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우중충한 하늘 아래 세월의 흔적이 깃든 고성과 고요한 도시.
두터운 안개는 햇빛이 쏟아지는 것을 막았으며, 어두컴컴한 도시 안에 살아 있는 이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얼핏 죽어있는 도시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이들, 흡혈귀들이.
평소의 낮 시간대라면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을 그들의 도시는 오랜만의 손님으로 인해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유지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창문의 틈, 골목의 구석과 바닥의 구멍.
그 어디에서도 조그마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식물마저 햇빛을 못 받은 탓인지 어두운 녹색을 발하며 고개를 숙였고, 생명의 기척이라고는 아무리 둘러봐도 느낄 수 없었다.
유지르는 언제 들러도 생리적인 혐오감이 느껴지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감정인 시선을 자신의 앞으로 돌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창백한 안색의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유지르 님이십니까?”
“그가 보냈나?”
“예. 시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안내 부탁하지.”
그는 정중하게 목례를 하며 미리 준비한 마차에 유지르와 탑승했다. 부드럽게 굴러가는 마차가 대로를 지나며, 도시의 중앙에 지어진 고성으로 향했다.
유지르는 마차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에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전투가 있었나?”
청년은 잠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그의 시선이 도시 곳곳에 부서진 건물과 핏자국에 향하는 걸 눈치챘다.
그는 창백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반항하는 이들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처리라….”
“유지르 님 덕분에 저희 시조께서 유일한 진조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그 후에 남은 자들의 반항일 뿐 별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의 호의가 가득한 눈에 유지르는 그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유지르가 궁금증을 해결한 듯 입을 다물자 청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멈춰 섰다.
고성의 입구까지 멈춰 선 마차에서 홀로 내린 유지르는 고성으로 들어갔다.
“하하하, 이제야 도착했나!”
호탕한 웃음소리. 그가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근육질의 장년의 남자가 만면의 웃음을 머금고 그를 맞이했다.
평소의 그의 냉혹한 모습을 아는 이라면 절대로 믿지 못할 모습이었지만, 유지르는 그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만했다.
무려, 그림자 열도의 지배자 진조 중 셋을 하나로 만들어 주었으니.
“잔당 처리는 끝났나?”
“아, 오는 길에 도시를 보았나 보지? 걱정하지 말게. 강제적이지만 남은 잔당 처리를 끝낸 흔적이니 말일세.”
그가 말하는 처리는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 패자를 죽이는 것이 아닌 노예 계급으로 흡수하는 것을 뜻했다. 어차피 약점을 찌르지 않는 한 그들은 죽지 않았으니.
“그럼 다행이군. 앞으로의 일에 조금의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될 테니.”
“차질이라… 그래 맞는 말이지. 그래서 말일세.”
웃음을 머금고 있던 남자의 얼굴의 눈이 얇게 뜨이며 사이하게 변했다.
“만약에, 아 만약에 말일세. 혹시라도 기껏 장악한 세력이 다시 쪼개지는 것만큼 차질이 있는 일도 없지 않겠나.”
장년의 진조는, 수백 년을 넘게 살았을 괴물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유지르는 저 모습에 속지 않았다. 대답이 맘에 안 든다면 곧바로 달려들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지?”
진조라는 괴물은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떻게?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걸세.”
진조, 블라드 바르토스는 언제 감정을 내비쳤다는 듯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압도적인 자신감에서 나오는 발언이었다.
이제 와서 그들이 돌아온다 한들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
“하지만 자네에 대해 조금은 태도를 달리하게 될지 모르지.”
“아니, 돌아올 일은 없을 거다. 어차피 그들을 ‘문’으로 만드는 광경을 봤지 않나?”
그의 눈에 서린 절대적인 믿음에 유지르는 모호한 태도를 버렸다. 어차피 이들과는 손을 잡아야 한다. 3년 전의 벌인 일은 그로서도 많은 것을 투자해야 했었으니까.
“그렇지만… 자네는 별의별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이미 죽은 이도 살려낼지 어떻게 알겠나.”
유지르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부정하지 않았다.
비록 얻는 것에 비해 비대하기만 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긴 하지만, 언데드에 걸친 흡혈귀라면 방법이 없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절대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껏 만든 문이 망가질 뿐이니.’
3년 전, 아카데미의 습격에 실패한 직후 그는 망설이지 않고 제2 안을 실행했다.
마왕을 불러들일 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문을 버틸 뼈대가 필요하다. 제일 좋은 재료는 거인이나 용의 뼈지만 현재까지 살아 있는 고대 종은 없다.
있다고 한들 조용히 숨어 살고 있을 테니 그도 찾아내기 힘들었다.
찾아낸다고 해도 얼마나 강할지도 알 수 없고. 그렇기에 대신할 재료로 팔강이 필요했다. 종의 한계를 초월한 강자는 용이나 거인과 비교해서 꿇리지 않을 테니.
그러나 습격에 실패했다.
하나라도 얻을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습격은 예상보다 강한 팔강의 실력과 예상외의 변수로 인해 투자한 것에 비해 조금의 결실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방법이 아예 없지 않았다.
그는 그림자 열도의 지배자 진조 셋 중 가장 야망이 넘치는 블라드 바르토스와 손을 잡고 남은 진조 둘을 습격했고, 성공했다.
이변은 없었다.
애초에 아카데미 습격도 변수가 없었다면 성공했을 일이었다.
“이제 흡혈귀의 유일한 진조가 되었으니… 슬슬 약속을 지켜 주었으면 하는데.”
유지르는 쓸데없는 신경전을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자리도 진조의 격에 맞는 상대가 자신밖에 없었기에 나온 것뿐이니. 당장 대륙으로 돌아간다면 할 일은 넘쳐났다.
“흠… 그게, 문제가 생겼다.”
그의 발을 빼는 듯한 행동에 유지르의 얼굴이 삭막하게 변했다.
“문제?”
아직 무슨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르토스의 대답에 따라 유지르는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좋은 쪽의 행동이 아니겠지.
“그래, 나도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최근 대륙에 세워 놓았던 거점이 전부 파괴되었다.”
블라드 바르토스와 유지르는 겉으로는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지르의 능력에 대해 꺼림칙함을 느꼈다. 저주와 흑마법, 사령술과 같은 능력의 정점에 있는 자가 작정하고 미친 짓을 벌인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만약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흡혈귀만 죽이는 저주라도 만든다면 어쩌겠는가.
진조 둘을 죽일 때 썼던 수단을 본 후부터 그는 호탕한 태도와는 달리 경계를 푼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습격했던 팔강, 짐승왕이라 했던가. 놈이 무슨 정보를 얻었는지 쥐 잡듯이 동족을 죽이고 있다.”
“짐승왕. 아, 그놈이군.”
실질적으로 노렸던 하늘의 방패와 떨어트리기 위해 눈속임 차 전력의 반을 투입했던 팔강.
“애초에 햇빛 아래서 활동할 수 있는 동족도 드물다. 그런데 남은 이들을 다 죽여 놨으니 당장 대륙에서의 일을 돕는 건 어렵게 됐다.”
물론 고위 흡혈귀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이다. 자신이 명한다면 듣기야 하겠지만 아직 내부 안정화도 마치지 않은 가운데 불만을 쌓을 행동은 피하고 싶었다.
“변수… 까지는 아니군. 이 정도는 상관없겠어.”
잠시 생각을 끝마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너희들에게 탐색을 맡길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직접 하겠다. 하지만, 다음에는.”
그가 아까와 같은 감정 없는 눈으로 블라드 바르토스와 눈을 마주쳤다.
“이런 변명이 계속 통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할 거야. 나는 계획이 늦어지는 걸 가장 싫어하거든.”
특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을 늦추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의 경고에 블라드는 평소의 냉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의 약속은 지켜져야 했다. 마왕이 강림하면 혜택을 받는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그가 몸을 돌려 고성을 떠났다.
유지르는 도시로 들어올 때와 달리 홀로 섬을 떠나며 중얼거렸다.
“나스토른드 평야. 이번에는 지혜의 샘물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희망 사항일 뿐이지만,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한다.
반드시.
* * *
“…공자님 적어도 저라도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너는 이곳에서 내가 시킨 일의 준비나 마치도록.”
“그것이 공자님의 안전보다 중요하지 않….”
“이넬리아.”
그가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몇 걸음 물러섰다.
거울에 떠날 준비를 마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알렌은 걱정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에게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번 일은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지 않나. 내가 ‘위업’을 세운 뒤에 뒤처리가 중요하다고.”
“…예, 알겠습니다.”
알렌은 그녀를 살피다 몸을 돌렸다. 저렇게 말하더라도 시킨 일은 잘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처음 들인 가신이었으니.
집무실을 지나 저택의 정문으로 나아가니 다른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리아나, 프란시스카, 아칸더스.
소네드와 카릭은 거대한 거래망을 가다듬느라 잘 시간도 없을 테고, 순환교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흩어져 일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조용히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나?”
“어찌 주군이 떠나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떠날 시간을 말해 준 것은 아칸더스밖에 없으니 그가 다른 이들도 불렀을 것이다.
그의 능청스러운 웃음에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렇게 말해도 알렌을 홀로 떠나보내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가 이 모든 이들의 중심이었으니.
감성적인 면이 아닌, 이성적으로 따져도 알렌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은 불협화음을 내게 될 것이다.
‘처음에 세운 계획대로라면 내가 없어도 조직은 잘 굴러가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만약을,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할 수 있을 테니.
알렌은 입에서 쓴소리가 나오는 걸 멈췄다. 그런 계획을 세웠다고 해서 자신을 걱정해 나온 이들에게까지 그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알렌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택의 모든 이들을 불러 모으지 않아서 다행이군.”
“저도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두 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나온 것은 프란시스카였다. 그녀는 같이 따라간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 떠날 차림을 한 채였지만, 뒤에서 따라오던 이넬리아의 축 처진 얼굴을 보고 말을 골랐다.
“…제가 공자님이 없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알렌도 그녀가 본래 하려던 말을 눈치챘지만, 포기한 것을 깨닫고 순순히 답해 주었다.
“혹시, 마탑을 건설할 생각이 있나?”
“…네? 마탑이요?”
“그래, 비다르에 존재하는 유일한 마탑.”
그녀가 말하지 않았지만, 알렌은 그녀의 가슴 아림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원의 존재를 눈치챈 상태였다.
보통 마탑 도시에 존재하는 마탑주의 실력이 7위계에 달했으므로 자격은 충분했다.
“다만, 마탑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당장 엄청난 지원을 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해 준다면….”
“할게요!”
그녀는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수락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칸더스에게 눈짓했다. 자세한 것을 그녀에게 설명하라는 말이리라. 아칸더스는 알렌이 세운 계획 중 일부를 공유했기에 그녀를 마탑주로 세울 계획도 알고 있었다.
“그럼 잘 부탁하지.”
“돌아오시면 깜짝 놀라실 거랍니다?”
“기대하지. 그리고….”
일리아나는 어제 충분한 대화를 나눴기에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다만, 급하게 챙겨 온 듯한 선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시계예요. 원래 지금 주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객지에서는 시간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잖아요?”
알렌은 마법사였기에 집중한다면 생체 시계를 통해 짐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을 만들었을 그녀의 정성을 떠올리며 얌전히 받아 들었다. 둥그런 시계는 손바닥만 했는데 겉면에 새겨진 고풍스러운 조각과 더불어 안쪽에는 서로 다른 네 개의 원이 겹쳐서 돌아가고 있었다.
“따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망가지지만 않는다면 몇십 년은 거뜬할 거예요.”
“고맙다.”
알렌은 품속에 시계를 넣어 두며 더 할 말이 있냐는 듯 주변을 돌아봤다.
그들이 고개를 젓자 알렌은 준비된 마차에 홀로 올라탔다. 마부를 하는 이는 자신이 직접 라인하르트 영지에서 데려온 카터라는 성을 가진 마부였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그의 마차가 출발했다.
알렌 라인하르트.
그가 얼마나 오래되었을지 모르는 마경으로 홀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