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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92화 (192/212)
  • 제192화

    알렌은 일리아나와 저택 깊숙이 숨겨진 통로를 지나 걸음을 옮겼다. 일리아나는 알렌이 말한 것을 생각하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통로를 건너며 그는 생각했다.

    ‘영웅이라, 영웅….’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은 역사적으로 꽤 많았다.

    멀게는 초대 용사를 영웅이라 칭할 수 있었으며, 가깝게는 팔강 역시 인세의 영웅이라 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영웅인가?’

    알렌은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자신은 영웅이 아니다.

    그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간웅이라 하면 간웅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하나를 위해 다른 모두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은 영웅의 그릇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되어야 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명약관화하다.’

    마왕은 소환될 것이다.

    그건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몇 년의 시간 동안 알렌은 계획했던 일을 준비하는 도중, 그가 알고 있던 원작의 내용과 현실을 비교하며 일어날 일을 예측했다.

    스콜을 비롯한 그늘진 여왕의 도움과, 봉인되었지만 아직까지 뇌리에 남은 검은 책의 내용이 있었기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마왕이 소환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그건 아카데미의 습격이 실패에 그친 이후 에스테도르의 움직임이 멈춘 것에서 기인한 추측이었다.

    만약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갔더라면 그들은 다시 아카데미 습격과 비견되는 사고를 일으켰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건 이후 약속이라도 한 듯 숨어들었다.

    현재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이들은 쭉정이에 불과할 뿐,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전력에 비하면 턱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륙의 여러 세력을 깎아 먹기에는 충분했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유민이나 노예를 보면 알 수 있듯, 대륙은 아직도 3년 전의 상처를 다 치유하지 못했다.

    겨우 틀어막고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 혼란 속 어디에서도 전에 보았던 흡혈귀들이나 유지르에 대한 소식은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뜻은 그들이 아카데미 습격에 실패했음에도 따로 준비한 계획이 성공했음을 뜻했다.

    그렇기에 마왕이 강림할 것은 명백했으며, 검은 책에서 봤던 결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왕을 막고, 놈을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을 바랐다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세력이 부족하다면?

    단순하게 그저 어머니의 출신과, 자신과 루피너스의 관계만 드러내더라도 충분했다.

    개인의 명성이 부족하다면 힘을 더 키우다 새로운 팔강에 도전해도 상관없었다.

    이건 처음 회귀를 인지하고 세웠던 계획에도 있었다.

    하지만, 알렌은 굳이 대륙 어디에도 보기 힘든 양식으로 도시를 설계하고 몇 년간 꾸준한 선행을 해가며 인지도를 올렸다.

    그 과정에서 괴물을 토벌하며 짐승왕의 제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력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잠시 다스리다 떠날 거라는 생각을 비웃듯 도시에 수많은 자원을 투자했다.

    왜?

    ‘마왕으로 끝이 아니기에.’

    저벅저벅-

    둘밖에 없는 발소리가 통로의 벽을 타며 울려 퍼졌다.

    벽을 타고 울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것으로 보아 목적지가 가까워지는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알렌의 목적은 마왕이나 세계 멸망 따위가 아닌 율리우스를 구하는 것, 오직 그것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만을 바라보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자신만을 믿고 따르는 이들도 있었고, 사치에 가깝긴 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모든 일이 끝난 뒤를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검은 신과 하얀 신.

    그래, 위에서 모든 것을 설계했을 초월자들을 진흙탕 속으로 처박기 위해서는 알렌 혼자서는 부족했다.

    아니, 스콜의 세력과 순환교를 비롯한 세력 모두를 합쳐도 모자랐다.

    그러나 마탑 도시 같은 대륙의 거대 세력이 그를 돕는다면, 마탑 도시뿐만이 아니라 제국이나 수인 연합 같은 대륙 유수의 세력이 한마음이 되어 힘을 합친다면.

    그런 초월자에게도 송곳니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할 수도. 하지만.’

    알렌은 뒤이어 떠오르려던 생각을 흩트렸다. 이어지는 계획은 자신조차 어렴풋이 구상만 해두었을 뿐 성공할지 확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도해 보기 전에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

    영원한 전장, 언데드의 천국이자 지역 전체가 죽은 것들로 가득한 나스트론드 평야에 그가 가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곳이 베스틀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알렌은 그곳에 갔을 것이다.

    영웅의 서사시 그 첫 장을 장식하기에 대마경에 버금가는 마경이다. 그곳을 ‘정화’한다면 업적으로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마침 마왕이 강림하기에 배경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알렌이 일리아나를 그 장소로 데려가는 것도 그런 계획에 포함되는 일 중 하나였다.

    툭-

    “앗.”

    일리아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걷다 멈춰 선 알렌의 등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녀는 괜히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알렌의 어깨 너머에는 엄중하게 관리되는 듯한 강철 문이 있었다.

    수십 겹의 자물쇠와 사슬로 뒤덮인 벽은 그 두께만 해도 10cm는 넘어갈 듯했고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마법진까지 새겨 넣은 듯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문 뒤에는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광경.

    그녀는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알렌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강철문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건 함정이다.”

    “…네? 이게요?”

    그녀는 잠시 황당한 눈으로 알렌을 쳐다봤다. 이게 함정이라고? 그럼 진짜 문은 어디에…?

    “그래. 오우거 조차 순식간에 죽을 함정들이 즐비하지.”

    아마 이 함정을 설치하기 위해 투자한 자원과 금액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작은 영지의 한 해 수입에 맞먹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알렌도 마하 황녀가 비밀스럽게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나설 시기를 몇 달 늦췄을 정도였다.

    “그러니 잠깐… 그래 이제 됐다.”

    그러나 그가 향할 장소는 이만한 공을 들일 정도로 그럴 가치가 있었다.

    잠시 정신을 집중하던 알렌이 말을 끝냄과 동시에 공간이 굴절되었다.

    깜박-

    그녀가 눈을 한 번 감고 났을 때에는, 다시 어두운 통로 중앙에 있었다.

    알렌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 통로 중 하나를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서너 번이나 공간을 이동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리아나는 질린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몸이 굳었다.

    “…27구역까지 점검과 가동 이후 일어나는 문제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운행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그것보다 이제 생각해야 할 일은 현재의 기술로 저걸 다시 재현할 수 있냐는….”

    수많은 학자, 연구자, 공학자와 같은 이들이 바삐 주위를 돌아다니며 토론하고 있었고 그들 주위로 여러 기계와 공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중에는 그녀의 흥미를 이끌 희귀한 것도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공간이 이동된 순간부터 단 한 곳에 못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거대한 비공선. 고대 제국에서 사용했다는 병기 중 하나인 비공선이 온전한 형태로 거대한 공동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놀랐나?”

    알렌의 물음에도 그녀는 답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 온전한 게 남아 있었다고? 이걸 안다면 제국이, 아니 그럼 왜 아직까지 조용….”

    일리아나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알렌 공자. 제가 이걸 묻는 게 실례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하는 것에 미리 용서를 구할게요.”

    “그래.”

    알렌은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할지 안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쉬더니 그를 올려다봤다.

    “제게 이걸 보여 주시는 의도가 뭐죠? 공자, 혹시 저한테 진짜 사심 있어요?”

    “비공선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뭐?”

    “저한테 진짜 사심 있냐고요.”

    알렌이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의 당혹스러운 눈빛에도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고대 제국에서 만들었다는 비공선. 아직 제국에서도 복원하는 게 숙원일 정도고, 만약 저게 온전히 가동하기만 한다면 그 가치를 상상조차 할 수 없겠죠.”

    “…그렇겠지.”

    제국에서 억만금을 줘서라도 가지고 싶을 정도로. 그게 안 된다면 무력으로 빼앗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비공선의 자체의 가치는 엄청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비공선은, 하늘의 제공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세계의 발전에 변혁을 일으킬 만한 물건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이 탈 것에 대한 급격한 발전이 이뤄지는 시기에는 더욱.

    “아까 뭘 보여 주려 하기에 그렇게 이동하나 했더니… 저런 온전한 비공선이면 그럴 만하겠죠. 그런데, 왜.”

    그녀는 감정의 동요를 표현하듯 꼬리까지 바짝 선 채로 물었다.

    “저한테 이걸 보여 주죠? 저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요. 비밀을 지키리라는 계약 마법도 작성하지 않았잖아요. 저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강제로라도 작성했을 거 아닌가요? 그런데….”

    알렌은 입을 열려다 그녀의 눈 깊숙이 서린 경계와 불안감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진짜 호감이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다른 뜻이 없냐고 우회적으로 돌려 물은 거지.

    실수로 이것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알린다면 일대에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정보가 있는 이곳에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데려온 것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확실히… 내가 성급했군.’

    최대한 말을 세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또 그녀라면 공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기에 그 공학의 산물인 비공선을 보았을 때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에서는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깊숙한 비밀을 보여 주고, 그걸 구실 삼아 강제로 무언가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를 신뢰하기에 저렇게 농담 삼아 우회적으로 말을 꺼낸 것이 그녀 나름의 배려인 거겠지.

    “일리아나, 이건 내 실수다. 인정하지. 하지만 그 이유는….”

    알렌이 그녀의 착각을 정정해 주며 설명을 해 주려는 그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런… 내가 너무 일찍 찾아온 것 같소. 어찌, 자리를 비켜드리오리까?”

    그들이 고개를 돌리자 기다란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그의 느끼한 미소에 일리아나가 움찔했다.

    “아니면 방 안쪽에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떻소?”

    제국의 수석 집행관.

    그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이자, 황태자가 아닌 마하 황녀의 줄을 붙잡은 자.

    대인전에 한에서는 제국 최강 피에르 베르나프보다 깔끔한 일 처리를 선보인다는 암중의 그림자.

    그리고 알렌이 요한에게 흘렸던 정보를 마하 황녀에게 알려 준 장본인기도 한 남자.

    칸트 라스웰.

    “마침 황녀님의 전언도 도착했으니 말이오.”

    그가 검은 중절모를 검지의 끝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시원하게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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