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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206화 (206/212)

제206화

“잿빛 재앙이라⋯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걸 묻는구나. 그래, 그게 제일 궁금하겠지.”

그는 알렌의 물음을 음미하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해서, 자기 보호 본능이자 발악일세.”

“자기 보호 본능이자 발악이라⋯?”

알렌은 잠시 고민했으나 도저히 그가 말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슷하나 서로 다른 뜻의 단어가 재앙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알렌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무엇의?”

그러나 이름 없는 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재로 덮인 하늘과 생명 하나 느껴지지 않는 황무지. 보이는 건 하늘을 꿰뚫을 듯 거대하게 자라난 하나의 물푸레나무뿐.

이름 없는 자는 원근감을 흐리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검은 신과 하얀 신, 그들이 왜 직접 나서지 않는지에 대해서.”

“그건⋯ 그렇지.”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이기는 했다.

검은 신과 하얀 신은 왜 직접 나서지 않는가?

그들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 보인 힘 일부만으로도 세상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행운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켜 세계의 사랑을 받게 만들고, 주변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 부자연스러운 호감과 호의를 가지게 한다.

그들의 아래에 있는 제3세력은 나라와 인종을 초월한 범국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알렌 제 몸에 강림한 잠시의 시간만으로 그를 몰아붙이던 하이젤을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다.

그런 이들이 왜, 나서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조악하게나마 이유를 덧붙여보자면 그들이 현세에 개입하는 데 어떤 조건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대적자를 만들 이유는 되지 않지.’

대적자를 만드는 이유가 그들의 몸을 빼앗아 강림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맞지 않는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뺏으면 될 일이지, 힘들게 대적자라는 운명을 부여해가며 키울 이유가 없으니까. 검은 신도 마지막에 방심했다가 하이젤에게 한 방 먹었지 않은가?

제게 피해가 올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키워야 한다면⋯.

“잿빛 재앙은, 검은 신과 하얀 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아니다, 이렇게 결론 내리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알렌의 머리에서 불현듯 하나의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생존본능.”

그래, 그게 핵심이다.

방금 이름 없는 자는 잿빛 재앙이 발악이자 생존본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전제를 뒤집어서, 잿빛 재앙이 그들이 일으킨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적대하고 있는 존재가 일으킨 거라면?

아니, 생존본능이라 했으니 적대한다는 말은 조금 다르다.

알렌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스쳐 지나갔던, 그저 마음속에 쌓아 두기만 했던 여러 의문이 하나씩 조합되기 시작되었다. 그건 이윽고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잿빛 재앙은 문명의 찬란함이 끝에 달하면 일어난다.”

처음 잿빛 재앙에 알게 된 건 마탑 도시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란델은 십 년간 뒷배경이 없는 젊은 기재들을 소리소문없이 해치웠다. 알렌이 그를 죽인 이유도 율리우스의 서클을 박살 내고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의 뒷면에는 변명일 뿐이긴 하지만 잿빛 재앙을 막는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신빙성도 없는 궤변이었기에 무시했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아니, 전제가 잘못되었다.

분리해야 했다.

알렌의 눈이 총명하게 반짝였다.

그는 자신을 조용히 지켜보는 이름 없는 자에게 입을 열었다.

“관리자, 내 추측이 옳은지 아닌지 검증해줄 수 있겠나?”

“물론, 얼마든지 들어주겠네. 말해 보게.”

알렌은 잠시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연결된 단서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명이, 고대 제국과 용과 거인의 시대를 멸망시킨 건 결과적으로 잿빛 재앙 때문이지. 하지만, 멸망의 ‘원인’이 되지는 못하지. 맞나?”

“더 말해 보게.”

이름 없는 자는 부정하지 않고 그저 경청할 뿐이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알렌은 그의 담백한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으니.

“지금까지 다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모두 시대를 멸망시킨 잿빛 재앙에만 집중할 뿐, 그 전에 ‘왜’ 그렇게 됐는지 주목하지 않았지.”

알렌조차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잿빛 재앙이 오기 전까지 그저 그에 대비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명이 발전했기에 잿빛 재앙이 나타난 게 아니다. 잿빛 재앙이 나타나기 전까진 문명이 찬란하기만 했는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가.

“아니지, 잿빛 재앙이 문명을 멸망시켰다고 하지만 정말로 문명을 멸망시킨 건 따로 있었지. 그렇지 않나?”

“그래.”

그의 물음에 이름 없는 자가 옅게 웃으며 긍정했다.

“대전쟁.”

용과 거인의 시대 때 거인들도 문명의 찬란함을 누리다 멸망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알렌은 알았다.

꿈으로도 직접 보지 않았는가. 용과 거인의 시대를 끝장낸 건 잿빛 재앙이지만, 그 원인이 된 건 용과 거인의 전쟁이었다는 것을.

검은 신과 하얀 신에 대항하는 거인과 초월자의 아래로 들어가는 선택을 한 용.

고대 제국 역시 잿빛 재앙으로 고대 제국의 시대가 저물었으나, 잿빛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마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만신창이에 가까웠지.

“재앙으로 인해 멸망했다는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 실상은 잿빛 재앙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시대는 저물었겠지.”

잿빛 재앙은 그 시간을 조금 더 앞당긴 것뿐이다.

“잿빛 재앙은 시대가 발전하며 찬란해지는 시기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 그냥 전쟁이 아닌 세계 전체를 피로 물들 만큼 대전쟁이 일어나 많은 이들이 죽으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잿빛 재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 불러오는 것은 검은 신과 하얀 신이다.”

용과 거인을 분열시킨 것도 검은 신과 하얀 신이었고, 고대 제국 시대의 멸망을 초래한 마족과의 전쟁도 실상은 검은 신과 하얀 신이 뒤에서 부추긴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들의 대적자를 성장시키기 위해, 그와 동시에 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제물 삼아 잿빛 재앙을 불러오기 위함이겠고.

‘⋯많은 이들이 죽는 것이 왜 잿빛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 이유도 머지않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이 맞나?”

짝. 짝. 짝.

연기처럼 일렁이는 이름 없는 자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오른 것 같았다. 그는 겉보기에 매우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내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진실에 도달했겠군.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겠지?”

“잿빛 재앙이 무언가의 발악이라는 건 짐작하겠지만⋯ 그 이상은 모르겠군.”

많은 이들의 죽음을 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으로 추측할 만한 게 없지는 않았으나, 이 이상은 증거 하나 없는 공상에 불과했다.

알렌이 고개를 흔들며 답하자, 그는 그 대답으로도 괜찮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은 잊혀 이름도 남기지 못한 현자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었네. 모든 생물은 태어날 권리가 있다고.”

알렌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천천히 경청했다.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의 끝에 진실을 알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곧 태어날 아이는 지성이 없다고 하나, 만약 지성이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아이는 없겠지. 그렇듯 모든 생물은 삶을 갈구하기 마련이네. 그게 괴물이든 평범한 인간이든 말이지. 그렇다면 말이야 자네에게 묻겠네.”

획-

그가 손을 한 번 휘젓자 주변의 풍경이 검은 밤하늘로 변했다.

“자네가 알 속의 새라면 태어나기 위해 무엇을 하겠나?”

“⋯알을 깨기 위해 노력하겠지.”

“만약 그걸 막는 존재가 있다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알을 깨려고 노력할 것 같군.”

“그렇게 했음에도 그걸 막으려 한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자네는 알 속의 존재에 불과하네. 알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대처할 수 없지. 오히려 그들은 알 속의 영양분 가득한 양수도 빼앗아가고 있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을 건가?”

이건 순 억지에 불과하지 않은가.

잿빛 그림자에 불과한 그의 얼굴에 짓궂은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 알려주려 한다는 것은 명확했다. 알렌은 그가 질문한 저의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고 싶지 않으니 어떻게든 발악을⋯.”

자연스럽게 입이 닫혔다. 발악. 자기보호 본능. 알 속의 존재. 알. 잿빛 재앙. 양수를 빼앗긴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는 것이 조건.

머릿속에서 지금껏 한 이야기가 뒤섞였다.

“이해했나?”

알렌은 그의 답을 기다리듯 질문을 던진 이름 없는 자를 보며 비약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잿빛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다? 아니, 잿빛 재앙은 발악에 불과하고 검은 신과 하얀 신의 목적은 잿빛 재앙⋯ 아니, 회색 신의 힘을 빼앗는 건가?”

태아의 양수를 빼앗는다는 아까의 비유가 맞다면 시대를 반복시키며 멸망으로 이끄는 행위 자체가 회색 신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해서일 터다.

“⋯대적자의 존재가치는 그런 회색 신의 힘을 소모시키는 수단일 뿐이고?”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검은 신과 하얀 신이 직접 강림하지 않는 이유로는 부족하지 않나?”

이 모든 이유를 합쳐도 그들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 비합리성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간접적인 힘만으로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진짜 힘은 엄청날 텐데.

“아니, 설마⋯.”

알렌은 순간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추측에 입을 닫았으나, 이름 없는 자는 알렌이 추측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없이 주변의 풍경을 바꿨다.

검은 밤하늘과 그 뒤로 끝없이 이어진 성운(星雲)의 바다.

그 우주의 한 가운데에.

방금 전까지 보았던 물푸레나무의 뿌리가 박힌 거대한 알이 있었다.

“이 세계는, 거대한 알의 껍데기 위에 세워진 모래성에 불과하다네. 만약 두 초월자가 강림해서 알껍데기가 깨어지면 어떻겠나?”

물푸레나무의 몸통 위로 사람의 핏줄처럼 잿빛의 줄기가 맥동 쳤다.

“세계가 끝장나는 건 물론, 알 속에 갇혀 있던 ‘그’가 깨어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들과 싸우게 되겠지. 두 초월자는 이길 확신이 없기에 이런 조심성을 발휘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가지에는 수십, 수백 개를 넘어 수천 개의 썩은 열매가 매달려 있었고, 그나마 가장 높은 짙푸른 가지에 매달린 멀쩡한 열매가 하나 보였다.

“⋯⋯.”

“알 속에 갇혀 태어나지 못하는 창조주와 그 존재조차도 모르는 인류. 그리고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시대를 멸망시키며 힘을 소모하게 하는 초월자와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한 창조주.”

‘아직’은 멀쩡한 열매가.

“그게 진실의 전부라네.”

그의 목소리는 유감스럽다기에는 지나치게 담백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 속에 담긴 처절한 절망과 좌절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고 멸망할 것이 확정된 세상.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게 현 인류의 주소지.”

그건, 제법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러니 다시 인사하겠네.”

이름 없는 자는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알렌에게 뒤돌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 이름은 크바지르(Kwasir). 수 없이 멸망을 겪고 저항한 이들의 사념(思念)이 합쳐진 존재이자 회색 신의 유일한 소통구인 세계수의 관리자라네. 수천 년 만에 나타난 희망이자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이레귤러에게 인사 올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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