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베스틀라.”
알렌의 부름에 그녀는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답했다.
「저는 알아서 제 몸을 찾아볼게요. 지금 살짝 긴가민가한 느낌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알아서 할 테니까 알렌도 할 일 해요. 지금 급한 건 알렌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공동을 나서기 전 볼룬드가 한 말을 차치하더라도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이렇게 율리우스가 찾아온 것도 검은 신과 하얀 신의 뜻이 없다 할 수 없을 테니까.
서두르지 않다가는 지혜의 샘물을 그에게 빼앗기는 일까지 벌어질 수 있었다. 그만큼 하얀 신과 검은 신의 힘은 가늠하기 힘들었다.
‘말 그대로 온 세상이 율리우스의 행동을 지지해줄 테니.’
상태창이나 검은 책, 하얀 책과 같은 수단이 있어야만 조종할 수 있다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고작 그것만으로 다른 이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주변 인물과 환경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물론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에 제3세력을 아래에 두고 있는 거겠지만.
‘운명을 조종한다, 라.’
알렌은 손가락 마디 사이로 감긴 실타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능한가?’
운명 마법의 발전이 멈춘 지는 꽤 되었다.
알렌이 새로운 계통 마법을 열었다고 한들, 그걸 계속 발전시키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마탑 역시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수많은 천재와 기재들의 노력 덕에 발전했다.
그러나 알렌은 달랐다.
운명 마법 계통을 연 이는 알렌밖에 없어 다른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또 신역의 각성과 세 운명 마법은 지금까지 제게 많은 도움을 줬지만, 그 이후로 운명 마법의 성취는 매우 더뎠고.
3년간 얻은 마법의 성취라고는, 공간 마법을 한층 발전시켜 블링크에 대한 감을 잡은 것뿐이었으니.
그를 제외한다면 알렌의 전투력은 3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하긴, 이게 당연한 결과겠지.’
알렌이 지금껏 막힘없이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하얀 신과 검은 신의 가호 덕분이었다. 하이젤 덕분에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바면 그 탓에 알렌의 발전 역시 지지부진한 상태.
그러나.
‘조금의 영감만 더해진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벽을 넘기 위한 단서는 회귀 전부터 쥐고 있었다. 운명을 농락하는 모습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던가.
‘검은 신과 하얀 신에 의해 행동이 변하는 것도 몇 번이고 보았지.’
그 모든 것은 알렌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상태였다.
그러나 쪼개진 단서와 찰나의 영감을 이어줄 실마리가 없어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을 뿐이었지.
만약 지혜의 샘이 이 상태를 해결해 줄 열쇠가 되어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그럼, 먼저 갈게요. 나중에 봐요. 알렌.」
퐁당-
베스틀라는 그 말을 끝으로 획 날아올라 샘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샘 깊은 곳으로 사라지며 작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알렌은 기대감을 갈무리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사실, 그것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무릎을 꿇고 안쪽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샘을 봤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비처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겠지. 그건 어떤 쓰임새가 있을까.
알렌은 피식 웃으며 샘물을 떴다.
“⋯지혜의 샘이라.”
이곳에는 있을까.
율리우스를 되찾을 방법이.
“있으면 좋겠군.”
망설임은 없었고, 주저함도 없었다.
맑은 샘물은 목구멍을 타고 순식간에 넘어갔다.
샘물의 맛은 짙은 술 향과 달리 청아하고 시원했다. 벌꿀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맛. 샘물을 삼키기 무섭게 온몸의 힘이 빠지며 샘물로 몸이 빠져들었다.
‘이런 게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풍덩-
그리고, 알렌의 의식 역시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알렌은 불현듯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즉시 감지력을 흩뿌림과 동시에 용의 감각을 키웠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따스했다. 혹시 모를 독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들리는 것 역시 없었다.
당장의 위협이 없다는 걸 깨달은 알렌은 그럼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보인 풍경에 잠시나마 말을 잃었다.
“여기는⋯⋯ 가문, 인가?”
그만큼, 뜻밖의 광경이었으니까.
희미한 서책의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다. 등을 받치는 의자의 푹신함과 책상의 단단한 감촉을 뒤늦게 눈치챘다.
이곳은 알렌의 서재였다.
라인하르트 가문을 떠난 후, 한 번도 들르지 않은.
고개를 돌리니 서창 밖으로 부드러운 햇살이 고개를 드리웠다. 잠시간 주위를 살핀 알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이곳에 대해 조사하려던 순간, 방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알렌의 몸이 굳었다.
“⋯요즘 둘째 공자님이⋯⋯.”
하녀의 목소리.
정확히 누구라 꼬집을 수는 없었으나 분명 라인하르트 가문에 있는 하녀들의 목소리였다.
알렌은 순간 이곳에 온 목적도 잊고 홀린 듯이 방문을 열었다.
덜컥-
“듣기로 방탕함이 더 심해지셨다는데. 어렸을 때랑 비교하면⋯.”
“불쌍도 하시지. 그래도 영지는 첫째 공자님이 물려받으실 테니⋯.”
복도에서 하녀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복도 끝에서 울리듯 남아있을 뿐.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런 의문은 잠시 뒤로 미뤘다.
감지력을 사용했음에도 하녀들의 위치가 파악이 안 되는 것도, 용의 감각으로도 그들의 발소리 하나 듣지 못한 것도 상관없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이곳은 미미르의 샘 내부다. 알렌은 그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는 일은 있는 법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당장이라도 이곳에 쳐들어올 김우진의 위협과 유적을 뒤흔들던 볼토른의 전투는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알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망나니들에 비하면 율리우스 님은 조금 낫지.”
“그래, 마을 처녀들을 희롱하지 않는 게 어디야? 내가 듣기로 초야권을 휘두르는 미친놈도⋯.”
그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배경 삼아 묵묵히 목적지까지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목적지는 알렌에게도 조금 낯설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후에도 걸음 하지 않은 지 오래된 장소였다.
방의 명패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명패를 달지 않아도 이곳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이는 저택에 없었다.
망나니 둘째 공자.
율리우스 라인하르트의 방이었으니.
알렌은 무의식적으로 방 내부를 확인하려는 감지력을 멈췄다. 용의 감각마저 흩트리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여기서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두려움인가, 일말의 기대감인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떨쳐 낸 알렌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여태껏 방문 열린 적이 별로 없다는 듯 경첩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마음이 급해진 걸까. 알렌은 강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보인 뒷모습에 시간이 멈췄다.
라인하르트 특유의 푸른 머리칼.
뒤돌아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뒷모습만으로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모를 수 없었다. 누구인지 확인한 알렌의 몸이 굳었다.
문이 열리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일까, 뒤돌아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음⋯? 누가 찾아왔⋯ 아.”
장난스러운 얼굴.
평소처럼 술을 마시지 않은, 마치 어렸을 적 모습의 그가 입을 열었다.
“형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율리우스.”
“또 아버지가 뭐라고 하십니까? 오랜만에 술도 안 마셨는데 참⋯ 아니, 일단 거기서 그러지 말고 들어오시지요.”
바깥의 김우진과는 다른, 진짜 율리우스가 알렌을 맞이했다.
* * *
“아버지도 정말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술 그따위 몇 통을 비워도 푼돈일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형님에게 선물할 좋은 지팡이까지 구한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
“아, 물론 그렇다고 형님에게 뭐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방탕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모두 형님 덕 아닙니까?”
“⋯⋯.”
“제가 이따위, 이 꼴이 된 데에 형님의 탓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어린 시절의 제가 불운했을 뿐이지. 그러니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아 물론 지금처럼 매달 주시는 용돈의 양을 늘려⋯⋯.”
나른한 눈매와 말 속에 숨겨진 비틀린 분노.
제가 이렇게 변한 것에 대한, 망나니로 불리는 것에 대한 분노와 자기혐오.
알렌에 대한 분노를 토해내는가 싶으면 다시 집어삼켜 그저 비꼬는 게 전부인 동생.
오랜만에 마주하는 듯한 율리우스는 알렌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비록 잊고 있었으나, 옛날의 착했던 모습이 아닌 지금의 모습도 율리우스의 한 단면이었다.
매일 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리지만, 정말 망나니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던 율리우스.
‘율리우스도 무언가 숨기는 게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저 제 동생이기에 그러길 바랐을 뿐인가.
회귀 전 몰랐던 것들을 지금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사치를 부리는 척 연회장을 나돌던 것이 외가의 인맥으로 율리우스를 되찾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도.
무심했던 아버지는 물밑에서 제3세력과 거래하며 무언가를 꾸몄다는 사실도.
그저 건강할 뿐이라 여겼던 총집사는 암왕이었고, 영지에 있기에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영지 마법사는 제3세력의 안배였던 프란시스카 양과 연관 있었다.
그렇기에 율리우스도 무언가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마주 봐도 여전히 모르겠다. 정말 기우일 뿐인가. 그게 아니면⋯.
“율리우스.”
율리우스는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알렌에게 의아한 얼굴을 했다.
“형님? 왜 말이 없으십니까.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대화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제 그만하지.”
“예? 그만하다니 무슨⋯ 아, 뒤에 약속이 있으십니까?”
알렌은 무심히 그를 바라봤다. 율리우스는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이런 자리를 종종 갖는 것도 괜찮을 것 같⋯.”
“이제 됐으니 제대로 대화하자는 거다.”
“그게 무⋯.”
“율리우스.”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동요했던 알렌은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 미미스브룬느의 진짜 관리자라고 해야 할까.”
“⋯형님?”
알렌은 진절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율리우스 행세를 하는 건 밖의 빙의자로 족했다.
“추억을 되새기게 해준 것의 감사로 멋대로 기억을 뒤진 건 넘어가 줄 테니, 제대로 대화를 하자는 거다.”
율리우스는, 그는 알렌의 ‘기억’과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
표정과 몸짓 그리고 말투와 그에 담긴 감정까지. 으레 사람이라면 보일 조금의 의외성 없는 모습에, 알렌은 그가 진짜 율리우스가 아니리라 확신했다.
‘아니, 그건 문을 연 순간부터 알았지.’
단지, 정말 그리웠던 그의 모습을 보고자 지금껏 경청하고 있었을 뿐.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과거의 기억만 추억하고자 한다면 이곳에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을 테니까.
“⋯⋯과연, 이번 대의 대적자는 특별하구나.”
볼룬드가 말했던 ‘그’이자 미미스브룬느의 관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중얼거렸다.
“전대 용사와 거인이 며칠 헤맸던 것과 달리 십 분 만에 정신을 차리다니, 신기록이야.”
거기까지 중얼거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래, 자격을 갖춘 자가 진실을 마주하길 원한다니 들어줘야겠지.”
여전히 율리우스의 모습으로 말한 그는, 아직까지 자신을 냉정히 응시하는 알렌에게 물음을 던졌다.
“혹시 준비한 것이 부족했는가? 그대가 가장 원하는 진짜 동생이 나타났으니 다른 사소한 위화감쯤은 무시해도 됐을 텐데?”
“진짜 원하는 동생이라.”
알렌은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진짜 원하는 동생, 그게 누구인가? 망나니 율리우스? 아니면 제바람대로 비밀을 숨긴 율리우스? 그것도 아니면 어릴 적 착한 율리우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직접 찾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자신이 직접 구한 율리우스, 그가 아닌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찾은 율리우스라면 그게 누구이든 받아들일 테니까.”
진짜 망나니든, 비밀이 있든, 어릴 적의 동생이든.
이건 그 선언이었다.
애초에 동생이 어떻게 변하든 받아 주는 게 가족이자, 형 아니던가?
“이걸로 대답은 충분한가?”
율리우스의 모습을 한 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알렌의 대답을 듣더니 옅은 미소를 매달고는 말했다.
“충분하다.”
“그럼 대화를⋯.”
“그대, 지혜를 구할 자격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 시야가, 겉으로 보이는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푸레나무?’
갑작스레 변한 장소를 살펴보기도 잠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알렌 라인하르트, 이번 대의 대적자이자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아이야.”
잿빛 하늘과 황폐해진 지상.
그리고 그 아래에 거대한 뿌리를 박은 거대한 나무 아래서, 제대로 형상을 알아볼 수 업는 잿빛의 인형이 팔을 활짝 벌렸다.
“세계수 위그드라실(Yggdrasill)의 관리자, 이름 없는 자가 지금껏 왔었던 모든 대적자를 대신해 환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