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
1화
프롤로그
비록 레오니스 황제가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으나 제국은 크샨 왕국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감히 확신하건대, 황가의 유일한 적자이자 만백성의 사랑을 받는 황태자 해시트가 황제의 빈자리를 채워 제국군을 완벽하게 진두지휘한 덕분이다.
해시트 미케나 티플리스.
신성제국 미케나의 황태자에 대해서 모르는 이는 비단 제국뿐 아니라 온 대륙을 다 뒤져 보아도 없을 것이다.
그는 용맹하고 총명하여 냉정함을 겸비했음에, 그것만으로도 온 대륙에 위세를 떨치기 충분했으나 심지어 그 모든 것을 뒷전으로 미룰 만큼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먹감나무 속살처럼 윤기 나는 그의 흑발, 미케나 신을 닮아 황홀하게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를 처음 마주한 이들은 으레 숨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그런 황태자가 성서를 깨치고 제국의 후계자 시험을 통과했던 나이는 고작 열두 살.
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황제의 장례를 지낸 지금은 갓 성년을 치른 스무 살이었다, 이제 그가 거쳐야 할 관문은 오직 성대한 대관식뿐이라는 데에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대관식 전날 대신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황태자는 여자였다.
얇디얇은 키톤 드레스에 휘감긴 육체가 살점 없이 말랐음에도 부드러운 곡선을 여지없이 내보였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확연해진다.
여자.
황태자 해시트는, 여자였다.
“저, 전하! 이게……!”
그녀가 회의장에 들어선 순간 여기저기서 개탄에 젖은 성토가 터져 나왔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온 백성을 속여 오신 겁니까?”
흥분한 대신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거나 말거나 해시트는 긴 회의장을 가로질러 목적지로 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성큼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갈라진 치맛자락 사이로 하얀 맨발과 매끄러운 허벅지가 드러났다 가려지길 반복했다. 붉은 융단에 남은 그녀의 조그마한 발자국 뒤로 두 명의 키 큰 남자가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훗날 황제 해시트의 치세를 논하려면 그들 두 남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라피난, 그리고 이레이 린.
그간 묵묵하게 황태자 해시트를 모셔 온 충직한 기사들.
마침내 계단 위, 황제의 자리에 다다른 해시트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이 몸의 자리가 되겠군.”
그 목소리가 천사의 입술을 빌린 양 달콤하게 울려 퍼졌다. 슬며시 의자의 팔걸이를 쓰다듬는 손끝은 말 그대로 섬섬옥수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았다. 확실하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 중에 가장 아름답고, 내일이면 신성제국 미케나의 황제가 될 해시트였다.
대신 중 하나가 외쳤다.
“송구하오나 전하! 제국의 지난 역사를 통틀어 결코 여제(女帝)란 없었습니다!”
그러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사방에서 같은 주장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 제국의 역사를 논하였고 개중엔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 일은 해협 너머 야만족의 나라에서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라며 야만국 베누스를 예로 들기도 했다.
해시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토대회를 가만히 경청할 뿐이었다.
일순간 그녀의 양 뺨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풋!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아니, 확실히 들렸다.
웃지 않기로 유명한 황태자의 미소는 너무나 귀했기에 하물며 조소라고 한들 시선을 빼앗기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가 멍하니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자, 해시트는 천천히 턱을 치켜들어 차가운 눈으로 대신들을 훑어보았다.
“제국 평생에 여제란 없었다라…….”
중얼거리더니, 누가 말릴 새 없이 냉큼 황좌에 앉아 버린다.
“전하!”
다시 여기저기서 그녀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꼬아 겹쳤다. 헐렁한 치맛자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누군가 망측하다 외치며 고개를 돌린다.
해시트는 바로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혹은 기다렸다는 듯, 느긋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상체를 숙였다.
지그시, 계단 아래 웅성거리는 대신들을 바라보면서.
“잘못 알고 있군. 여제가 아니라 황제다.”
단언한 즉시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양 조용해졌다.
다시 해시트가 말했다.
“그래서 그대들은 감히, 짐이 여자라 황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할 테냐?”
제위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황제라 칭한다. 레오니스 황제가 서거하기 전이었다면 응당 경을 쳤겠으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명분을 들먹일 심지 굳은 신하가 지금껏 목숨을 부지했을 리 만무했다.
“그, 그건…….”
조금 전까지 열변을 토하던 대신들이 하나둘 말을 더듬었다. 해시트는 이번에야말로 조소를 지워 내고 너그러이 미소 지었다.
“지금 그렇다고 말하는 자는 친히 목을 베어 주마. 하지만 오늘 이 자리를 벗어나서 감히 지껄이는 자가 있다면, 그놈의 삼대를 산 채로 성벽에 매달아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낭랑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를 꼭꼭 씹어뱉는다.
“모든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서 뼛가루까지, 네놈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야만국 베누스의 바다에 내다 버리고 역사의 치욕으로 기록해 주마. 짐이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으름장이 아니다. 그녀는 분명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애당초 으름장 따위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해시트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설령 인간조차 아닐지라도 이제 이 미케나의 황제가 될 존재는 오직 황태자 그녀가 유일했다.
황가의 유일한 적자, 단 한 방울의 불결한 피도 섞이지 않은 완벽한 순혈.
일찌감치 신전을 제 발치에 조아리게 만든 황태자 해시트는 적국의 백만 대군 앞에서도 눈동자 한 번 떨지 않고 온 대륙에 기세를 떨쳤다.
온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니, 새로운 황제를 향한 백성들의 환호는 이미 크샨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던 날 똑똑히 확인했더랬다. 수천의 사람들이 황태자가 탄 말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던 광경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모두 해시트가 제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황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 그녀가 헐벗다시피 한 몸으로 회의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폐하.”
그때였다. 나직한 경칭이 회의장에 울려 퍼진 것은.
이윽고 계단 아래를 지키고 서 있던 두 명의 기사가 보란 듯이 해시트를 향해 몸을 돌려 무릎을 꿇은 것은…….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차가운 표정의 백금발 남자가 먼저 운을 떼고, 그 맞은편의 붉은 머리 남자가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맹세합니다.”
드문 백금발을 가진 기사의 이름은 라피난, 이 제국에서 황가 다음으로 권세 높은 카일 가문의 장자이자 황태자 직속 근위대장이었다.
다른 이는 이레이 린이라고 불렸는데, 흑발도 적발도 아닌 암홍색 머리카락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제국 백성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엔가 해시트가 직접 포섭해 온 용병 출신이라고만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이 해시트를 황제로 추앙을 시작한 이상 대신들은 그에 반박하거나 순응하기를 선택해야만 했다. 물론 선택지가 둘이라고 해서 패가 갈리란 법은 없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무릎을 꿇고 복창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폐하께…….”
“맹세합니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조아린다.
언젠가부터 해시트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으로 대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좁은 폭으로 달싹였다.
“그대들은 어떤 걱정도 하지 말라.”
그러나 대신들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를 향한 다짐으로 들리기도 했다.
“짐은 결코…… 제국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굳게 믿는 사람 같았다.
제1막. 천둥소리 우는 밤
#1. 죄인의 목
“젠장, 내가 설마 국무회의장에서 네 가슴을 보게 될 줄이야. 왜? 그렇게 입을 바엔 차라리 벗고 들어가시지.”
황태자궁에 다다르기 무섭게 이레이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 말씨의 불손함이 점점 극에 달하는가 싶더니 별안간 입고 있던 군복 재킷을 벗어 해시트에게 집어 던지기에 이른다. 휙! 해시트에게 날아드는 재킷을 중간에 낚아챈 이는 당연하게도 함께 걷던 라피난이었다.
“위험하잖나. 이레이.”
이레이의 재킷을 반으로 포개 접으며 라피난이 말했다. 이레이는 그마저도 듣기 싫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잔소리 집어치우고 그거나 쟤한테 뒤집어씌워. 근위대장 나리.”
말이 통할 상대여야 설득으로 타일러 보는 것이다. 라피난은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곧장 해시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 언제쯤 저 경거망동한 자의 말본새를 뜯어고치시겠습니까?”
그러자 해시트가 곰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지하게 대답해 주기를.
“기다려 봐라. 이 몸도 다 생각이 있으니.”
“기왕이면 제가 상사라는 것도 각인시켜 주십시오.”
“음……, 참고하마.”
듣던 이레이도 질세라 다시 발끈하고 나섰다.
“참고는 얼어 죽을. 죽을 고비 넘겨 가며 보필해 온 신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너야말로 주군 앞에서 한결같이 할 말과 못 할 말을 못 가리는구나. 이 몸이 제위에 오르면 깍듯이 존댓말을 하겠다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독촉하지 마. 아직 대관식도 안 치렀으면서.”
“다물도록. 자꾸 까불면 황제 직속 근위대장으로 봉해 버리는 수가 있다.”
“……다물지.”
말이 좋아 황제 직속 근위대장이지 실상 황제의 모든 공무 활동을 졸졸 따라붙는 수행원이나 다름없었다. 감투라면 일단 두드러기 반응부터 보이고 보는 이레이 린에겐 단연코 최악의 근무 환경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