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210화 (210/212)

제210화

그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은 뼈로, 반은 생전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불사의 군단.

“그대여, 여의 공주는 보이지 않는 건가? 우리 공주는 늦어도 한참은 늦은 것 같군.”

“그게 무⋯! 아니, 아닙니다. 알렌, 어쨌든 아니에요!”

죽은 거인들의 마지막 유산이자 시대의 패권을 다퉜던 거인 군단.

“알렌, 역시 제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죠, 볼룬드?”

「맞습니다. 여왕 폐하.」

알렌의 영지 근처에서 조용히 숨죽이던, 별을 섬기는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

“공자님, 예언에 따라 당신을 돕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신들께서 저희와 임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뒤로 등장하는 반투명한 영령 군단까지.

“⋯네가 시대의 대적자구나.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겠구나. 반갑다.”

“당신은⋯.”

알렌은 어디선가 본 듯한 상대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다 떠오른 추측을 입에 담았다.

“팔강 중 최강, 샨 미야크⋯? 분명 대륙회의 때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있다는 말은⋯ 당신이 마리아를 발홀로 끌어들인 겁니까?”

“생각했던 대로, 아니 그것보다 더 머리가 좋구나. 맞아. 내가 그녀를 빼냈지. 신대의 망령에게 이용되기에는, 그녀의 특이성이 너무 아까웠거든.”

“특이성이라면⋯.”

“천사화.”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도화라는 게 더 익숙할까. 전대 용사는 신들의 힘을 흡수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현재의 그는 육체를 잃고 생전의 전투 경험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녀가 있다면⋯ 다르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신의 힘을 다룰 수 있다면, 그와 비슷한 초월자의 힘 대결에도 밀리지 않을 테니.”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신이 없지 않습니까.”

“없긴 왜 없나? 하나 있지 않나. 그것도 남은 모든 신의 찌꺼기를 그러모은 망령이.”

“설마.”

“마리아─────!”

“나타났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저 나스트론드 평야 쪽 방향에서 온갖 신체 부위가 뒤섞인 날개 달린 괴물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 위에는, 아나스타샤 이사장이 있었다.

“줄곧 마리아를 찾고 있었을 테니 만약 모습을 드러낸다면 곧바로 찾아오리라 생각했⋯.”

“이제 모두 도착했나?”

무기질적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

마리아의 목소리가 애써 감정을 죽이려는 기색이라면, 그의 목소리에는 애초부터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율리우스, 아니 그의 몸을 빼앗은 검은 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우리를 둘러봤다.

“⋯도망친 패배자들이 모습을 드러냈군. 굴레를 깨트릴 수 있으리라고 믿는 건가?”

“믿는 것이 아니오. 지금이 가장 적합한 때라 생각한 것이지.”

“전대 용사.”

한순간 그를 보고 말을 멈춘 검은 신은 이내 모든 것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굴레를 깨트리려는 게 아니었군. 그래봤자 나와 맞설 수 없을 테니. 그렇다는 건⋯ ‘그’를 알에서 해방시키려고 그러는 건가?”

율리우스의 몸이 허물어진다. 그리고 몸에서 검은 연기가 형체를 이루며 거대한 거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전대 용사는 대답하지 않고 소리쳤다.

“모두! 검은 신의 발을 묶어라!”

그러나 그것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그래봤자 멸망을 피할 수 없는 건 다르지 않거늘,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게 굴레에 빠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적어도 내가 골라 뒤지는 거니까, 이 새끼야!”

경박한 어조로 먼저 공격에 들어간 것은 하이젤이었다.

그의 모습은 아카데미에서 보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는데, 아마 저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인 듯싶었다.

알렌 역시 그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려던 순간, 샨 미야크가 막았다.

“알렌,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게. 여긴 우리가 수천 년간 기다리던 전장이니.”

“하지만.”

“알렌. 동생, 안 구해?”

그러나 마리아의 물음에 알렌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동생의 영혼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세한 걸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순환교의 첫 번째 선지자와 만나면 알 수 있다고 했지만, 그와 만나기 전에 이미 모든 상황은 벌어진 뒤였다.

그의 망설임을 알아챈 듯 수년간 함께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안 갈 거예요? 그렇게 또 후회한다면 제 탓 아닌 거 알죠?”

“베스틀라⋯.”

“시시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그대여. 여긴 그대의 전장이 아니다. 여의 전장이지. 그럼에도 억지로 가로채려는 건가?”

고개를 돌리니 밀레드와 함께 걸어오는 북방의 여왕이 보였다.

“그, 그렇다. 사도! 여기! 우리 꺼! 빼, 뺏지 마!”

“사도시여. 우리가 바라는 순환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만약 방해하신다면 아무리 사도님이라도 분노할성싶군요.”

선지자들도 웃으며 알렌을 밀어냈고, 알렌이 마지막으로 첫 번째 사도를 눈에 담은 순간.

알렌은 왜 첫 번째 사도를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식어버린 불꽃은,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이넬리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알렌을 쳐다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그⋯ 갑작스럽게 성격이 변했습니다. 공자님.”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 그저 그의 작은 부분일 뿐이지.”

메마른 물결은 눈을 잃었고 여러 감정을 잃었다. 썩어버린 뿌리는 저주받은 요정종의 유일한 가능성이자 씨앗이다.

바스러진 쇠붙이는 자아를 가진 골렘이자 제 몸을 깎아 능력을 사용해야 하며, 빈곤한 토양은 시체에서 태어난 반인반령이다.

그들 모두 선지자의 이름에 걸맞은 사정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식어버린 불꽃의 뜻은⋯.

“정해진 미래와 희생될 아이들. 끝없이 돌아가는 굴레와 순환을 견디지 못해 미쳐버린 가이엘의 인격이, 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절망해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식어버린 불꽃이지.”

나아갈 동력과 열정을 잃었기에.

“그는 어떻게든 나와 너를 만나게 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때가 아니었기에 나서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그때가 된 것 같군.”

그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별의 곶 때 보았던 움직임. 그들의 몸이 하나의 부품이 되어 하늘의 힘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하늘의 힘을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고대 신이다.”

알렌의 의문에 답해주듯 식어버린 불꽃은 상황과 맞지 않은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신화의 시대 때 둘레를 깨기 위해 떠났던 두 고대 신. 아우둠라와 이미르.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가라.”

그는 단언하듯,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냉정히 끊었다.

“여기에 네 자리는 없다. 알렌 라인하르트.”

그 모습이 처음 율리우스에 대해 따졌을 때의 모습과 겹쳐 보여 알렌은 답지 않게 아련한 감정을 느끼다 픽- 웃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알겠습니다.”

알렌의 시선이 검은 신이 빠져나간 후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는 김우진을 향했다.

“저는 제 할 일을 하러 가지요.”

그렇게,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 * *

김우진은 뛰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도망갔다. 도망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쫓는 그놈이 나타날 게 뻔했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지.’

지금만큼은 자신에게 갈 방향을 제시해주던 상태창도 먹통으로 변해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돕던 행운도 영 힘을 못 쓰는지 아무런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발을 잘못 디뎠는지 몸을 크게 굴렀다.

그러나 그것이 김우진의 목숨을 살렸다.

퍼석-

“빙의자. 이제 도망가지 않는 건가?”

그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장소로 검이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베스틀라의 혼이 빠져나가 에고 소드에서 그냥 검이 되었다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명검을 넘어선 신검에 도달해 있었다.

비록 커졌다 작아지는 능력은 사라졌더라도 이 존재만으로도 어떤 검사도 탐낼 만한 보물임은 틀림없으리라.

김우진은 도망치려다가, 순간적으로 드는 분노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알렌은 그 모습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왜?”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

“어차피 그 새끼 망나니였잖아! 내가 알아보지 않은 줄 알아? 나도 죄책감이 들었어! 그런데 매일 사고치고 하는 그놈보다는 내가 낫지 않⋯.”

“듣지 않는 편이 나았군.”

김우진은 알렌이 휘두르는 검을 가까스로 받아 내며 발악했다.

“내가 더 낫잖아! 가문의 수치, 방탕아, 망나니보다 내가 더! 내가 도대체!”

그는 울분을 담아, 증오와 원망 그리고 자신은 그런 가족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심을 토해내며 소리쳤다.

“그 새끼보다 못한 게 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깟 엑스트라 몇 명 죽인 게 다잖아! 너희 귀족들이 하는 짓은 깨끗해? 그렇게 깨끗하냐고!”

구구구구구궁-

알렌은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봤다.

태연하게 말한 것 치고는 검은 신과 하얀 신 모두 예상외의 사태였는지 최대한 힘을 쥐어짜 내서 막아 내려 하고 있었다.

본모습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직접 나섰다가는 정말로 알 속의 존재가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겠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식어버린 불꽃이나 베스틀라나 북방의 여왕이나 두 부족이나… 그들이 알껍데기를 깨트리고 알 속의 초월자를 꺼내봤자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것 역시 자살이나 다름없다.

순환교라 순환교⋯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은 연유를 얼핏 이해할 것 같았다.

어떤 방법을 쓰든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굴레를 깨지 않는다면 서서히 두 초월자의 의도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고, 굴레를 깬다는 말은 알 속의 존재를 해방시켜 지금 이 세계가 없어진다는 말을 뜻했다.

그렇다고 해서 검은 신과 하얀 신을 죽일 수 있는가?

‘불가능하지.’

그래, 상처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무인인 전대 용사와 하이젤 그리고 짐승왕이 검은신과 하얀 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그들을 해치울 수 있다는 뜻이 되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검은 신과 하얀 신은 단 한 번도 본신의 실력을 꺼내든 적이 없었고, 그들이 사용한 능력 역시 빙의한 몸에 내재된 능력에 불과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하는데 쓰러트리는 게 가능한가?

그건 개미가 인간의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쓰러트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개미가 평생 노력해봤자 인간의 손끝을 무는 게 전부일 테니.

그런 개미가 수천, 수만 마리 모인다면 모를까, 지금까지 시대를 통틀어 단 세 명밖에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수만 명이 도달할 수 있을까?

검은 신과 하얀 신이 그걸 눈치채지 않을 가능성은 있고?

어느 쪽이든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였다.

인간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인간이고, 초월자를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건 같은 초월자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저들도 알 속의 존재를 해방시키려는 거겠지.

평생 노력해봤자 굴레를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그들과 대적하는 사실 자체가 요원한 일일 테니까.

그럼 그들이 알렌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알렌이 그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게 만든 이레귤러이자 유일한 변수였기에?

‘아니.’

그저 알렌이 평생을 노력한 복수를 끝마쳤으면 했기에.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알렌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그들의 계획대로 알 속의 존재를 깨워봤자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을 테니.

그렇다면.

“⋯뜻대로 해줄 수는 없지.”

알렌은 김우진을 보았다.

그리고, 픽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알렌을 바라보는 가운데, 알렌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 네 악행 역시 여느 폭군과 비교했을 때 그리 큰 패악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그런데 왜!”

“가족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