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93화 (193/212)

제193화

마하 황녀.

알렌이 처음 그녀에 대한 처우를 고민했을 때 내린 결정은 죽이는 것이었다.

죽이지 못한다면 율리우스가 황위 분쟁에 끼어들 만한 여지를 주지 않도록 미리 배제하는 것. 그를 위한 계획은 아칸더스가 세웠고, 현재는 예정대로 진행 중이었다.

미래에 세력을 형성하고 힘을 모으는 데 그녀의 존재는 방해만 될 뿐이니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전생에 김우진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겠지만….

‘애초에 지지받는 황태자와 귀여움받는 막내 중 어느 쪽이 황제가 될 가능성이 더 크겠는가.’

아카데미 초부터 일라이자 황자와 연을 맺은 것도 있고.

그런 그가 계획을 변경하게 된 것은 순전히 프란시스카에게 들었던 예언과 비슷한 그녀의 발언과 순환교에서 얻을 비공선에 대한 정보 탓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어도 억제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발상에서 온 계획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황녀님께서는 뭐라고 전하셨습니까.”

알렌과 일리아나는 칸트 라스웰을 따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그는 몇 번이나 이곳에 온 적 있는 듯 여기저기 흩어진 공구와 기계들의 틈을 지나 그들을 이끌었다. 사실 실질적인 이곳의 주인인 알렌보다 그가 더 오래 머물렀으니 그가 더 익숙해 보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흠….”

그는 신중한 얼굴로 슬쩍 일리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뜻하는 바가 명확해 보였다.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 혹은 들을 자격이 충분한가. 명확한 의미가 담긴 시선에 그녀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렌 공자, 밖에서 기다릴 테니 이야기가 끝난다면 따로….”

“이 아이가 자네가 그리 칭찬하던 천재란 말이오? 상황의 실마리가 된다고 하기에 좀 더 연구자 같아 보이리라 생각했는데.”

“…네?”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칸트는 엉거주춤 일어선 자세의 그녀에게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앉아 계시오. 어차피 알렌 공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주 보게 될 테니 말이지.”

일리아나는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알렌에게 눈을 돌렸다. 알렌은 대화를 멈추기를 기다렸다는 듯 느긋이 말을 이었다.

“일리아나. 먼저 말을 하지 않은 건 사과하도록 하지. 우선 너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비공식 고대 제국 공학 연구소의 소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

“…네?”

알렌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그럼 상관없지 않나.”

“잠깐, 잠깐만요.”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이마를 꾹 눌렀고, 칸트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제국 공학자들이 염원할 만한 자리에 최연소로 오르다니 그네들이 알면 부러워서 땅을 치겠어.”

“그러니까 제가….”

일리아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딱 봐도 이렇게 음습하게 숨어서, 제국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비공선의 연구를 한다고요?”

“그래.”

“…걸리면 딱 봐도 제일 먼저 쫓길 것 같은데요?”

“최선을 다해 보호하리라 약속하지.”

“아니…, 하아.”

그녀가 여러 감정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제 와서 이직 못 하겠죠?”

* * *

일리아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며 자리를 비웠다.

알렌은 그녀가 겪는 혼란을 이해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칸트는 우유를 넣은 홍차를 타며 입을 열었다.

“설명도 없이 데려왔소?”

“누가 들을지 모르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아, 한 잔 타 드리오?”

“괜찮습니다.”

알렌이 고개를 젓자 그는 더 권하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향을 즐기던 그는 다과까지 꺼내 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녀님의 전언은 언제나와 똑같소. 언제쯤 비공선을 공개할 생각이냐. 제대로 된 양산은 멀었는가. 뭐, 개인적인 안부도 묻는 것 같소만.”

그는 세심하게 봉인된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알렌은 그 자리에서 뜯어 보며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안부를 제외한다면 그가 말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가 드릴 대답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고… 양산에 대해서는 일리아나가 왔으니 진척이 될 테지요.”

그녀의 능력이라면 몇 년 내로 저 비공선으로 하늘을 가득 채우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마저 잔을 비우고, 느긋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저번과 같이 물을 수밖에 없겠소. 알렌 공,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 게 맞소?”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칸트의 모습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입가에 웃음을 매단 채 차를 즐기는 신사의 모습.

그러나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벨 듯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제국이 보유한 준 팔강급 실력자.’

제국 최강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괴물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대결에서 그는 제국 최강보다 더 깔끔하게 상대를 처리할 수 있다.

아마 그늘진 여왕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고 십 년이 더 지난다면 그가 차세대 팔강이 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보기에는 암살자보다는 검사 쪽에 가깝나.’

의미 없는 가정이다.

알렌은 그의 압박에 별다른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비공선의 기술 공유와 투자한 지분만큼의 요구가 아닙니까. 그리고….”

알렌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를 확인하기 위해 제국도 아닌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까.”

그만한 지위에 있는 칸트가 이런 지하에 몇 년이나 박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알렌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을 때쯤, 마하 황녀를 은밀히 불러 비공선을 보여 주었다. 그녀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제일 믿음직한 수하를 이곳에 보낼 정도로.

그녀는 알렌에게 이 시설을 지을 자금과 자원을 투자해 주었고 심지어 강력한 계약 마법으로 입을 막은 공학자와 연구자들까지 이곳에 보냈다.

그들이 제국에서도 흔하지 않은 인력임을 고려한다면 그녀는 이곳에 총력을 쏟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김우진 따위와 다시는 손잡을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제 요청도 기억해 주시고 있겠지요.”

칸트는 금방 분위기를 풀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당연하오. 황위 분쟁은 에스테도르의 토벌 이후로 미뤄 달란 것 말이잖소.”

“그것 말고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흠… 팔강의 자리에 오르면 지지해 달라, 그것 말이오?”

그는 진중한 얼굴로 알렌을 빤히 쳐다봤다. 말없이 알렌을 쳐다본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뭔가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강, 팔강이라… 뭐, 알렌 공의 생각이 얕지 않으니 필시 무슨 계획이 있지 않겠소. 하지만….”

그는 입가의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팔강의 자리를 너무 얕보지 않았으면 좋겠소. 나도 아직 수십 년째 이 자리 그대로이니 말이오. 물론.”

그는 조곤조곤 야망 넘치는 젊은이에게 충고하듯 말하며 옅게 웃었다.

“알렌 공은 나보다 젊으니 미래에 가능하게 될 테지만 조금은 뒤를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지. 하하하, 이 조언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군.”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알렌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좋소. 그럼 이야기도 끝났는데, 아가씨나 마저 부르시겠소? 아까부터 들어올까 말까 서성이는 듯한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칸트 라스웰, 그는 알고 있을까.

알렌은 늦어도 5년 안에 팔강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 * *

그렇게 일리아나까지 모여 이 시설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은 칸트가 그녀에게 이곳에 대한 것을 설명해 준다 했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복잡한 길을 거쳐 다시 저택에 돌아온 그를 맞이한 것은 초록색 눈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아칸더스.”

“공자님, 이렇게 직접 뵙는 건 두 달만인 것 같습니다.”

아칸더스는 짧은 인사를 가볍게 올린 후 알렌과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칸더스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주신 임무는 성공적으로 끝마쳤습니다. 고생은… 엄청나게 했지만 말입니다.”

그는 금방 도시로 돌아온 듯 깔끔한 옷을 입었지만, 얼굴은 상당히 임무가 고되었다는 걸 증명하듯 지쳐 있었다.

“이번 임무가 워낙 위험하다 보니 맡길 사람이 자네밖에 없었네.”

“예,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머리가 조금 아플 뿐입니다.”

알렌의 변명 아닌 변명에 아칸더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아칸더스에게 시킨 일은 간단했다.

“나스트론드 평야에 대해 무언가 알아내는 것에 성공했나?”

“예, 수확은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곳에 진입하기 전 지낼 만한 거점도 만들었습니다.”

알렌은 나스트론드 평야에 들어가야 한다.

그건 일부러 영웅적인 행보를 보이기 위한 첫걸음이자 외부에 알리기 가장 좋은 위업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베스틀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들어간다고 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갈 수는 없었다.

“…다만, 모험가 놈들과는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군요.”

그는 허영에 찌든 겁쟁이들을 떠올렸다. 의뢰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나스트론드 평야의 지도를 만들겠다며 수색 의뢰를 받아들이던 놈들은, 진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계약을 다 파기했다.

“용병과는 달리 진짜 모험을 한다는 이들이… 쯧.”

알렌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 고생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결국, 아라흐니 부족과 미니마 부족에게 도움을 받아 조사를 대강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부족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떠나실 때 가실 거점에도 그들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 그들의 안내를 받으면 될 겁니다.”

“그들이 왜 의뢰를 받아들였는지 알겠는가?”

그는 진작에 무슨 사정인지 파악한 듯 거침없이 답했다.

“겉으로는 알렌 공자님과의 연으로 의뢰를 받아들인 듯 보였지만…, 세상이 혼란스럽게 변함에 따라 그들의 거취를 어떻게 할지 내부적으로 말이 많은 듯했습니다.”

“하긴, 몇 년간 그들이 제일 고생이 많았을 거야.”

대사막의 괴물들은 일상적이었으나 3년의 습격을 기점으로 세상은 변했다.

변화를 체감하게 된 것. 대사막 곳곳을 떠도는 유민들과 광휘교 사건으로 몰려들었던 수많은 사람과 그로 인한 수많은 사고.

대사막을 떠돌며 벗어나지 않는 부족들 특성상 지난 몇 년간은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알렌의 도시 비다르 역시 따지자면 갈슈딘 대사막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세력을 위탁하고자 한다면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겠지.

도시의 근처로 오고자 한다면 알렌의 눈에 잘 보여야 할 테니.

‘그런데 아카데미가 아닌 이곳으로 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의 성좌께서 내려주었다는 예언과 관련된 건가?

그건 그들과 만나야 알 수 있으리라.

알렌은 자신이 생각을 마치길 기다리던 아칸더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제 제가 조사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가 조사했던 사실을 입에 담았다.

“그곳에 있는 언데드 중 일부는… 아직까지 정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건 고위 언데드라면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 않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니까 후우.”

“…뭐?”

그는 꺼림칙한 것을 떠올리듯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그곳의 언데드를 다스리는, 왕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스트론드(Nastr?nd) 평야.

시체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시체의 해안이라 불리는 그곳에, 지금껏 나타난 적 없는 언데드의 왕이 있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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