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오랜⋯.」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듯 메마른 목소리.
「참으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거대한 궁전의 가장 깊숙한 공간.
고대에는 휘황찬란한 장식과 수많은 이들로 가득 찼을 그곳은 수없이 흐른 시간 아래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몸에 맞춰 만들어진 단 하나밖에 없는 옥좌, 그 위에 앉은 거인들의 왕.
악한 손.
다른 이름으로는 볼토른.
그리고 추정하기를 베스틀라의 아버지.
「오랜 기다림이었지⋯.」
그가 수만 년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내 소중한 보물의 동반자여.」
벽화에서 처음 그 이름을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족히 몇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예, 정말 그렇습니다.”
알렌은 잠시 무슨 말을 할지 고민되었다. 그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비단 베스틀라의 비밀뿐만 아니라 고대의 진실, 하얀 신과 검은 신의 최종 목표.
회색 재앙의 정체가 진정 무엇인지와 자신을 불러낸 목적까지.
그러나 알렌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궁금증을 애써 집어삼켰다. 제일 먼저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질문의 답을 먼저 하자면.”
볼룬드는 대화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알렌은 질문을 한 볼룬드가 아닌 볼토른을 응시했다.
“베스틀라는 처음부터 제 여정에 함께한 동반자이자 같은 목적을 가진 믿음직한 동료고, 전장을 함께하는 전우이자 반드시 도와야 하는 친우입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동반자이자 동료, 전우이자 친우라⋯. 정석적이야.」
볼토른은 알렌의 답을 곱씹듯 음미하더니 평가를 내렸다.
「그렇기에 이상적이군. 뭐, 좋다. 너희의 관계에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니. 그러니, 말하라.」
쿵-
한순간 알렌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가 무엇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발 구름. 몸을 일으키기 위해 움직인 것 하나만으로 엄청난 위압감이 공동을 뒤덮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겠지? 거짓된 이들이 심한 훼방을 놓았으니 정보를 모으기도 쉽지 않았겠군.」
그가 천천히 알렌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릎이 구부러진다. 머리가 아래로 향하자, 마치 위에서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볼토른은 알렌의 상태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단 하나.」
고대, 검은 신, 하얀 신과 맞서 싸우던 괴물.
비록 패배했으나 목숨을 겨우 부지해 역전을 꿈꾸는 신화의 패자(霸者).
그의 앞에서 알렌은 더해지는 위압감에 쓰러지지 않게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곳까지 무사히 온 공을 사, 어떤 질문이든 처음의 하나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든 답해주마.」
쿵- 쿵- 쿵-
가까이 다가올수록 크기가 더욱 실감이 갔다.
어마어마하다. 떨어진 알렌의 시선으로도 그의 모습을 다 담을 수는 없었다. 과거에 왕이나 거인의 신으로 숭배받았단 것을 증명하듯 볼토른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넘쳤다.
「그 대신, 더 많은 답을 얻고 싶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무, 슨. 대가를⋯.”
「무엇이 있겠는가?」
그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아니 처음부터 알렌의 허리춤을 향해 있었다.
베스틀라.
볼토른은 왕좌에서 자신의 앞에 오기까지 한 번도 시선을 돌린 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베스틀라를 빼앗지 않은 것은 여기까지 온 알렌에 대한 일말의 배려일지 모른다.
어쩌면 질문할 기회를 준 것만으로 할 일은 다 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이것도 또 다른 계획의 일부인가.
어쩌면 그의 계획에서 알렌의 역할은 베스틀라를 찾아와 데려오는 것 아니었을까.
신에 가까운, 아니 진짜 신으로 숭배받았던 초월자의 생각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오만하기 짝이 없었으나….
‘하지만.’
으득-
알렌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었다. 단순 기세만으로도 누가 위인지 분간이 갔다. 알렌 역시 3년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그러나, 그가 거인이라면 자신도 거인이었다.
이 정도쯤은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 다면.”
한마디 한마디 말을 토해낼 때마다 압박감이 강해졌다. 마치 얼른 질문을 하고 베스틀라를 내놓으라는 것처럼.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 겠습니다. 그러니, 답, 이것에 대한⋯ 답을 주십시오.”
자신을 내려다보는 볼토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어둠에 잠겨 있었기에. 석문의 틈 사이로 들어온 빛은 위쪽까지 닿지 않았다.
「무엇을?」
당연히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에 올 때부터 제가 가졌던 목적은 고대의 비밀도, 검은 신과 하얀 신의 목적도 아닌 베스틀라를 깨우는 것이었으니까.
다음에, 직접 보고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베스틀라를.”
알렌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거칠게 박동했다.
상당히 옅은 빛이었으나 알렌의 말이 이어질수록, 감정이 거세게 요동칠수록 밝기를 더해 갔다.
“베스틀라를 깨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그녀를 깨울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할 질문은 그게 전부입니다.”
알렌의 눈이 밝게 빛났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베스틀라를 깨울 방법만 알려주십시오. 그것만 알려주신다면 얌전히 떠나겠습니다.”
어느새 알렌의 손에는 베스틀라가 들려 있었다.
여차하면 전투라도 불사하겠다는 태도. 그 모습을 고요히 응시하던 볼토른은 담담히 말했다.
「한없이 당당한 태도. 이성적이기에 현실을 바라보지만, 희망을 놓지 않는군. 외골수적인 면이 있으나 그 단점은 신중함으로 메꿨나⋯. 좋다. 그게 그대의 답이라면.」
볼토른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알렌은 몸을 긴장시켰다.
상대는 신화시대의 주역이자 검은 신과 하얀 신에게 반역의 깃발을 내걸었던 자다.
본신의 실력을 따지자면 당연히 질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눈뜨고 베스틀라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대사막을 정화한다는 계획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일촉즉발 전의 고요가 찾아왔을 즈음.
「흐, 베스틀라. 아직도 그러고 있을 것이냐?」
볼토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계속 침묵하고 있을 거냐?」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알렌의 시선이 손에 쥔 베스틀라에게 향했다. 그리고 조금은 그리웠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어⋯. 알렌. 오랜만이에요?」
순간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왜 침묵하고 있었는지, 언제 깨어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하지만 알렌은 그 모든 말을 접어두고 그저 피식 웃었다.
할 말이 있다면 이 말이 먼저였다.
“그래, 다시 만나서 반갑군.”
* * *
베스틀라는 알렌의 생각처럼 오래전에 깨어났다거나 침묵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변명처럼 보이는 건 아는데 저도 놀랐다니까요? 깨어나고 처음 본 장면이 알렌이랑 아버지⋯ 왕께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니⋯.」
“그래서,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보고 있었다는 건가?”
「말하자면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계속 조용히 있을 생각은 아니었달까⋯?」
“하아.”
「물론, 싸우기 전에 끼어들려는 생각은 있었다니까요? 그냥 알렌이 무슨 행동을 할까, 조금 궁금해서⋯ 에헤헤.」
알렌은 헤픈 웃음을 흘리는 베스틀라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베스틀라는 깨어났다. 정확히는 대전에 들어오기 전에는 비몽사몽 하다 석문을 연 직후부터 완전히 깨어났다고 해야 하나.
베스틀라를 깨우기 위해 대사막으로 들어온 알렌의 선택은 정확했다는 의미였다.
‘⋯이럴 때면 푼수 같은 모습보다 전의 모습이 그립군.’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베스틀라 나름대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시간도 필요했을 테고, 그녀 입장에서 볼토른은 아버지이긴 하지만 자신을 검에 봉인한 당사자였을 테니.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부녀이기에 어색함도 한몫하지 않았겠나.
생각을 정리한 알렌은 붉은 기운을 가라앉히며 이지(理智)가 깃든 눈으로 볼토른을 바라봤다.
알렌을 압박하던 힘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베스틀라와 알렌이 대화하는 걸 묵묵히 지켜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베스틀라.」
그의 부름에 베스틀라는 잠시 침묵하더니 평소와 답지 않은 냉랭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부르십니까, 왕이시여.」
방금 알렌과 대화했던 푼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변화.
알렌은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짐작이 갔다.
‘꿈에서 본 대로라면⋯ 그럴 만한가.’
볼토른은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었고, 그걸 위해서 베스틀라를 속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대의 대적자 역할을 맡았던 베스틀라를 배제하고 계획을 진행했다고 해야 할까.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베스틀라를 위해 실행한 계획이라지만….
‘잃은 게 너무 크지.’
그녀는 볼토른의 계획 덕에 대적자의 굴레를 피해 살 수 있었다.
허나 그게 그녀 입장에서 축복일까?
그녀를 제외한 동족 대부분이 전사했고, 원래라면 그중에서 제일 월등한 무력을 자랑했을 베스틀라는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한 채 검에 갇혔다.
그리고 알렌이 꺼내 주기 전까지 그 어두컴컴한 유적의 지하에 봉인되어 있었지.
동족과 용의 유해와 함께 수천 년이란 시간을 족히.
그곳에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용에 대한 분노?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
본인이 아니기에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행동은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자식인 느낄 감정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난폭한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알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뭐라 말할 처지가 아니었군.’
라인하르트 가문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가이엘, 자신의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빠르면 1년, 늦어도 2년 안에 모든 걸 끝낼 생각이었으니.
그렇게 알렌이 재차 다짐할 무렵, 볼토른과 베스틀라 사이의 침묵도 베스틀라가 먼저 입을 엶으로 깨졌다.
「⋯저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너를 이해한다.」
「아니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요툰의 공주이자 신의 자식인 저는 그곳에서 죽었어야 했습니다. 도망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저를 이해한다면 도대체 왜⋯!」
「그랬다면 필시 죽었을 것이다.」
「목숨을 부지했다 한들 모든 걸 잃는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때로는 목숨이 전부일 수 있지.」
지금의 볼토른은 거인족의 신이자 왕이 아닌 한 명의 아버지였다.
다시 대전에 침묵이 찾아들었을 무렵, 공동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쿠구궁-
「시간이 다 되었나⋯.」
볼토른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으며 한 명의 아버지에서 다시 거인족의 왕, 악한 손이 되었다.
그가 볼룬드를 향해 소리쳤다.
「오랜만에 만난 딸과 해우를 푸는 것도 좋겠지만 더는 안 되겠군. 볼룬드!」
「예, 준비 다 끝냈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볼룬드는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미리 준비를 끝내놓은 듯 머리 크기만 한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희가 도울 수는⋯.”
「아니, 그대에겐 그대의 일이 있지 않은가. 자네의 일을 하게. 그게 나를 도와주는 일이지. 그러니 가게.」
볼토른은 알렌을 지나치며 석문으로 다가갔다.
“알겠습니다.”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볼토른에게 묻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베스틀라가 깨어났으니 그럴 필요 없기도 했다.
그녀 역시 알렌이 궁금해할 만한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대사막의 정화에 관해 모른다면 이번 일을 끝마치고 다시 돌아와서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베스틀라는 할 말이 있는지 크게 소리쳤다.
「저희가 왜 그래야 하나요? 알렌, 당신도 멈춰 봐요. 왜 우리가 당신의 말을 따라야⋯.」
「수만 년 동안 계획한 거인의 비원을 네 어리석은 고집으로 망칠 생각이냐?」
볼토른의 차가운 목소리가 베스틀라의 말을 끊었다.
「어리광 그만 부려라. 언제까지 감정적으로 행동할 생각이냐. 거인의 힘이 분노일지언정, 머리는 차가워야 한다. 그러니 그만 고집부리고 가라.」
베스틀라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볼토른이 옥좌를 향해 손짓했다.
「볼룬드, 뒤를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볼룬드가 알렌을 이끌었다.
「저 옥좌의 뒤에 통로가 있소. 그곳을 지나면 도착이오.」
쿠구궁-
진동은 더욱 심해졌다. 알렌은 진동의 원인을 생각하며 볼룬드의 뒤를 따랐다. 베스틀라는 잠깐의 침묵이 그저 감정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는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멋대로 대화를 끝내고 명령하는 모습이 어떤 기억을 자극했는지, 감정이 조금 격해져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순 제멋대로인 사람이에요. 그거 알아요? 왜, 왜! 항상 제멋대로 결정해요! 왜⋯. 나한테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아니, 그럴 수 없다.」
「왜⋯.」
「왕이니까.」
그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고목처럼 석문 앞에 버티고 섰다.
「왕은 그래야만 하는 자니까.」
왕좌 뒤에 있는 통로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알렌이 홀로 남은 그를 바라보았다. 석문 틈 사이로 들어온 빛에 어둠 속에 가려진 볼토른의 얼굴이 드러났다.
「미안했다.」
그의 두 눈은 뽑혀 사라진 상태였다.
「눈, 눈이 왜⋯.」
「너는 나 같은 실수를 하지 말거라.」
그가 슬쩍 미소 지었다.
콰과광-
그와 동시에 대전의 천장이 부서져 내렸다.
알렌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번개로 물든 인영이 떨어지는 모습과 새카만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