, 해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해시트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의 정의는.
“너는 나와 제위,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나?”
예전에 그녀가 아는 어떤, 세상에서 가장 건방진 남자가 그녀에게 그렇게 질문한 적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였고 드넓은 초원 위였다. 그날 밤하늘에 떠 있던 별의 개수마저 선명히 기억난다. 그 남자의 머리색처럼 붉은 모닥불이 머리맡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던 쌀쌀한 봄이었다.
출신조차 불분명한 용병에게 제 성별을 들켜 버리고도, 어쩐지 그를 죽여 버릴 마음이 들지 않아서 어영부영 시간만 끌던 어느 날엔가.
그때 해시트는 남자를 등지고 누워 잠을 청하는 중이었으나 선잠조차 들지 못했다. 결국 꾸물꾸물 몸을 반대로 돌려 남자와 마주 보았더랬다.
흑발도 적발도 아닌 암홍색 머리카락은 컴컴한 밤에 보아도 핏물처럼 선명했다. 바닷물을 얼려 아로새겼다 해도 믿을 법한 새파란 눈동자는 또 어떻고.
자잘한 상처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다부진 뺨과, 예민한 성격을 경고하듯 곧게 뻗은 그의 눈썹은 왜인지 그녀 앞에서는 종종 부드럽게 휘어지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뺨 위로 제 손바닥을 얹어 봤었다.
남자의 체온은 기이하게 차가웠고 덕분에 이상하리만치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러자 문득 웃음이 났다. 감히 신국의 제왕이 될 귀인 앞에서 그따위 선택지를 들이미는 자신감이 너무나 우스웠기 때문이다.
고를 대답이야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백성.”
남자의 눈썹이 보기 좋게 찌그러졌다.
“그건 보기에 없었잖아.”
“네가 보기를 잘못 만들었으니까.”
“……그런가?”
그가 천천히,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결국 나는 너에게 백성도 아니로군.”
“……그건,”
“그만 자라.”
그날 밤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질질 끌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이…….
그랬으니, 필경 오늘의 선택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해시트는 감았던 눈을 떴다. 곧장 라피난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레이가 떠나거든 예정대로 이 몸의 혼담을 올려라.”
“알겠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피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마음에 걸릴 게 없다는 태도였다. 당연히 그에겐 떠돌이 용병과의 우정보다 국가의 대소사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을 테지. 그건 해시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몇 번쯤 입술이나 부딪친 사이. 어차피 그마저도 이레이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어땠는가……. 그것이야말로 일말의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인 것을.
해시트는 황제다.
“황가와 혼약할 수 있는 일곱 가문의 자제 중 가장 심약하고 멍청한 자를 고른 뒤, 네가 직접 대면해서 다른 하자가 없는지 확인하거라. 예식 날짜는 빠를수록 좋다. 신전에 가서 길일을 받되 가장 가까운 날을 다그치도록 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라피난.”
반드시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던 날부터, 제게 주어진 삶을 불행하다 여긴 적 없었다.
라피난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이의 백인 소대가 돌아오기 전까지 모든 절차를 끝내겠습니다.”
과연 몸 쓰는 일만 시키기엔 머리가 너무 좋은 인재다. 너무 새삼스러운 감상이라 그저 마음속으로만 곱씹었다.
*
대관식은 완벽하게 끝났다.
수백의 보석 타래가 얽힌 황금 면류관를 쓰고 해시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광장에는 떠나갈 듯한 함성만이 가득했다. 어찌나 거대한지 오히려 듣는 사람을 위축시킬 정도였다. 그래 봤자 해시트에겐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고,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당당하게 길 위에 섰다.
백성들이 바치는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직접 받아 드는 손끝,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 단상을 거니는 우아한 걸음걸이와 작은 발바닥, 그 모든 것이 그녀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남자였던 적 없노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자리에 존재하는 군중은 새 황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지만, 이제 아무 상관 없는 문제였다. 당연했다. 이미 모두가 새로운 황제를 사랑했으므로.
황제, 해시트 미케나 티플리스 3세는 신관이 가져온 성수에 손을 씻고 선황이 남기고 간 황좌에 앉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면류관의 타래 사이로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했다.
“짐은 황제다. 감히 다른 호칭을 대어 모욕할 생각은 말라.”
대관식에 참석한 대신들은 물론이거니와 타국의 사절단들까지 모조리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해시트가 황제로서 꺼낸 첫마디였다.
행여 작은 서신에서라도 여제이니 여황이니 따위를 읊었다간 제아무리 실수라 우긴들 이튿날 바로 전쟁이 발발하리란 경고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그날따라 늦봄의 뙤약볕이 오전부터 기승을 부렸다.
대관식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황제의 곁을 지킨 라피난과는 반대로, 이레이는 아주 먼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출정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이레이 대장님, 말들에게 여물을 다 먹였습니다.”
어디선가 달려온 쥰이 이레이에게 경례했다.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두른 기사였다. 이레이는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넌지시 고개만 주억거렸다.
“슬슬 출발해야겠군.”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대관식의 풍경을 좇으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겨우 손톱만 한 점으로 보일 풍경이 뭐 그리 볼만하다고 시선을 기울이고 있는지, 이따금 상사가 보여 주는 알 수 없는 행동에 쥰은 의아하게 턱을 기울일 따름이다.
별안간 이레이가 씨익 미소 짓더니 휙 몸을 돌리고 말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우리의 아름다운 황제 폐하께 무운을 빌어 달라 간청해 볼까.”
“지금 대관식 중 아닙니까?”
“다 끝났는데 뭘.”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여기선 보이지도 않는데요.”
“보여.”
“예?”
“지금 막 연설 끝내고 군중들 해산시키고 있네. 근위대장 나리……, 아니, 재상 나리께서.”
이레이가 목을 길게 빼고 다시 한번 광장 방향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침음이 이어졌다.
“으음, 지금 출발해야 딱 성문 앞에서 맞닥뜨리겠군. 어서 준비해라, 쥰.”
“보인다고요……? 아하! 농담하신 거군요?”
매사 진지해서 농담이 안 통하기로 유명한 쥰이 뒤늦게 반색했다. 이레이는 이렇다 할 대꾸 따위 없이 그녀를 멀뚱히 쳐다봐 주곤 말에 올라탈 뿐이었다.
“뭐 하나? 대원들 소집하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
쥰의 오른손이 재빠르게 경례를 그렸다.
거대한 흑마에 올라탄 이레이의 머리 꼭대기로 태양이 날카롭게 걸쳐 있었다. 사방으로 번뜩이는 모양새가 꼭 금빛의 창살 같다. 너무 눈부셔서 도리어 이레이의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워졌지만, 가려진 표정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만은 여전했다.
볼 때마다 긴장되는 풍경이다. 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편이라 참 다행이라니까.’
제국군에게 이레이 린은 보통 그런 말로 정의되곤 했다.
전장에서 미쳐 날뛰는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아마 모두가 공감할 터였다. 그나마 이레이와 비슷한 승률을 가진 이는 황태자 직속 근위대장이었던 라피난 카일 정도.
한데 그 라피난도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뜬소문이 돌 지경이었으니, 두 사람이 함께 전장에 나설 때마다 어떤 장관이 펼쳐질지야 안 봐도 알 만했다.
*
백여 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성문 앞으로 달려온 이레이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를 따라 모든 대원이 땅을 디디자 뿌연 흙먼지가 성문 앞을 그득 에웠다.
해시트가 탄 마차의 행렬이 등장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행렬의 맨 앞줄에는 오늘 재상에 임명된 전 황태자 근위대장, 라피난 카일의 말이 있었다.
“폐하께 예를 갖춰라.”
그의 명령이 떨어진 즉시 모두가 한쪽 무릎을 흙바닥에 꿇었다.
이레이도 일단 순순히 몸을 굽혀 놓고 눈동자를 굴렸다. 마차 안의 해시트와 시선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선스레 빛나는 보석 면류관 속에서 더욱 반짝이는 금색을 찾아내는 건 이제 그에게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 눈을 단단히 붙잡아 둔 채 이레이가 말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축복을 원합니다.”
참으로 주제를 모르는 시건방진 청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