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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209화 (209/212)

제209화

순환교의 첫 번째 선지자는 다른 네 명의 선지자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끝이 머지않았다.

“순환, 끝없는 순환은 결국 족쇄에 불과하니⋯.”

* * *

북방의 여왕은 수천 년간 모은 전력을 이끌고 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잿빛 재앙이 다가올 때가 마지막 기회였으니.

“후배, 이제는 늦지 않을게.”

* * *

“으휴, 진짜 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요?”

나스트론드 평야의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신화의 시대를 다스리던 최후의 거인들이 몸을 일으켰다.

“진짜, 이번 일 끝나면 두고 봐요.”

모든 일을 끝낼 최후의 전투를 끝낼 때가 되었다.

* * *

마하 하뷔에론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얼굴을 한 채 시선을 내렸다.

제국의 심장이자 모든 문화의 중심지.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제국이 무너져내리고 있었으니.

만약 자신도 그때 황도에 있었다면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운 덕분에.

비공선 양산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알렌의 영지로 향한 것이 그녀의 목숨을 살리게 되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버지나 황태자 오빠처럼 목숨을 잃고 말았겠지.

“황녀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고개를 돌리자 짓궂은 얼굴로 서 있는 일리아나가 보였다.

“아니면 새로운 여황폐하라 불러야 할까요?”

다른 이들이라면 농담이라도 벌을 내려야 할 말이었으나, 마하 황녀는 일리아나와 이미 안면이 있었다. 아니, 안면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몇 없는 친우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순간 들었던 씁쓸한 감정을 떨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었다. 나중이 된다면 듣기 싫어도 매일 들어야 하는 말일 테니. 감상은 됐으니 일이나 시작하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대기하고 있던 수십 수백 척의 비공선이 하늘에 모습을 빼곡히 가득 채웠다.

“약속대로 지금 우리를 방해하는 제3세력⋯ 아니, 제국을 불태운 검은 신과 하얀 신의 신도들을 모두 정리한다.”

그녀가 향하는 시선의 저편에, 이미 멸종되었다는 용의 뼈로 만든 본 드래곤이 비공선을 발견하고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 * *

알렌과 김우진은 밤낮을 신경 쓰지 않고 싸웠다.

그러나 끝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 상황을 수년이나 준비한 알렌을 김우진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지금의 패배는 예정된 사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김우진은 인정할 수 없었다.

“왜! 도대체 왜!”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나.

고통스러웠던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다. 망나니라는 오명을 벗고, 잘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왜, 이길 수 없는 건데⋯.”

알렌의 영역, 운명의 우물이 펼쳐진 순간, 그의 힘은 끝없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알렌에게 맞섰다. 알렌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든, 그는 요 몇 년 사이보다 배는 더 강해진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뱀신 갈루아를 세 명 데리고 와도 수월하게 해치울 수 있다 자신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게 전부인가?”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공격을 하든 알렌은 알고 있었다는 듯 수월하게 대응했고, 이미 회복되었어야 할 상처는 무슨 일인지 회복되지 않았다.

태양왕의 심장도 기능하지 않고, 전력은 갈수록 약해진다.

어떤 기술을 쓰든 파훼 되며, 공격을 퍼붓던 처음과 달리 갈수록 수비적으로 변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간극은 더 깊어질 터.

김우진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지? 여기서 내가 죽어야 하나? 눈이 욱신거린다.

무지개 마안이 마음대로 작동하며 빛을 발했고, 상태창의 퀘스트는 수십 번씩 바뀌었다.

[나☐ 받아들☐라.]

[보상 : ??!@#!$!@#]

머리가 아팠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고, 달군 숯을 삼킨 듯 심장이 욱신거렸다.

결국 그가 끝내 한 선택은.

“⋯으아아아아아!”

도망이었다.

김우진은 품에서 공간이동 아티팩트를 꺼내 순식간에 어딘가로 이동했다.

알렌은 그를 막으려 했으나, 그가 온 힘을 다해 저항하자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쫓아갈 방법은 있었다.

‘어차피 이것도 예상했다.’

율리우스가 도망칠 가능성은, 정확하게 말해서 검은 신과 하얀 신이 도망치게 둘 가능성은 낮다고 봤지만, 알렌은 그것마저 대비해 두었다.

공간 마법은 익힐 수 없지만, 공간의 흔적을 더듬는 일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으니.

“이 방향은⋯.’

라인하르트 가문? 거기로 갔다고? 어떤 공간이동 아티팩트도 순식간에 대륙의 반대쪽으로 이동시켜주지 못한다.

검은 신과 하얀 신이 개입했다.

알렌은 이를 직감했다.

그렇기에 비공선을 불러 이동하기 위해 빠져나가려던 순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 한 명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레이첼. 여기는 어떻게⋯.”

“당신.”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으나,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면서 그를 째려봤다.

“이번 일 끝나면, 각오해야 할 거예요.”

“⋯명심하지.”

“그럼⋯, 이번만 도와줄 테니 어서, 할 일이나 끝내고 와요.”

레이첼은 알렌을 못마땅하게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품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다른 이들이 모두 하나씩 가보를 가지고 있듯 그라나프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가문은 공간이동 마법에 소질을 보이기에, 가문의 가보도 공간이동과 관련된 물건이었다.

여럿이라면 몰라도 알렌 혼자라면 율리우스가 향한 곳으로 이동시켜줄 수 있을 터.

그녀가 마도구를 발동시키자 목걸이에서 파동이 일며, 알렌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밖에서 사고 치는 남편을 보듯 눈에 힘을 풀지 않다가, 단언하듯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저희 약혼한 지 오래되었죠?”

“그래.”

“그럼, 결혼해요. 당신 청혼만 기다리다간 도저히 마음 졸여서 못 살겠으니까.”

“⋯⋯그건.”

“안 할 거예요?”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알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나고 파동이 알렌의 몸을 완전히 감싼 순간.

“다녀와요, 여보.”

알렌의 시야가 일변했다.

* * *

쿠구궁-

정신을 차린 알렌은 순간적으로 보인 풍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르트 저택이⋯.”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착각했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정확히는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 복도와 벽은 온통 금이 가 있고 천장의 파편은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알렌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달빛과 별빛만이, 무너진 통로의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알렌의 신형이 저택을 뚫고 달렸다.

그렇게 핏자국이 이어진 장소의 끝은 아버지가 주로 쓰는 가주실이었다.

“이건⋯.”

가주실의 문이 박살 나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이엘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가문의 가주인 아버지가 배에 구멍이 뚫린 채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더니 쓰게 웃었다.

“⋯알렌이냐.”

“예.”

“제법 늦었구나⋯ 적어도 그놈이 내려가기 전까지는 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솔직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아버지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 회귀했을 때도, 신년 연회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아버지의 목적은 무엇인가.

과거에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한 행동이 무슨 뜻인지.

그러나 알아보기에는 이미 너무나 늦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집무실의 옆,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통로가 열려 있었다.

허나, 알렌이 통로를 향해 발을 내딛기 전.

가이엘은 뒤돌아선 알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했다. 너는⋯ 쿨럭,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도 위선이겠지. 단지, 큽⋯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네게 충고하자면⋯.”

낮은 체온, 비릿한 혈 향, 느려지는 호흡.

“율리우스의 영혼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말을 끝으로 가이엘은 기절하듯 고개를 떨궜다.

알렌은 슬쩍 그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넬리아.”

“⋯⋯예.”

“부탁한다.”

알렌의 그림자에 줄곧 숨어 있던 그녀는, 위험한 결전에 자신이 빠지는 것에 불안한 얼굴을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넬리아가 가이엘에게 응급치료를 하는 모습을 본 뒤 알렌은 공동을 향해 내려갔다.

* * *

그러나 시간이 지체된 탓일까, 이 또한 검은 신과 하얀 신의 의도인 것일까.

알렌은 이미, 한발 늦고 말았다.

“⋯너는, 김우진이 아니군.”

무기질적인 표정.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 호수를 이루었을 거대한 샘의 물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김우진은 그 모든 물을 흡수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알렌을 보았다.

“이번 굴레는 참으로 변수가 많았다.”

그는 알렌의 말을 무시하며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감히 게임의 말 따위가 우리의 계획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

검은 신은, 고개를 들어 알렌을 보았다.

“네가 이겼다. 우리가 직접 움직이게 만든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하지만⋯.”

쿠구구구궁-

김우진의 몸으로 흡수된 수많은 물이 사라진 순간, 공동이 진동하며 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

하늘을 바라본 순간, 알렌은 헛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본래 검게 물들었을 밤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알렌은 많은 것을 계획했다. 대전쟁이라 불릴 만한 수많은 죽음을 제물로 잿빛 재앙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막기 위해 많은 전력을 모았다.

그렇기에 김우진과의 갈등도 일시적으로 봉합하며 마왕 토벌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그의 세력과 제3세력이 개입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지금껏 준비한 패 전부를 소진했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단 하나.

잿빛 재앙이 강림하기 전에 김우진을 끝내기 위해.

검은 신과 하얀 신의 마왕 강림 계획을 역이용해 그들의 틈을 찔렀고, 그건 실제로 일정 부분 성공했다. 그러나 알렌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라인하르트 가문의 비처에 있는 샘물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였다.

루피너스 가문에서 라인하르트 가문의 샘물에 대해 듣고 그것이 생명력에 관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그 샘물이 대전쟁으로 희생될 제물의 생명을 대신 채울 수 있을 정도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대비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기에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잿빛 하늘은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듯 어두웠고, 막을 수 없는 재앙처럼 천천히 강림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작게 읊조렸다.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 라⋯.”

“이제 그 사실을 깨달았나?”

그건 명백한 실책이었지만.

“아니, 벗어날 수 있소.”

알렌이 대비하기 이전부터,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린 이들이 존재했다.

“안 그렇소, 사도여?”

쿵-

알렌의 곁으로 거대한 골렘이 착지했다. 그의 곁에는 눈을 붕대로 감은 두 번째 선지자가 있었고, 그녀의 곁엔 고블린 하나가 기괴하게 미소지었다.

순환교를 책임지는 다섯 명의 사도가, 이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늦은 건 아니지, 응?”

느긋하고 쾌활한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 뒤로 몇 년간 잊고 있었던 목소리 역시 다시 등장했다.

“응, 안 늦었어.”

“마리아 카리타스.”

“마리아.”

백발과 맹한 분위기의 여인. 용사의 후예이자 아카데미 습격 때 사라졌던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수천 명의 전사와 함께.

알렌이 놀란 듯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마리아는 태연하게 알렌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불러줘.”

알렌은 쓰게 웃으며 원하는 대로 들어줬다.

“⋯그래, 마리아. 오랜만이다.”

“응. 나도 보고 싶었어.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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