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99화 (199/212)

제199화

“왕이시어, ⋯이 방법은 너무 허황된 계획입니다.”

“그럼 이 계획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그건.”

멸망이 정해진 세상에 산다는 건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재앙으로 이 시대가 끝이 난다는 건 내 아버지 때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

“⋯예, 그렇지요.”

“그건 위대한 아버지 아우겔미르(Aurgelmir)가 직접 하품하는 심연의 뿔 없는 암소에게 들은 사실이고.”

우리를 창조한 아버지조차 벗어날 수 없고, 그런 아버지에 비견되는 존재가 직접 긍정한 끝.

“그런 멸망을 평범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운명은⋯.”

“운명은,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리라 생각되는 저 용들과 달리.

“우리는 거인이다.”

벽이 앞을 가로막는다면 벽을 부술 것이고, 운명이 그를 옭아맨다면 직접 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멸망을 기다리며 후세의 아이들이 방법을 찾아 주리라 그렇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거인 간에 차별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동등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고, 저보다 높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기대어 나태해질 겁니다.”

“서로의 존재는 본래 동등하지 않고, 높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어찌 나태함의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우리도 아버지의 아래 동등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거늘.

“아버지와 뿔 없는 염소는 미래의 가능성에 기대어 떠나셨다. 그렇기에 우리밖에 없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유일한 친우인 부리(Búri) 역시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내게 아들마저 맡기고 떠났다.”

그럼 남은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떨고 있어야 하는가?

“그러니⋯ 선언하겠다.”

“명하십시오.”

“나 볼토른(Bölþorn)은 지금부터 친우가 내어 준 왕의 자리에 앉아 첫 명령을 내리는 바이다.”

지금까지 없던 힘, 현시대에는 나타날 리 없고, 다음 시대에나 등장하는 것.

“신성을 얻어 초월하기 위해, 전 지역에 신전을 짓고 그를 왕과 동일시할지어다.”

그리고⋯.

“내 이름은 신성시되기에 악한 손이라 부르게 하며, 부리의 아들을 내세워 암중에 불만을 처리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주님께는⋯.”

악한 손은 검술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녀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대적자라는 비밀을 제외하고 그 모든 것을 숨겨라.”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것이다.

* * *

알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주위는 어두웠다. 그는 머릿속을 떠도는 장면을 억지로 밀어 두며, 감지력으로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오랜 시간 오지 않은 듯한 공간.

알렌은 어떤 벽화가 새겨진 공동에 홀로 자리하고 있었다.

당장의 위협이 없다고 확인한 그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처음으로 거슬러 가서.

‘나스트론드 평야의 외곽을 지나 내부로 진입한 후에 도시를 발견했다.’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낮은 돌담밖에 세워지지 않은 터. 그곳에 언데드가 단 하나도 없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고 자세하게 살폈지.

그러다 도시의 중심, 다른 곳과 다르지 않은 장소의 지하에 빈 공간이 있었다.

그 사실에 언데드를 물리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 그곳으로 들어갔고⋯.

‘뼈만 남은 거인을 만났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별것 없었다. 알렌은 방심하지 않고 정보를 얻고자 대화를 했다. 그리고 거인은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다.

억지로 결론을 내자면 한 마디로 줄일 수 있었다.

‘당했다.’

방심⋯ 이라고 하기에는 전조가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알렌은 그 해골 거인을 믿고 있지 않았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자면⋯.”

그 도시에 자신을 제외한 이들이 얼마나 다녀갔을까? 열? 백? 적어도 적은 인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알렌 자신처럼 행동한 사람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겠지.’

혹시 지하에 무언가 묻혀 있지 않을까 싶어 파 본 이들도 있을 테고, 지하를 탐색하는 유물과 마도구 역시 없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알렌 홀로 지하의 빈 곳을 발견했다고?

‘애초부터⋯ 거인은 나를 인지하고 있었다.’

차근차근 정리해 본 결과 나온 결론은 그것이었다.

누군지 모를 거인이, 알렌의 존재를 인지하고 끌어들였다. 그 이유가 거인의 혈통이라 생각한 탓일지 베스틀라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 됐든 거인은 숨기고 있던 공동⋯ 예배당을 알렌이 인지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가 흥미를 느낄 수 있게끔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후에 놈은 대화로 시간을 끌었으며, 자신을 이곳으로 이동시켰다.

그게 전부였다.

의도도, 이유도 알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꿈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까.”

나스트론드 평야에 들어온 이후부터, 아니 정확히는 잠시 머물렀던 거점에서부터 그는 밤마다 꿈을 꾸고 있었다.

거인과 용이 전투를 벌이며, 때로는 누군가 대화를 하는 꿈.

꿈이 지속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정신 공격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이것이 무언가를 알려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야의 외곽 끝자락에 있을 때만 해도 꿈의 내용은 불분명했다.

마지막 한마디를 제외하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

그러나 외곽에서 내부로 가까워질수록 꿈은 점점 명확하게 변했다.

현재는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몰라도 정말 곁에서 듣는 것처럼 막힘없이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의 그 대화는.’

대화의 명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악한 손이 누군지는 알렌도 알았다.

용과 거인의 시대를 지배했던 두 지배자 중 하나이자 거인 종족의 왕.

유적에서 읽었던 벽화에서 그 이름을 처음 보았고, 요 며칠 이어지는 꿈속에서도 익히 들었다.

그러니 중요한 비밀을 품고 있을 터.

‘아직은 단서가 부족해 완전히 이어지지는 않지만⋯.’

조각이 몇 개만 들어온다면 달라질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찾아오지는 않는군.”

자신을 이곳에 보냈다면 대기하고 있는 누군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단지 기우에 불과했나?

탁-

그때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알렌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공동의 벽화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동한 직후부터 벽화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분석하고, 찾아올 누군가가 있을지 대비하는 것이 먼저였지.

적어도 상대가 일부러 기척을 낸다는 사실은 그에게 적의가 없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탁- 타닥-

공동 전체를 돌아본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상은 총체적으로 평하자면 이것이었다.

‘아쉽다.’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아카데미의 마지막이 무언가 달라질 여지가 있었을 텐데.

벽화의 내용은 알렌이 익히 알던 내용을 그리고 있었다.

문명이 발전의 절정에 달하며 화려하게 꽃피우자 나타난 회색 재앙.

다만, 놀라운 점은 거인들은 미리 회색 재앙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를 회피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

자세한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아니, 잠시만. 방금 정신을 잃었을 때 들은 것과 관련이 있나?’

탁-

알렌은 들려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자세한 판단은 나중이다. 지금은 간단한 사실 정리부터.

거인들은 그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 수 세기를 노력했다.

그렇게 계획이 실현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타닥-

“용의 배신⋯.”

직접 뼈대를 세우고 일을 계획하던 거인과 그 계획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보좌하며 돕던 용.

그런 관계가 어그러지게 된 이유는 용 때문이었다.

용들은 마법의 종주이자 강력한 이성의 지배자들.

거인이 감정에 따른 분노로 육체의 힘을 배로 증폭시켰지만, 용은 지독한 이성적인 판단으로 마법을 쓰며 판단을 내렸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거인의 계획은 허황된 것 같았다.

탁- 탁-

차라리 살 수만 있다면, 이 모든 일을 꾸몄을 두 초월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더 ‘이성적’인 판단이었겠지.

그렇기에 용 중 일부가 배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들을 따라 남은 용들이 거인을 배신하는 것 역시 이상하지 않았고.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파멸을 가져왔다.

용과 거인은 두 초월자의 의도대로 사이좋게 공멸하고 말았고, 거인이 세운 계획과 용이 바친 복종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

“도마뱀, 도마뱀이라 그랬지.”

이런 이유였나?

어쩐지 베스틀라가 혐오하는 이유가 단지 종족적인 감정이라기엔 너무 강했었지.

그렇다면 드라기아스 가문의 지하에 있던 니드호그 역시 그 모습이 진정한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타닥-

놈의 모습은 용이라기에 너무 감정적이었으니까.

혹시 언데드가 되어서 지성이 퇴화하게 된 결과인가⋯, 놈은 그걸 알고서라도 살기 위해 타락을 감내했고? 그게 이성적인가?

“말 그대로 뱀 같은 놈이군.”

「말 한번 잘했소! 그야말로 지독히 이기적인 놈들이지.」

탁-

알렌은 발소리에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조금 늦었소.」

그곳에는 헤졌으나 최대한 단정히 차려입은 남자가 있었다. 알렌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신장, 백옥같은 피부와 뾰족한 귀, 생전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잠시 그를 살피던 알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거 놀랍군. 수천 년간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을 줄이야.”

「살아 있다고?」

그는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는 로브로 가려진 하체의 일부를 보였다. 알렌은 놀랍다는 감정을 내보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하반신은 상반신과 다르게 뼈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걸음 소리가 이상하다 싶더니.’

그런 이유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지?”

「북방의 여왕에게 미래를 대가로 축복을 받았지.」

이 꼴을 보면 저주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말이오.

그는 그렇게 말을 이으며 쓰게 웃었다.

「궁금증은 조금 해결되었소? 그렇다면 내 소개를 먼저 하지. 내 이름은 볼룬드(Vǫlundr), 대장장이오. 종족은⋯ 그대식으로 말하자면 하이 엘프라 할 수 있을까.」

알렌은 엘프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종족보다는 다른 것에 시선이 갔다.

“대장장이?”

그의 호리호리한 몸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호칭에 의문을 표하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곳을 비롯한 수백의 유적에 내 흔적이 닿아 있지. 보르(Borr)에게 듣지 못하셨소? 당신에게도 내 작품이 하나 있을 텐데⋯.」

보르? 발음이 미묘하게 다른데. 알렌이 그에 대해 신경 쓰기 전, 볼룬드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에 닿았다.

베스틀라.

정확히 베스틀라를 향하는 시선에 알렌은 드러나려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지 알렌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모습이 아무 정보도 듣지 못한 탓이라 생각했는지 볼룬드는 탄식을 흘렸다.

「⋯그래, 버티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기는 했지.」

아무리 위대한 자의 아들이었을지라도.

그는 몸을 돌려 알렌에게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해 드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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