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그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오?」
볼룬드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알렌을 안내하며 그리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그건 무엇 묻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당연하지 않나?”
알렌의 반문에 그는 알렌의 말이 맞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하하. 하하하하. 그래, 그렇겠지. 너무 오랜만의 대화라 선문답을 해 버렸군. 미안하오.」
그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알렌이 처음 도착했던 공동을 빠져나와 이어진 어두운 통로에 오랜 시간 고여왔던 침묵이 깨졌다.
탁- 탁-
젊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노인네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니까⋯.」
그는 느릿한 걸음을 옮기며 알렌의 허리춤을 슬쩍 살피더니, 아까 하던 말을 이어 나가겠다는 듯 눈짓했다.
「아까 말했지 않소. 당신에게도 내 작품이 하나 있다고.」
“그랬었지.”
그는 그리운 기억을 떠올리는 듯 짧게 답했다.
「미뭉이라고 하오.」
미뭉?
알렌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 그는 이야기를 끌 생각이 없다는 듯 빠르게 이었다.
「그 검의 본래 이름이지. 물론, 지금 모습과는 조금 달랐소. 그 검의 반도 안 될 만큼 짧았고, 겉은 황금이라도 바른 듯 반짝였지. 아, 그러나 그 절삭력만큼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소.」
통로는 어떤 장소와 이어져 있는지,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화려하고.
그 반대로 더 음침하게.
겉은 화려하지만, 실상은 발길이 끊겨 더없이 음습하게 변한 통로는 블론드의 말투처럼 낡아 있었다.
그 통로의 경계선에 잠시 멈춰 선 그는 손가락으로 검을 가리켰다.
「그 검을 녹여 다시 만들어 낸 게 그것이오.」
커졌다 작아지는 거인의 등뼈를 잘게 부순 후 검과 함께 고기에 숨겨 용의 위장에서 녹이기를 아홉 차례. 그다음에 스물네 글자의 룬 문자를 겉면에 새겨 완성한 검.
그 걸작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묻겠소.」
볼룬드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석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 검에 대해 얼마나 아시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흐릿하게 웃으며 알렌을 돌아봤다.
「그 안에 있는, 공주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오?」
“그건⋯.”
알렌이 무언가 답하려던 그때, 거대한 폭음이 들렸다.
콰앙-!
통로가 흔들리고 흙먼지가 떨어지며 잠시간 지면이 진동했지만, 볼룬드의 느긋한 어조는 바뀌지 않았다.
「급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소. 시간은 많으니 말이오.」
그는 밖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알렌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지?”
알렌은 지하로 추정되는 이곳까지 영향을 미칠 만한 요소에 경계심을 가졌지만, 볼룬드는 의뭉스러운 어조로 시치미를 뗐다.
「글쎄, 잘 모르겠소. 예의 없는 불청객들끼리 싸움이라도 난 모양이 아니겠소?」
엘프의 시조라는 말이 어울리는 듯한 빼어난 그의 얼굴엔, 오랜 시간을 허투루 먹은 게 아니라는 듯 뱀 수십 마리라도 삼킨 것처럼 능글맞은 미소가 가득했다.
「당신은 어찌 되었든 손님이니 상관없지 않겠소?」
또, 늙으니 자잘한 것에는 관심이 없어지는 것도 있고 말이오. 그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알렌이 답을 할 때까지, 대답을 피하려는 모습에 알렌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손님에게 하는 대접이 참 시원찮군.”
알렌의 말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거대한 석문의 지척에서 멈춰 섰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오. 본래 내 역할은 안내가 끝인데, 부리 그 친구가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나라도 대신 해야지.」
난쟁이에게 직접 대장술을 배운 최초의 엘프이자, 거인과 인어의 혈통을 이었고, 엘프들의 왕이라 불리던 존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대답해 주시오. 거인 왕이 숨긴, 가장 존귀한 보물의 동반자여.」
볼룬드의 등 근육이 한순간 꿈틀거리며 거대한 석문을 붙잡았다.
「당신과 함께한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드륵- 드르륵-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밀려 나가는 소리 뒤로 불룬드가 소리쳤다.
「제대로 대답해야 할 것이오. 왕의 앞에서 거짓은 통하지 않을 테니!」
쾅!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활짝 젖혀졌다.
「위대한 거인의 왕이자, 굳은 땅의 수호자시어! 그를 데려왔나이다!」
그의 목소리가 열린 석문의 안쪽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베스틀라 역시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 * *
율리우스는 욕지거리가 나오는 걸 참으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진짜 몇 번째냐.”
“그라악-!”
꽈릉!
뇌전이 줄기줄기 뻗어 나가며 그를 둥글게 감싸던 언데드를 불태웠다.
체감상 아카데미 습격 때 상대했던 흡혈귀들보단 못하지만,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분명 처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시야에 몇 마리 보이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어제부터인가.’
본격적인 나스트론드 평야의 중심에 가까워졌다는 판단이 들 때부터 언데드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처음부터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의 전력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체력은 유한하다.
김우진 자신도 이런 상황에 무모하게 맞서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좀, 그만 나타나야 피하든 말든-!”
콰직-
“-하지!”
“크아아아아-!”
바닥이 볼록 솟는 느낌에 망설임 없이 찌르자 거대한 괴성이 들리더니 한순간에 뚝 끊겼다.
언데드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끊임없이 나타났다.
근처의 지면에서, 밟고 있는 바닥에서, 망가진 유적과 심지어는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하늘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 탓에 그는 자는 시간마저 줄이며 전투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김우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흩어진 살점과 망가진 뼛조각들. 언데드들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 잔해물이 뒤엉켰고, 뇌전에 불탄 탓인지 검게 그을린 자국도 가득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그는 후회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괜히 왔나?’
여기까지 요란하게 이동했기에 알렌이 봤다면 이미 찾아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뇌전을 이렇게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은 소설 원작을 통틀어도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며칠째 이동했는데도 알렌의 흔적은커녕, 그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이렇게 되니 차라리 광휘교 사제들과 함께 오는 게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불편한 잠자리와 먹는 게 고역일 정도로 질긴 육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허나, 이미 돌아가 합류하기에는 늦었다.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것도 아까웠고.
그렇게 그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도중,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삭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란하게 알리기에 누군가 싶었더니. 너였구나.”
오싹-
김우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푸른 뇌전에 휩싸였다.
쾅-!
[뇌신화(S)]
그의 몸이 길게 늘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순식간에 자리에서 멀어졌다.
내려놨던 긴장감을 끌어 올리자, 왜 이제까지 눈치채지 못했냐는 듯 농밀한 존재감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울 듯 넘실거렸다.
무감정한 눈으로 그가 하는 짓을 보던 이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짧게 평가했다.
“변수가 될 만했군.”
유지르는 아주 약간의 흥미를 느끼고 율리우스를 살폈다.
푸른 청발, 온몸을 가득 채우고도 흘러나올 정도의 마력과 자신의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뇌전. 아, 뇌전에 따로 유니콘의 뿔을 더했나?
‘거기다⋯ 이건 놀랍군.’
율리우스 몸은 정말이지 균형 잡힌 몸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자연적이지 않은, 명백히 인위적인 모습의 근육. 마치 초월자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완벽한 모습을 재현한 것처럼 그의 몸에 부족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사막 잡놈들의 힘을 비롯해 온갖 잡스러운 힘이 그의 몸에 다 담겨 있었다.
그러고도 터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
저런 놈이기 때문에 그놈들이 건들지 말라 한 건가.
“정령에, 성흔에 그리고 축복이라? 아직까지 살아 있는 신이 있었나?”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김우진은 유지르가 뭐라고 지껄이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아니 듣지 않아도 놈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이 세상에 마왕을 제외하고 자신을 이렇게 위축시킬 이는 두 명밖에 없을 것이다.
팔강 중 최강이라는 무신 미야크.
샨 미야크는 원작에서도 마지막까지 제대로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다. 마지막 인류 연합군이 붕괴하고 마리아를 비롯한 영웅들이 전사할 때조차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나비 효과가 있다고 한들 갑작스럽게 그가 여기 나타나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었다
“에스테도르의 수장 유지르.”
“나를 아는 모양이야.”
당연하지.
김우진은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집어삼켰다. 여기서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간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끝장난다.
‘유지르는 현대로 돌아가는데 모든 걸 바친 놈이다.’
만약, 에스테도르와 많은 접점이 있었다고 한들 알려진 것 외의 정보를 밝혔다간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아마 자신이 현대에서 빙의했다는 걸 들킨다면?
그가 온 세상과 다를지라도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현대로 가기 위해 마왕마저 소환하는 놈인데, 실제로 현대에서 빙의한 사람을 발견했다?
‘끔찍하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을 그냥 NPC 중 하나로 알고 있을 터. 우연인 것처럼 유지르가 계획한 일을 방해한 것으로만 알 것이다. 실제로 대국적으로 봤을 때도 별 영향은 없는 수준일 테니.
그건 그가 지난 삼 년간 조용히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자리만 빠져나간다면⋯.
‘아니, 잠깐만.’
김우진은 잠시 도망치려는 발걸음을 붙잡았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지?
‘알렌 형님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가 이곳에서 이룰지도 모르는 ‘업적’이 걱정돼서가 아닌가?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에.
‘내가.’
이 자리에서 마탑 습격 사건의 주범이자, 대륙에 여러 재앙을 흩뿌리며 많은 악행을 저지른 놈을 쓰러트린다면.
그로 인해 마왕이 소환되는 미래를 막게 된다면.
‘하지만.’
지금 유지르를 쓰러트림으로써 얻는 명성이, 마왕을 죽임으로써 얻는 명성보다 높을까?
수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김우진은 수없이 고민했다.
싸운다는 걸 전제한다면, 마왕과 유지르 모두 만만한 적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바로 그때, 그의 눈이 무지개색으로 반짝였다.
[유지르를 나스트론드 평야의 중심에 있는 괴물과 상잔시킨다. 제한 시간 : 0 : 02 : 59]
[보상 : 스킬 랜덤 뽑기권(A)]
김우진은 결정을 내렸다.
‘퀘스트를 따른다.’
퀘스트는 항상 자신에게 ‘옳은’ 길만을 제시했으니 이번에도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물러가기에는 모양이 빠지니.
“유지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죽어라!”
김우진의 몸이 뇌전으로 변하며 순식간에 덤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유지르의 앞으로 들이닥쳤다.
꽈릉-!
서로의 존재만 알고 있던 두 명이, 언데드의 평야 위에서 격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쪽이 밀려났다.
“이런 미친.”
쾅!
김우진의 몸이 뛰쳐나간 것보다 빠르게 바닥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