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208화 (208/212)

제208화

팔강의 이름을 얻은 김우진의 행보는 가히 파괴적이었다.

그는 나스트론드 평야가 정화되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격이 조금씩 변했다.

평소의 인내심이 사라져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가 갈루아를 해치워 팔강에 오르려던 계획은, 본래 지금보다 후에 시도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김우진은 알렌의 활약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갈루아에게 도전해 무리하게 그녀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태양왕의 힘을 손에 넣은 그는 수십 번의 죽음을 딛고 그녀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남부에 잠들어있던 힘으로 남부를 지배하던 뱀신 갈루아를 죽인 일에 수많은 남부인이 분노했으나,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못 했다.

그녀를 보호하려던 부족들 모두 김우진을 따라다니던 광휘교에 의해 멸족을 피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그의 파괴적인 행보에 많은 이들이 울분을 삼키던 그때.

그들에게 비밀스럽게 접촉한 이들이 있었다.

“⋯남은 남부인들을 이끌고 있는 게 그라니.”

벤자민.

학기 초반에 김우진과 대련을 하며 커다란 부상을 입은 그를 알렌이 구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3년 전 지원군을 편성하기 전, 고향에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에 복귀하지 않고 남부에 머무르다, 그들을 이끄는 위치까지 올라간 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 벤자민과 같이 있는 것이 윌리엄의 여동생이라 주장하는 여인이라니.”

이런 운명의 장난이 다 있을까.

아칸더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여러 곳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정보들을 확인했다.

일단 남부의 일은 어느 정도 끝냈으니 이제 다른 곳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늘진 여왕과 약속했으니 그녀의 자리를 빼앗은 괘씸한 배신자들을 응징해야 했다.

음지에 자리해야 할 이들은 스콜 하나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는 그 사실보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알렌을 걱정했다.

“⋯신년 연회를 위해 영지로 돌아가셨다지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아칸더스가 파악한 바로는 알렌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모두 범상치 않았으니까.

그는 단지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알렌, 율리우스. 모두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예, 저도 형님도 팔강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수하에 팔강이 생긴 알렌 형님이 저보다 더 잘 지냈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김우진의 뼈가 실린 말에 알렌은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알렌은 잠시 고민했다.

‘더 그와 친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유적에서 한 번 부딪쳤고, 나스트론드 평야의 소유권을 위해 한 번 더 부딪쳤다. 거기다 크바지르의 말로 이미 끝이 머지않은 상황.

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그와 김우진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알렌은 할 수만 있다면 전력을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공자님.”

“왜, 검귀를 쓰러트리고 팔강으로 떠오른 린벨 양. 아니, 이제는 린벨 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그를 제외한 이들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분위기였다.

연회가 시작되었음에도 음악 하나 연주되지 않는 것이 그랬다. 알렌이 가만히 있더라도 김우진과 그의 아래에 있는 이들은 이미 알렌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침묵하고 있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터.

그렇다고 바로 부딪치기에는 아직 도시의 ‘준비’가 되지 않아 시기상조인데⋯.

아버지 가이엘 라인하르트는 다른 사람의 일인 듯 아무 표정 없이 이 모습을 바라보았고, 어머니 역시 개입할 생각 없는 듯 흥미로운 얼굴로 구경할 뿐이었다.

결국, 알렌이 나서려던 순간.

-쾅

연회장 문이 열리며 병사 하나가 구르듯 달려 나왔다.

그리고 얼어붙은 연회장의 분위기를 깨트릴, 소식을 전해왔다.

“마왕! 마왕이 소환되었습니다! 장소는 제국! 수도에 마왕이 소환되었고⋯ 현 황제 폐하가 마왕의 손에, 전사하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남은 전력을 이끌고 탈출 중이라고 합니다.”

* * *

알렌과 김우진의 갈등은 임시로 봉합해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단 대륙 팔강 전체와 대륙의 전군을 소집한 대륙 소환령에 응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남은 이들을 이끌고 움직이기 전날 밤, 가문의 비밀을 알기 위해 찾아간 집무실에서 가이엘은 단 한마디만을 알렌에게 남겼다.

“순환교의 첫 번째 선지자, 그를 먼저 찾아라. 그럼 모든 걸 알 수 있을 테니.”

그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기세로 말하자, 알렌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마왕을 토벌하고 이어질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 * *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알렌과 김우진은 성공적으로 마왕의 앞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을 제외한 이들은 유지르의 함정에 빠져 여러 곳으로 흩어진 지 오래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이들과 함께 마왕을 상대하는 것이 옳지만, 이렇게 시간만 끌다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알렌과 김우진은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함께 황성으로 들어갔고.

“이럴, 이럴 리가 없다! 분명 내가 역대 최강의 마왕이라고 그분이 그랬는데, 어찌⋯.”

마왕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다.

제국 제일 검을 죽이고, 그가 이끌던 기사단과 황제 그리고 수도의 수많은 시민까지 해치웠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마치, 이것이 본래 그의 힘인 것처럼.

그러나 알렌과 김우진 모두 성공적으로 마왕을 토벌했음에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서로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우진이었다.

“형님, 예전부터 정말 형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가? 나도 마찬가지인데.”

“서로 마음이 맞으니 저희도 좋은 형제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콰앙-!

“⋯저를 위해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김우진은 이 순간 알렌을 죽일 생각이었다.

마왕을 죽이고 얻는 명성은 그 혼자여도 충분하기에.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했다지만 원래 그들은 진작 부딪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알렌은 더는 그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기에.

“그렇다면 다행이다. 빙의자. 지금까지, 내 동생의 몸을 갖고 노느라 즐거웠나?”

마왕과 싸울 때부터 황성 곳곳에 박혀 있던 실타래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거대한 새장이 되기 시작한다.

“⋯뭣?”

“이제 준비는 되었다. 어차피 네 역할도 여기까지겠지. 그러니.”

알렌은 느긋하게, 무언가를 기다리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묵직한 한마디를 흘렸다.

“이만 돌려줘야겠다.”

“지랄하지마!”

“내 동생의 몸을.”

마왕이 죽은 자리에서, 드디어 마지막 계획의 서막이 올랐다.

* * *

“지금이면 시작되었을까요?”

카트린느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결사대가 향한 황성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던가.

연인의 몸을 빼앗은 괴물에게 웃음을 팔며, 호감을 보이고, 사랑받으려 애쓰며. 그 끔찍한 시간을 왜 감내해왔던가.

“어, 카트린느 더 안 쉬어도 돼요?”

아이린은 개인 막사로 다가오는 카트린느를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헬레나 님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분명 쉬러 왔다고 들었는⋯.”

푸욱-

“⋯언, 니?”

“미안해, 아이린.”

시퍼런 칼날이 아이린의 몸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이린 너는 친하게 지냈었는데.”

푸욱- 푸욱-

평소처럼 산뜻하고 다정한 말투로 말하고 있음에도 손놀림은 기계처럼 일정했다. 마치,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벌이리라 생각한 것처럼.

“하지만 용서해 줄래? 일어나면 다 설명해 줄 테니까.”

털썩-

아이린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으나, 끝내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힘을 잃었다.

“아이린 언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

멈칫-

그때, 순진한 얼굴로 막사를 열어젖힌 아냐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그녀는 피투성이로 변한 아이린과 단도를 든 카트린느를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트린느 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런.”

되도록이면 빠르게 일을 끝내려 했는데, 조용히 끝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배신, 배신이다! 율리우스 라인하르트가 배신을 했다!”

“아니다! 알렌 라인하르트가 마족과 손을 잡았다! 얼른 잡아라!”

“당장 죽여라! 우리 부족을 멸망시킨 놈들이다!”

그래도, 대세에는 영향이 가지 않을 터.

아냐도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이려고 했다. 허나,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

탁-

“무⋯.”

털썩-

그녀의 뒤로 복잡한 얼굴을 한 여기사, 카밀라 카터가 쓰러지려는 아냐의 몸을 붙잡았다.

“늦었어요. 카밀라.”

“하지만⋯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된다는 듯 말을 고르더니, 이내 굳은 얼굴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한 선택이 부디 틀리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카밀라 카터.

그녀는 율리우스의 모순적인 행동과 나날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에 결국 아칸더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를 배신했다.

오직 정의를 위해.

카밀라가 아냐의 몸을 받쳐 들던 때, 카트린느의 뒤로 기사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판, 그녀에게 엘릭서를 먹이고 아칸더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세요.”

“알겠습니다.”

카밀라는 안타까운 눈으로 판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수습기사, 판.

제일 먼저 율리우스의 추종자가 되었다가 버려진 남자. 그의 존재가 바로 카밀라가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들이 모두 막사를 나서자,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혈 향이 짙게 풍겨왔다.

마왕과의 전투가 어떻게 끝났는지 알지 못했음에도 인간은 인간끼리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모습을 카트린느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랑을 위해 행동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율리우스와 다시 만나더라도, 이어지기는 힘들겠지.”

진짜 율리우스는 이런 행동을 용납할 리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표정을 지우고 막사를 나섰다. 이미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이 행동을 싫어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가문은 이런 가문이었으니까.

카트린느가 속해 있는 노블리에 가문의 어원은 '누 므블리에 파(nəmublijepɑ)’.

고대어로 어리석은 사랑을 뜻했다.

* * *

아칸더스는 일을 벌이기 시작한 이들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한마디 읊조렸다.

“모든 스콜의 일원들에게 전한다. 이제, ‘진짜’ 전쟁을 시작한다고.”

율리우스와 알렌이 전투를 시작하고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목격한 그 순간, 남은 결사대의 일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상대와 검을 맞대고 마력을 끌어올린 이때.

“그럼, 그늘진 여왕님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 걱정할 필요, 없단다?”

어둠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 순간을 계획하고 기다렸던 이들이 행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툼에서 한 발 떨어진 곳.

“성자를 공격하려는 놈들을 죽여라! 모두 이단이다!”

“아니다! 저들이 이단이다! 이 신성력이 보이지 않느냐!”

“순환교 따위가 신성력? 이단이다, 이단이야!”

엘리자는 다른 마족과의 전투도 내버리고 벌게진 얼굴로 공격하는 광휘교를 보았다.

“역시 ‘위쪽’에서 직접 다루는 말이라 그런가? 참 저들도 안타깝네.”

광휘교가 순식간에 전장에서 순환교의 뒤통수를 쳤음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려왔기도 했고.

“그럼, 린벨? 부탁하마.”

“네.”

“모두, 해치워줄래?”

이 순간만을 위해 준비된, 신성력을 각성한 성녀가 있었으니.

이미 사라진 용사의 후예 마리아 카리타스가 나타나지 않는 한, 그녀가 패배할 일은 절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