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그렇게 끝날 터였는데⋯⋯.
“⋯김우진?”
“알렌 라인하르트?”
왜 마지막에 보았던 김우진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 그것도 율리우스의 모습을 한 채. 설마, 계획이 실패한 건가?
아니면⋯.
그때 그들의 앞에 잿빛으로 모습을 가린 어린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만나는 건 처음이지?”
“너는⋯.”
잿빛 그림자의 모습과 어린아이 형상 그리고 잿빛 책에서 느껴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까지.
“네가, 아니 당신은⋯ 알 속의 초월자십니까?”
“말 놓아도 돼. 알렌 당신에게는 특별히 허락할 테니까. 응응.”
예상이 맞았다.
그는 알렌이 마지막에 들었던 그 울음소리의 주인이 분명했다.
어쨌든 상대가 그 초월자라 해도 알렌이 물어볼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죽었을 터,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데려온 거지? 그것도 김우진과 함께?
직접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알렌의 궁금증을 눈치챘는지, 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용건을 이야기했다.
“너희들에게 보답을 해주고 싶어서. 네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나는 너희들 덕분에 해방될 수 있었어. 그러니 말해봐. 어떤 소원이든 하나 들어줄게.”
“그 말은⋯.”
“이 상황이 아깝지 않아? 겨우 살 방법을 찾아냈는데 혼자 죽었잖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만약 회귀하고 싶으면 한 번 더 회귀하게 해줄게. 그게 더 좋을걸? 내가 미래에 풀려난다는 미래가 ‘확정’되면서 사실상 회귀해도 상관없게 되었거든.”
그⋯ 간단하게 지칭해서 회색 신의 말은 알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만약 다시 회귀한다면?
키메라 술사에게 희생되었던 주민들을 되살릴 수 있다.
별의 곶에서 죽었던 윌리엄과 에리엘 등을 볼 수 있고, 다쳤던 벤자민에게 끔찍한 기억을 선물할 필요도 없다.
윌리엄은 다시 여동생을 만날 수 있으며, 아칸더스는 제3세력이 행동하기 전에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하 황녀 역시 제국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고, 짐승왕도 죽지 않고 일리아나와 함께 지낼 수 있다.
회귀한다면.
과거로 돌아간다면 알렌의 후회와 실수를 모두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유혹에 알렌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침묵한다고 다른 이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나, 나는 돌려보내 줘. 나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과거로?”
회색 신은 김우진이 자신을 적대하던 건 신경 쓰지 않는지 시종일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니, 집으로. 집으로 돌려보내 줘. 현대로, 내가 살던 곳으로.”
“음⋯ 정말 괜찮아? 한 번뿐인 소원인데? 네가 원하는 건 다 이룰 수 있는데?”
“그⋯.”
그 말에 김우진은 잠시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젓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려보내 줘.”
“정말 그거면 되지?”
“⋯그래.”
“그래! 네가 원하니까 바로 이뤄줄게.”
회색 신이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걸로 김우진의 신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금 전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알렌밖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김우진의 소원을 이뤄준 그는 이제 알렌 쪽을 쳐다봤다.
“너는?”
“저는⋯.”
알렌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알렌의 앞으로 화면이 하나 떠올랐다. 그건, 알렌이 죽고 난 이후 세상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것이었다.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알이 깨지며 세상은 한 번 멸망했지만, 알렌의 희생으로 제 자신의 몸을 세계 그 자체로 만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의 몸은 멸망할 세계를 대신할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세계가 아홉으로 나뉘면서 각 종족끼리 땅을 나누어 살게 되어 분쟁이 줄어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거인의 골수를 먹은 탓인지 세상 전체에 생명력이 풍부해 풍작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음으로 보여 준 화면에 알렌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 이럴 수가⋯ 공녀님!]
[얼른 의사, 아니 신관님을 불러오게. 어서!]
[레, 레이첼 님. 제발, 제발 그만두세요.]
피투성이로 변한 방과 안절부절못하는 주변 인물들.
그들의 중앙에 멍한 얼굴로 주저앉은 레이첼이 보였다. 그녀는 천장에 끊어진 밧줄을 잠시 바라보다가 넋이 나간 얼굴로 다시 의자를 밟고 일어섰다.
[알렌, 알렌 어디 있어요. 알렌⋯.]
[레이첼 님. 제발⋯.]
그녀의 팔 곳곳에는 몇 번이나 시도한 듯한 자해 흔적이 가득했다.
“이건 좀 그렇지? 그럼 다른 거나 볼까?”
그 모습이 충격적이라 잠시 굳어 있으니 회색 신은 다른 화면으로 장면을 바꿨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
[예, 옙. 앞으로 차, 착하게 살겠습니다.]
바뀐 화면에는 웬 누더기를 걸친 여인이 있었다. 주위에는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는데, 차림새를 보아하니 여인을 습격하려다 실패한 산적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도망치기도 전, 누더기를 걸친 여인⋯ 린벨이 움직였다.
[제발, 저희가 잘못⋯ 끅.]
린벨은 그들이 용서를 빌든 반항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도살.
그 광경을 표현한다면 그것밖에 할 말이 없으리라.
산적들은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목이 잘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린벨은 피 웅덩이의 가운데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공자님, 제가 꼭 찾을게요.]
“이것도 별로야? 그럼 이건?”
모든 사람과 연을 끊고 홀로 은둔하기 시작한 이넬리아.
조금씩 표현하던 감정을 잃고 기계적이던 아카데미 시절로 돌아간 마리아.
다른 사람에게 무자비한 철혈의 여황제로 군림하는 마하 황녀.
온종일 골방에 박혀 세상 그 자체로 변한 알렌을 찾으려는 프렌시스카.
그에게 선물했던 시계만을 만지작거리며 발명에 몰두하는 일리아나.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방에만 들어가면 무너지듯이 울음을 삼키는 베스틀라.
저와 특히나 가까웠던 이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복수를 끝마쳤음에도 온종일 우울한 얼굴로 술독에 빠진 아칸더스.
새롭게 상단을 넓히겠다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카릭과 소네드.
종일 달고 있던 웃음이 사라진 어머니와 전보다 더 차갑게 변한 아버지.
나머지 네 선지자는 거대한 순환을 넘겨 기뻐했지만, 때때로 넋을 잃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밀레드는 정처 없이 맴돌다 주기적으로 라인하르트 가문에 들렀으며, 카트린느는 무덤으로 향할 때마다 항상 두 송이의 꽃을 챙겼다.
신드리는 무기를 만들다가도 훌쩍대기 일쑤였고, 이번에 처음 얼굴을 보는 신드리의 동생 브록크도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노아를 비롯한 스콜에 속했던 복수자들은 어느덧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을 꾸기 일쑤였다.
“이래도 과거로 안 갈래? 완벽하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니까? 다시 살리는 건… 미안하지만 불가능해.”
“⋯⋯.”
“이미 너는 세계 그 자체가 되었거든. 네가 살아나면 세계가 붕괴될 텐데, 너도 그런 결과는 원하지 않잖아?”
회색 신은 정말 도와주고 싶다는 얼굴로 알렌에게 권했다.
“너도 다시 완벽하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좋지 않아?”
“완벽하게, 원하는 대로⋯.”
“응응.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는 정말 열심히 나를 도와줬으니까.”
알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재생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나오는 레이첼은 슬퍼 보였고, 린벨은 공허했으며, 마리아는 삶의 목적을 잃은 것 같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렌이 없기에, 자신이 없기에 그들은 불행해 보였다.
만약, 처음부터 완벽하게 일을 계획한다면 알렌 자신이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신체를 대가로 치르되 어떻게 새로운 몸으로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마리아가 연구를 시작하고 프란체스카를 비롯한 여러 마법사가 돕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때, 돌아갈까?”
그럼에도.
“아니.”
알렌은 형형한 눈빛으로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홀로 일어서려는 자에게, 부축 따위는 필요 없다.”
“그게 다시 시작할 기회일지라도? 정말 후회할 텐데?”
그럴지도 모른다.
레이첼이 전 회차처럼 끝내 자살할지 모르고, 마리아는 무너져내려 다시는 웃는 일 따위 없을지 모르지.
그러나.
“그래도, 저들은 끝내 극복할 수 있을 거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내가 믿고 있으니까.”
알렌은 미소 지었다.
근심 따위는 하나도 없이 활짝.
그 모습에 알렌에게 말을 건네던 회색 신도 멈칫한 채 그를 바라봤다.
“이건 내가 시작한 이야기니까.”
짐승왕의 조언이 떠올랐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의 조언 덕분에 알렌은 끝내 변할 수 있었고, 초월자의 굴레가 완벽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도 마찬가지.
그는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알렌을 탈출시키고, 어쩌면 여력을 쥐어짜내 자신마저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했기에.
하늘을 보며, 아무런 걱정 따위는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박장대소하며 하얀 신에게 달려가던 모습을.
그건 억지로 희생하던 자의 모습이 아닌, 불가능한 벽을 마주하고 기뻐하는 무인의 마지막이었다.
“아직 그들이 끝을 내지도 않았는데, 내가 마음대로 멈출 수 있을 리 없잖나?”
저들은 끝내 극복해낼 것이다.
알렌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이라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리 없기에.
설령 수많은 시간 동안 방황하고 헤매게 되더라도, 그건 확실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 선택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것 역시 내가 선택한 끝이니까. 여기서 돌아가봤자, 도망친 실패자밖에 더 되나?”
1회차에서는 후회하며 회귀를 원했을지 몰라도.
2회차의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과 추억 그리고 겪었던 실패와 그에 따른 후회까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알렌의 대답을 멍하니 바라보던 회색 신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맞아! 그래, 네 말이 맞아. 아직 끝을 내지 않았는데, 책을 덮을 수는 없지!”
그가 손을 휘두르자 주위의 공간이 깨져 나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졌어! 진짜, 이놈의 형제들은 뭘 했다고 그렇게나 서로를 믿는 거야?”
그리고 그 무너진 세상의 저편에.
“제 말이 맞잖아요. 당연히 형제니까 이 정도는 믿을 수 있죠.”
기억하는 것보다 어린 율리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빙의된 직후부터 나이를 먹지 않은 것 같았다.
“역시 네가 보호하고 있었나.”
첫 번째 선지자 역할을 하던 아버지가 율리우스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아무리 안전한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그렇게 확신한다는 건 미심쩍은 일이었으니까.
“응. 네가 돌아갈 때 개입해서 회색 책을 끼워 넣을 수 있었던 것도 가이엘 덕분이야. 그래서 그 대가로 율리우스의 영혼을 보호하고 있었지.”
“그런가⋯.”
알렌은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오는 율리우스를 바라봤다.
“형 오랜만이야. 형이 해낼 줄 알았다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거냐. 몸은 괜찮은 건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한가. 혹시 망나니 시절에 했던 행동은 진짜 연기였나?
무수한 의문이 속에서 맴돌았지만, 반가운 듯 손을 내미는 율리우스에게 해야 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율리우스. 잘 지냈나?”
꽈악-
“아야야. 형 힘 많이 강해졌네? 화면으로 봤을 때는 실감이 잘 안 갔는데.”
“그런 너는 몸 좀 키워야겠군. 이렇게 비실비실해서 약혼자 구실도 못 하겠어.”
“그런 형이야말로 책임져야 할 여자가 좀 많은 것 같다?”
한순간 말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말없이 활짝 웃으며 악수하던 손을 놓았다.
이걸로 상대가 진짜인지 확인은 끝냈다.
율리우스는 알렌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았기에 알렌의 의문을 답해주기보다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에게, 이걸로 끝이야? 더 해도 되는데⋯. 그건 그렇고 선물을 하나 더 주자면!”
회색 신이 손을 휘두르자 손 위로 책이 하나 나타났다.
“짜잔! 이게 뭐게?”
알렌이 말없이 책을 바라보자 그는 그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툴툴거리며 직접 설명했다.
“아까 네가 직접 시작한 이야기니까 끝이 나지도 않았는데 바꿀 수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끝을 내면 되는 거 아니야?”
“⋯뭐라고?”
“어차피 원래 세계는 멸망했어. 연극으로 따지면 제1막이 끝나고 이제 제2막이 막을 올린 거지. 그리고 2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그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알렌을 바라보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보통 그렇잖아? 관심이 시들하자 다시 인기를 끌어모으기 위해 전에 죽었던 인물을 되살리는 것쯤은. 그러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세계가 너고 네가 세계인데 살아나는 게 뭐가 대수겠어?”
“그러니까⋯ 아까 했던 말은 거짓말이라는 건가?”
“음, 그건 아니야! 내가 이 책을 만들기 위해 힘을 썼거든! 제1막이 끝났다는 걸 내가 ‘증인’으로서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한 거야.”
“그런가⋯.”
“너도 적응하면 알게 되겠지. 지금 네 격은 나보다 조금 낮을 뿐이거든.”
알렌은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며, 그가 건넨 책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게 내가 시작한 이야기란 건가⋯.”
펄럭-
슬쩍 펼쳐보니 1회차에서 김우진에게 복수하기를 다짐했을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복수에 실패하고, 2회차에서 다시 시작하며, 계획을 세우고 동료를 모으고, 끝내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그래서, 옛이야기의 제목은 뭐로 할래?”
알렌은 자신의 손 위에 자리한, 인생 그 자체인 이야기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그래, 끝난 이야기에는 마침표를 찍어야겠지. 그래야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으니. 그러니까 책의 이름은⋯.”
처음 놈에게 대적하고자 아버지에게 향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러다 2회차가 되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깨달았을 때.
허나 그에 집착하다 처음 사귄 친우를 잃고 말았을 때.
그를 후회하며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던 때.
그리고, 자신을 위해 스승인 짐승왕이 목숨을 잃었던 때.
언제나 알렌은 그랬다.
후회하고, 번민하고, 또 고민하고.
자신이 가는 길이 맞다고 확신할 수 없기에, 단 한 번의 실패로 동생을 되살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첼에게 생각만큼 잘해 주지 못했고, 마음이 있음을 드러내는 주변 인물에게 제대로 화답하지 못했다.
항상 김우진에게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에게 경계심을 주지 않기 위해 선한 형을 연기해야 했다.
그러니, 제목을 쓰자면.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
이것밖에 없었다.
자신의 여정은, 회귀 직후 보았던 세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정말 이걸로 괜찮아? 한 번 정하면 다시 못 바꾼다?”
“그래, 이 제목밖에 없다.”
이 제목이 알렌이 품었던 지난 모든 것을 나타내니까.
“그래, 그렇다면⋯.”
책의 위로 제목이 쓰이며 공중에 떠올랐다. 회색 신은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며 환하게 소리쳤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축하해! 알렌, 신세계의 신이여! 도와줘서 고마웠어!”
너의 앞날에 행운만이 가득하기를!
웅장한 음악과 세상에 환한 빛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며 알렌이 고개를 살피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이곳에 보내다니, 아직도 귓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상아색 머리칼과 하늘색 눈동자. 평소보다 초췌한 안색으로, 그녀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첼.”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는지⋯ 꺄악!”
-와락
“다녀왔어. 레이첼.”
그 말에 무언가 소리치려던 레이첼은 방울진 눈동자를 애써 감추며, 흐느끼듯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네, 어서 와요. 알렌.”
Fin.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단화살 입니다.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 줄여서 회빙싫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은 글이었습니다. 중간에 휴재도 자주 하고, 특히 장기 휴재가 겹쳐 결국 이렇게 급완결을 내었다는 점이 여러모로 마음에 걸립니다.
이 방면에서 조언을 해주셨던 여러 작가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편집자님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많은 고민을 했던 작품이었고, 많은 애정과 관심 그리고 사랑을 쏟았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 이렇게밖에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알렌의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이제 복수자의 삶에서 벗어나 알렌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결혼 생활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첫 작품을 제대로 완결짓는다는 것에 시원섭섭하고 특히 이렇게 완결을 내기 전까지 갈팡질팡한 마음으로 휴재를 이어나갔다는 게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조금 더 나은 작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