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알렌은 눈앞에 터만 남아 있는 도시를 살폈다.
거대했던 도시는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그저 흔적만 살펴볼 수 있을 뿐이었다.
성벽의 아래에는 사각형의 벽돌이 깨져 바닥을 나뒹굴었고, 흔히 보이는 건물 역시 멀쩡한 것이 단 한 채도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아쉽다.’
조금은 아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 전 제국의 유적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도개교나 하수도 같은 것들은 지금도 도시를 지을 때 고려하는 입지적 조건이 된다.
하지만 고대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 지금보다 몇천 년 더 전의 용과 거인의 시대.
그 신화적 시대에 세워진 건물은 나스트론드 평야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곳에도 유적이 몇 곳 남았다고는 하지만 고대 제국의 유적과 달리 관리가 안 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렌은 도시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기대감에 들었지만, 터만 남은 도시의 모습은 실망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내부로 들어왔을 뿐이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나스트론드 평야 깊숙이 위치한 궁전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무언가 알아낸다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도시로 발을 내디뎠다. 도시에는 의외로 언데드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기분에 감지력으로 살펴도 마찬가지.
“⋯이곳에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나?”
알렌은 정신을 집중하고 감지력을 퍼트렸다.
미리 훑어봤지만 언데드를 비롯한 어떤 생명체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외곽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쉽게 눈으로 찾을 수 있었지.
그렇다면 도시에 밖과 다른 점이 있을 텐데⋯.
‘너무 예민했나?’
아칸더스가 이곳을 지배하는 언데드의 왕이 있다며 했던 이야기 때문인가.
알렌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추측에 도시 곳곳을 살폈지만, 터만 남은 도시는 보이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감지력을 거두려는 순간, 알렌이 몸을 멈췄다.
그의 고개가 도시의 중앙으로 향했다.
“저건?”
여타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낮은 높이의 터만 있는 장소.
건물의 잔해만 남아 주변과 별 차이 없는 곳의 아래가, 마치 하나의 층이 더 있기라도 한 듯 비어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하며 얼른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잠시 이리저리 살피고는 한곳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알렌의 몸이 훅 꺼지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착지한 뒤 주변을 살폈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방문을 받은 적이 없는 듯 짙게 먼지가 쌓인 공동, 그곳이 햇빛 아래에 수천 년간 드러내지 않았던 그 민낯을 드러냈다.
“⋯신전, 인가.”
햇빛으로 드러난 곳은 알렌의 예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거대한 조각상.
옛날에 있었다는 신전을 방불케 하듯 거인의 신상과 그것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예배당이 눈에 띄었다.
그 옆에 다른 조각상이 하나 더 있던 모양이었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국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알렌이 떨어진 곳은 긴 의자가 놓여 있던 장소였다.
다만 오랜 시간 있었던 탓인지 이미 썩어 그 잔해만 남아 있었다. 거인의 크기를 상정하고 만들었는지 공동은 알렌의 입장에서 보기에 지나치게 넓었다.
그가 천천히 그곳을 둘러보던 때, 툭-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알렌의 신경이 순식간에 그곳에 집중되었다.
툭- 툭-
안이 빈 금속이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 그래, 마치 뼈가 바닥과 부딪혀 내는 듯한 소리에 알렌은 검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는 감지력을 보내던 도중 인상을 찌푸렸다.
‘감지력이 중간에 막혔다.’
보통의 괴물은 감지력을 막아낼 수 없다. 강자층에 속하는 오우거도 마찬가지. 그 말은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를 뜻한다.
‘상대가 귀족들이 쓰는 마도구처럼 감지력을 막아내는 장비가 있거나.’
자신과 비견되는, 최소 7위계 이상의 강자던가.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곳에서 만나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그는 잠시 느꼈던 위화감에 이곳을 발견했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대충 살펴본 즉시 지나쳤을 것이다.
알렌의 목적지는 평원의 중심이었으니까.
마력의 실타래가 바닥을 휘감으며 퍼져 나갔다. 검을 쥔 힘은 갈수록 강해졌고, 깊게 가라앉은 눈은 상대가 누구일지 바쁘게 예측했다.
그렇게 알렌의 기세가 끝없이 치솟던 그때.
「⋯그.」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힘을 빼 주면 안 되겠나?」
“⋯뭐?”
그것을 듣던 알렌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같은 방식의 의사소통 방법을 수없이 들어 봤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의 방문자라 잠시 장난을 쳐 보려 했을 뿐인데⋯, 그냥 나타나면 말도 못 하고 소멸하겠어.」
베스틀라.
그녀와 같은 방식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방문자여 환영한다네. 내 이름은 보르(Vǫr), 보통 지혜로운 보르라고 부르지.」
그와 동시에 한쪽에 있던 통로에서 뼈로 이루어진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이름을 말했으니 묻겠네. 일족의 피를 이은 듯한 방문자여.」
헤진 로브를 걸친 해골 거인, 보르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 * *
‘알렌 공자님. 사실, 저희는 원래라면 중앙 지역을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아칸더스는 다소 침중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사막의 길잡이라 불리는 부족들 덕에 깊숙이 들어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궁전을 발견하고 경계를 너무 게을리했던 탓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함정에 걸려든 것일까.
아칸더스가 합류했던 조사대는 외곽보다 수십 배는 강한 몬스터와 끝도 없는 물량이 들이닥치자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그들이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그들이 우리를 헤치기 직전,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입니다.’
어떤 명령이라도 들은 것처럼, 언데드는 돌연 움직임을 멈췄고 길을 내주었다.
그것이 아칸더스가 나스트론드 평야에 언데드의 왕이 있다고 짐작하는 원인이자 이유였다.
「뭘 그리 생각하나? 이름 하나 알려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툴툴거리는 목소리.
보르라고 소개한 거인은 언데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감정 표현을 했다.
‘알고 보면 베스틀라도 그랬지.’
수천 년을 갇혀 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그런지 궁금한데 밖은 얼마나 발전했지? 시간이 많이 지났나?」
알렌은 자신의 경계심을 이해한다는 듯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바라보는 보르에게서 도저히 수천 년을 홀로 있었던 듯한 세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알렌은 긴장감을 풀어놓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 당신 말고 누군가가 더 있나?”
「드디어 말을 했군. 누군가? 아니, 보다시피 나 혼자지. 궁금하면 살펴봐도 되네. 이제는 막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가 한 걸음 비켜서자 이곳의 유일한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알렌은 잠시 그를 힐끔 보더니 감지력으로 통로 구석구석을 훑었다.
통로에는 그가 지낸 것으로 보이는 방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보통 신전에 있을 법한 창고나 서재가 없다는 사실은 의아했지만, 지금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그래, 혼자가 맞군.”
알렌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일단 대화할 마음을 품었다.
「경계가 풀린 것 같으니⋯ 자기소개 정도는 해 주는 것이 어떤가.」
“알렌 라인하르트. 귀족⋯ 아니, 모를 테니 그냥 아무렇게나 불러라.”
「귀족?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현 종족의 지배 계층 같은데, 우리도 그런 개념 정도는 있으니 알고 있다.」
뭐, 그래도 높여 불러 줄 생각은 없지만.
그는 그렇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고대의 존재에게까지 대우받을 생각은 없다. 그건 그렇고⋯.”
알렌은 얌전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대화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기 있는 이유가 뭐지? 이 신전을 그렇게 오래 지키고 있던 이유는 무엇이고. 그리고⋯ 너는 언데드를 조종할 수단이 있나?”
「벌써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흠, 기왕이면 바깥소식을 조금 듣고 싶었건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 질문에 답하자면⋯ 그래. 고작 이 도시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끔 하는 게 전부지만 말이지.」
“그럼 이곳을 지키고 있던 이유는⋯.”
그는 알렌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워워, 내가 그것까지 말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건⋯.”
알렌이 그의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히자, 그는 이내 다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 동족의 피를 잇고 있으니 특별히 알려 주도록 하지.」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쉴 필요 없던 숨까지 들이켜고는 간단히 답했다.
「의무, 때문이지.」
“⋯의무?”
보르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그래, 의무. 이 자리에, 수천 년의 막대한 업을 짊어진 이유이자 죽어 가는 육신을 붙든 원인!」
해골의 몸이 달그락거렸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헤진 로브가 펄럭였고, 가볍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갈수록 무겁고 낮게 변해 갔다.
알렌의 눈이 가라앉았다.
「너도 그렇지 않나, 알렌 라인하르트!」
거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알렌의 검에 모여든 마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온몸의 모든 힘을 터트렸다.
「두 초월자의 꼭두각시로 삶을 마감할 인간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몰래 공격을 대비하던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너를 기다렸다!」
알렌과 비견될 법했던 힘을 가진 해골의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예배당의 바닥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지금의 체계와는 전혀 다른 체계의 마법.
비교하자면 그래, 그 마법은 베스틀라의 검면에 새겨진 문자를 섞은 듯했다.
「하하하하! 드디어 거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얻은 이가 나타났구나!」
알렌은 공격에 대비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저자의 행동은 충분히 이상했지만, 애초부터 그에 대한 신뢰는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설마.”
보르는 애초부터 알렌을 공격할 생각이 아니었다.
우웅-
물결치는 공간의 파동에 알렌이 급히 실타래를 펼쳤다.
「늦었다!」
깜빡-
몸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마지막으로 본 거인이 모습은 그를 함정에 빠트린 자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치고 지쳐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의무에 해방된 모습만 보일 뿐.
「오랜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이었어. 드디어⋯.」
내 의무를 끝마쳤다.
그의 귓가로 보르가 끝마치지 못했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알렌의 몸이 이동되었다.
* * *
“⋯⋯⋯치십시오”
“저희가 대신 막겠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버리……!”
한때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도시가 운석을 비롯한 용의 숨결에 망가졌다.
“⋯르님, 의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연히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대로 숨기는 것만⋯⋯.”
“⋯⋯⋯님은 마지막까지 반대하셨⋯⋯.”
“그건 어쩔 수 없⋯⋯.”
긴 삶에 맞춰 쌓인 지성과 그와 함께 발전한 지식은 전쟁 앞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악한 손이시여! 두 초월자에게 굴복한 도마뱀들이 이곳까지⋯⋯.”
“⋯끝까지 항쟁하고, ⋯⋯⋯⋯을 실행하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
“그럼 지금 희망은 있나?”
한때, 시대를 양분한 두 지배자 중 하나인 거인의 왕이자 그들의 섬김을 받는 신은 결정을 내렸다.
“수백 개의 유적을 짓고, 끝까지 싸우다 죽어라!”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