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해시트의 황태자 시절 내내 ‘얘’니 ‘쟤’니 반말을 일삼는 건 물론이거니와 상스러운 욕설까지 심심찮게 지껄여 대던 이레이 린이라 할지라도, 황제 직속 근위대장이 되는 순간부턴 극존칭을 진종일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게 싫다면 라피난보다 과묵해지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더 그의 적성에 안 맞는다.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만 이레이를 뒤로한 채, 해시트는 라피난이 걸쳐 주는 재킷에 순순히 어깨를 내어주면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근위대장 자리가 걱정이야. 조만간 무투회라도 열어야 하나.”
“쥰 경도 검술은 제법 쓸 만하더군요. 면접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니. 그 녀석은 너무 재미없어. 매사 심각한 건 너로 족하다.”
“재미로 정무를 보실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 너의 그런 점이 가장 재미없다고.”
이레이의 군복은 해시트에겐 너무 커서 거의 무릎까지 내려왔다. 지금까지 남자라고 감쪽같이 속여 온 게 황당할 지경이었으나, 그 황당한 일을 해내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단 며칠이라도 보았다면 함부로 혀를 놀릴 순 없을 것이다.
일순 이레이가 손가락으로 라피난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야? 근위대장은 이놈이 계속 맡는 거 아닌가?”
라피난은 가볍게 어깨를 들었다 내리는 것으로 의견을 대신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해시트가 대답해 주었다.
“이 녀석은 재상으로 위임할 거다.”
“군인을 재상으로?”
“몸 쓰는 일만 시키기엔 머리가 너무 좋잖아. 잘 써먹어야지.”
“그렇군. 그럼 나는?”
“……응?”
뜻밖에 연달은 질문에 해시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레이는 진지해 보였다.
“그럼 내 머리는 어디에 써먹게.”
“아, 넌 말이지……. 그게, 으음…….”
“폐하. 그냥 저놈을 근위대장 시키시지요. 몸이라도 최대한 써먹게.”
라피난이 넌지시 끼어들어 제안했다.
곤란해하는 해시트를 도우려 했던 걸까? 그렇다기엔 언제나처럼 이레이에게 시비를 걸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이 괘씸한 충신 둘은 곧 황제의 존재도 뒷전으로 두고 서로를 헐뜯기 시작했다.
“이봐, 라피난. 네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해서 내가 널 노인으로 공경해 주진 않아. 조심하도록.”
“이 머리가 흰색으로 보인다면 네 시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인데. 너야말로 노안이 일찍 왔나 보군.”
“어느 백사장에서 사금을 찾고 계시는지 모르겠군. 네가 어딜 봐서 금발이야? 백발이지.”
“그렇지. 백색과 금색이 섞인 희귀한 색이지. 제대로 예시를 드는 걸 보니 시력엔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알겠다.”
“네가 재상이 되면 얼마나 많은 관료들이 울화병으로 앓아누울지 걱정된다.”
“걱정하지 마라. 울화병보다 과로로 먼저 앓아눕게 만들 테니.”
“네 농담 정말 재미없어.”
“농담 아닌데.”
“……그럼 관료들이 불쌍해지는군.”
웬일로 먼저 혀를 내두른 쪽은 이레이였다. 여기서 더 말꼬리를 잡았다간 자신이 그 관료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듯했다.
전쟁터에서 싸울 땐 마치 한배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손발이 척척 잘 맞는 주제에, 사석에서 붙기만 하면 번번이 말싸움으로 이어지니 당최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보다 못한 해시트가 양팔을 훠이 휘둘러 둘을 떨어뜨리고 말했다.
“오늘은 적당히 해라. 귀 따갑다.”
“하지만 해스, 저 자식이 먼저 시비를…….”
“폐하, 부디 빠른 호칭 정리를 명하시어…….”
“둘 다 닥쳐.”
“…….”
“…….”
꼭 이렇게 정색해야 알아듣는다. 그녀의 일갈에 꾹 입을 다문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며 해시트는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내일이면 황태자궁을 떠나 황제궁으로 입성할 예정이었다. 건물 안쪽에선 시종들이 짐 싸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소란을 피할 겸, 마지막으로 황태자궁 정원을 천천히 산책하기로 한다.
불현듯 연못 어귀에 발목을 담그고 해시트가 말했다.
“이레이.”
“응?”
되묻는 이레이의 목소리는 언제 패악을 부렸었냐는 양 다감했다.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고 그녀에게 눈빛을 내리쬐고 있을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해시트는 그를 돌아보는 대신 어깨에 걸친 군복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너는 내일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소대를 끌고 드랑 산맥으로 가서 산적 떼를 징벌하고 와라. 이번 전쟁을 틈타 흘러들어 온 떠중이들이 농가를 수탈한다더군.”
발목께가 잠긴 연못 수면에 끊임없이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산적 떼에게 수탈당하는 가여운 백성들을 생각 중일까, 언젠가부터 해시트는 그 둥그런 파동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레이가 시큰둥하니 고개를 쳐들었다.
“드랑 산맥이면 거의 남쪽 국경이잖아. 여독도 풀기 전에 또 아주 먼 길을 보내 주시게?”
피식, 흩어지는 실소 사이로 희미한 씁쓸함이 스쳤다.
백여 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국경의 끝까지 이동한 뒤 산적 떼를 박멸하고 수도로 돌아오기 위해선 적어도 한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야 혼자 다녀온다면 보름으로도 차고 넘칠 테지만…….
어쨌든, 서른 번의 해가 뜨고 지는 동안 해시트의 곁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이레이에겐 꽤나 애석한 일이다.
그 곁이 황제의 곁이냐, 그럴 리가. 그는 단지 이 여자를 떠나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마뜩잖을 뿐. 직언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너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더냐.
그런 야속함.
분명 그 마음을 다 알면서도 해시트는 늘 모르는 체한다.
“명심해. 죄인은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여야 한다.”
그녀가 선득해진 목소리로 그를 돌아보았을 때에야 이레이도 빙긋 마주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거야 내 전문이지.”
그러나 해시트의 요구는 끝난 게 아니었다.
“시체의 목은 잘라서 국경에 걸어 두고, 그중 우두머리의 것만 내 앞에 가져와라. 몸뚱이는 사지를 찢어서 산짐승의 밥으로 뿌려. 짐승들을 배불리 먹여야 먹이를 찾아 농가로 내려오지 않을 테지. 혹시 그들에게 가족을 잃은 백성이 복수를 원한다면 숨통을 끊기 전에 산 채로 눈알을 뽑아서 전해 주어라. 다 기억했나?”
“그건 좀. 눈알 뽑을 때 감촉이 얼마나 불쾌한지 알기는 해? 그거 되게 미끌미끌하고.”
“이 몸이 굳이 알아야 하는지?”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순간 이레이의 입가에 종전과는 다른 미소가 퍼져 나갔다. 해시트는 냉큼 시선을 거둬들였다.
“됐군. 그럼 마지막으로, 산적 떼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모두 수도로 데리고 돌아오도록. 이상이다.”
“젠장, 돌아오는 길엔 보모 노릇까지 해야 한단 말이지.”
“자신 없나?”
“설마.”
어느새 다가온 이레이의 손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을 한 움큼 들어 올렸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그녀를 연신 훑어내리는 새파란 눈동자는 부드럽다 못해 간지러워서, 당당하게 건방진 말을 일삼는 혓바닥이 더욱더 괴리감을 주었다.
“처음 해 보는 일도 아닌걸.”
“…….”
“장담하는데 세 살배기 어린애도 너보다 손이 많이 가지는 않을 거다.”
“……치워.”
탁, 해시트가 이레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한 발자국 뒤에 서서 그들을 관찰하던 라피난이 문득 복잡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들릴락 말락 흘러나온 찰나에 해시트가 퍼뜩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라피난.”
“예.”
라피난은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너는 잠깐 남아. 재상 임명 건에 대해 논의할 게 있다.”
즉 나머지는 그만 돌아가라는 소리다. 쫓겨나게 된 이레이는 떨떠름하게 한쪽 눈썹을 기울이면서도 별다른 항의 없이 상체를 폈다.
“안 그래도 갈 거였거든. 소대원들 소집하려면 나도 바쁘다.”
“잠깐만, 이레이. 네 군복 가져…….”
“걸치고 계시지, 폐하.”
불쑥 떨어진 목소리가 해시트의 말을 자르더니, 재킷을 걷어 내려는 그녀의 양손을 능숙하게 결박하고는 찍어 누르듯 입술이 부딪쳐 왔다.
기회가 있었다면 틈새를 벌리고 깊숙이 파고들었겠지만 여의치 않았나 보다. 끝내 꿋꿋이 다물린 그녀의 입술 위를 혀로 핥으며 느긋이 멀어질 적에, 이레이의 새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기회를 엿보는지 해시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종종 발생하는 이런 상황에서 먼저 시선을 피하는 쪽은 언제나 해시트였다.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질끈 감긴 눈꺼풀 아래 화를 참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그제야 이레이가 흡족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귓가에 바짝 붙어 속삭이면서, 그새 벌어진 재킷을 세게 여미어 그 안에 무얼 입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아주 성에 차지는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그는 묘한 눈길로 해시트와 라피난을 한 번씩 번갈아 본 뒤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겨우 산적 토벌이라니 시시해. 나라 하나를 섬멸하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전쟁이 끝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된 시점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군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이레이는 너무 쉽게 지껄이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매사 이런 식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 꼬라지를 끝까지 강제 관람하고 만 라피난은 그저 착잡하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당초에 버릇을 잘못 들이셨지.”
무릇 훌륭한 황제란 입바른 신하에게 발끈해선 안 되는 법. 해시트는 한동안 이마만 짚고 있었다.
이윽고 이레이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라피난이 해시트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가까운 그늘로 인도했다. 해시트는 짙은 녹음 아래 준비된 완만한 흔들의자에 누워 곧 이어질 라피난의 잔소리를 기다렸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