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알렌은 한때 프란시스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알렌은 그녀가 자신을 신뢰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의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과거에 어떤 예언자에게서 라인하르트 영지로 가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처음 영지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와 자신의 관계는 평범했다.
영지의 후계자와 영지 마법사의 딸.
딱 그 정도였을 뿐.
그녀가 말해 준 예언에 관해서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첫 만남에서는 자신에 대해 믿음이 아직 확고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바뀐 것은 언제일까.
적어도 알렌은 알지 못했다. 마탑 도시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 했을 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밝히며 제게 도움을 주었으니까.
알렌이 끌어들이려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먼저 그를 찾아왔고, 끝에는 그란델을 죽이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때는 그걸로 납득했었다.
그녀의 과거와 동기는 충분히 복수의 명분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의 서클을 깨부순 것과 연금 마탑주가 말해 준 비밀, 알렌 자신의 고민을 생각하는 것으로도 벅찼기에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자님께서 부탁하신 서류예요. 거기에 다 정리해 놨답니다?”
베스틀라의 문답 때, 그녀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찔렀다.
그 의문은 모두 ‘놈들’의 안배라고 했었지.
‘프란시스카 양과 마하 황녀는… 아마도 원래 김우진에게 향하게 되는 안배일 것이다.’
아마 알렌이 가로챈 여러 기연도 마찬가지겠지.
그에 대한 것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기에 걱정을 덜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란시스카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탑에서 만났을 때의 태도가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급격히 신뢰하게 되었다.’
프린달에게 들었던 망념, 과거의 집착에서 비롯된 믿음이라 여겼지만, 처음과 급격히 달라진 태도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키메라 술사 사건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 없었거늘…. 그녀는 왜 그렇게 내가 자신의 복수를 도와주리라 믿은 걸까.
왜?
그 이유를 알고자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에게, 한 장의 고문서 때문이라 했다.
릴리트를 처음 발견하고 조사단에 합류하기 전, 마탑의 고서실에서 얻었다는 문서.
“이걸 조사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난데없이 아벨린에게 접근하라고 하지 않나, 율리우스 주변 인물들과 친분을 쌓으라고 하지 않나.”
그녀는 우연히 마탑의 서고에서 그림이 그려진 고문서를 발견했다.
“프란시스카 양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었으니…. 부담이 되었다면 미안하군.”
그곳에 그려진 것은 ‘미래’의 그림이었다. 푸른 청발의 청년이 마법사의 목을 치는 그림. 그 밑에는 그 상황에 대한 설명문이 적혀 있었다고.
그녀는 그것을 보고 알렌이 예언자가 말했던 사람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저도 3년간 조사하면서 여태껏 몰랐던 사실을 알아냈으니까요.”
알렌이 부탁한 것은 그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녀와 같은 사례가 있는지, 율리우스 주변의 이들에게 그런 경험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
“그래도 성과가 있으니 다행이군.”
“그래도 무리한 부탁이었던 거 아시죠?”
프란시스카는 당당한 어조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태도는 알 만했다. 자신의 고생을 알아달라는 거겠지.
알렌도 그녀의 노고를 인정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정하지.”
솔직히 그도 그녀에게 부탁한 일이 무리한 일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만큼 이 일에 적격인 사람도 없었다. 카트린느도 있었지만, 그녀는 프란시스카와 같은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었기에 논외다.
“우선 제일 먼저 의심하셨던 아벨린은… 아마 맞을 거예요.”
“역시 그런가….”
알렌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지자에게 듣기로는… 그녀가 순환교에서 도망친 이유는, 어느 고문서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어떻게 물어도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그 대신 그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진 걸 보면 평범한 내용은 아니겠죠.”
“그렇겠지. 아벨린 말고 다른 이들 중에는 그런 이가 없었나?”
“3년간 조사했지만 다른 이들은 없어요. 애초에… 아.”
그녀는 생각난 것이 있는 듯 말을 끊었다.
“공자님 밑에도 한 명 있어요.”
“내 밑에도?”
알렌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의문을 표하자 그녀도 우연히 알았다는 듯 생각지 못한 이름을 언급했다.
“신드리 남매요.”
“그들이?”
“정확히는 누나 쪽이요. 저랑은 살짝 다르긴 한데… 그들이 지은 무구점의 이름이 발홀인 건 아시죠?”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조용히 경청했다.
“그렇게 지은 이유가 한 고문서 때문이라더군요. 서재의 장서를 정리하다 발견했는데, 거기에 수십 명의 전사가 수련을 하는 그림이 있었다고 해요.”
밑에는 그 장소가 발홀이라는 것과 뛰어난 전사들이 죽어서 도달하는 장소라 적혀 있었다고.
그걸 보고 그들의 무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고서를 뒤적거리니 뭐가 나오긴 하더라고요.”
그녀는 확실치 않다는 듯 알렌의 손에 들린 서류에 눈짓했다. 그곳에 다 적혀 있다는 말이리라. 프란시스카는 간단한 개요만 알려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벌꿀 술의 행운.”
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워낙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여겨지기에 지금에 와서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조사했을 때부터 그런 이름을 가진 이야기들은 동화처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의 공통점은 세 가지가 있어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간단하든 어렵든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고, 그것에 고민하던 도중 못 보던 고문서를 찾아냈다는 것.
고문서에는 자신의 고민과 관련된 해답이 나타나 있으며 그건 그림일 때도 있고, 글일 때도 있으며 두 가지가 합쳐진 예도 있었다.
마지막은 그녀가 이렇게 번거롭게 입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기도 했다.
“어느 날 그 고문서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
“맞아요.”
“저도 계속 품에 넣고 다녔는데… 눈치챘을 때는 사라진 뒤였죠.”
시기는 마탑 도시의 일이 끝났을 때.
원하던 고민의 답을 이뤘기에 사라진 건지, 더 이상 필요가 없기에 사라진 건지 몰라도 마치 나타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고문서는 사라졌다고.
“제가 모아 온 각종 이야기는 다 그 자료에 모아 놨으니 천천히 살펴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알렌은 잠시 그녀와 잡담을 나누었다.
삼 년만의 얼굴을 맞댄 것이라 그런지 그녀는 할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알렌 역시 용건만 끝내고 내쫓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생각했기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벌꿀 술의 행운이라….’
알렌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다른 곳으로 정신이 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능력이랑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시야 한쪽에 떠다니는 회색 책에 향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침잠되었다.
‘…글일 때도 있다고 했지.’
알렌은 저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회귀 전.
김우진이 정말 악한 것인지, 상황에 휩쓸린 건지 갈등하고 있을 때.
그는 제국의 비사가 담긴 2황자의 수기를 얻은 적이 있었다.
* * *
“어어, 거기 조심해!”
“알고 있으니 앞이나 똑바로 봐, 새끼야.”
“걱정해 줘도, 쯧.”
“내가 몇 년이나 굴렀는데 지랄은.”
험악한 말이 오가는 인부들은 그 말투치고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일상적이라는 거겠지. 일리아나는 그 모습을 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수십의 인부가 미소를 띤 채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널려 있는 건축 자재와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
처음 도시를 설계했을 당시부터 계획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거리는 규칙적이고 깔끔한 형태를 하고 있었고, 아카데미처럼 동서남북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었다.
구획을 나눔으로써 행정을 세밀하게 나누어 관리하는 효율적인 체계.
‘도시의 테마는 마법과 공학의 결합인가?’
얼핏 제국의 모습 같으면서 마탑 도시의 모습도 섞여 있는 형태. 어디에서 보지 못한 도시 고유의 모습에 알렌이 이 곳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역시 악마에게 빙의 당했다는 동생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알렌의 안내를 받으며 깊이 흘러가던 생각을 멈춰 세웠다. 급히 고개를 들자, 알렌이 몇 걸음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알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따라붙는 그녀를 보다 이내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텐데 감상이 어떻지?”
프란시스카를 집무실에 내보낸 후 알렌은 일리아나를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공학에 관심이 많은 그녀라면 어떤 생각을 들려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거나, 구획 별로 잘 설계했다거나 하는 그런 건 다른 이들도 말했을 테니 솔직한 제 생각을 말하자면….”
잠시 말을 끊은 그녀는 벽 한쪽을 쓸어 보더니 알렌을 올려봤다.
“함정. 모험가를 유혹하는 유적의 함정 같다고 느꼈어요.”
알렌은 뜻밖의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공학적인 관점과는 먼 대답이었다. 그녀는 설명이 부족했다 느꼈는지 말을 이었다.
“…분명 좋은 도시예요.”
그녀의 시선이 웃고 떠드는 어린아이들과 하루를 힘찬 노동으로 보내는 이들에게 향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도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유민들을 받아 주고, 급속하게 늘어나는 노예를 구해 살 곳을 마련해 주기도 하며 지속적인 일자리를 지급해 주기까지.
“어딜 봐도 흠을 찾을 수 없죠.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활기찬 분위기는 나쁠 게 전혀 없는데… 너무, 과해요.”
“과하다라….”
알렌은 입 안에서 그 말을 굴리며 시끄러운 거리를 걸었다.
“이런 건축 형식은 아직 어디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해요. 마치 상징성을 부여하려는 것처럼. 거기다 후계자 경쟁을 위해 받은 영지라 들었는데, 이렇게나 투자할 가치가 있나요?”
“내 거점이 될 곳인데 투자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몇 년이나 지낼 줄 알고요?”
그녀는 총명한 눈동자를 빛내며 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라인하르트 영지와 이곳은 아카데미의 포탈이 설치되었다 해도 직접 관리하기 위한 수고가 너무 들어요. 애초에 알렌 공자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낙후된 영지라도 상관없지 않나요?”
“그렇겠지.”
“듣기로는 루피너스 영지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알렌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몇 년 동안 만들어 낸 평판 그리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도시의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건축 자재에 섞인 기하학적인 문양, 그거 마법진이죠?”
“글쎄, 잘 모르겠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이렇게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저보다 공학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은 없거든요? 그런데 도저히 저 문양의 의미를 모르겠어요. 마력도 없고 그냥 예술적인 장식으로 보이지만… 당신이 건축 자재 하나하나에 예술성을 신경 쓸 사람은 아니잖아요?”
알렌은 그녀의 말에 정말 감탄했다.
무력이 약하다 해도 역시 짐승왕의 손녀인가.
‘감이 날카롭군.’
그녀의 말은 옳았다. 애초에 후계자의 영지 통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면 이만한 투자의 반, 아니 십 분의 일 정도만 투자해도 충분하다.
스콜을 비롯한 자신의 세력을 숨기는 것도 마찬가지.
이렇게 이목을 끄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시선을 끌지 않는 게 숨기기에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이유는 모두 자신이 세운 계획 때문이다.
“알렌 공자,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요?”
알렌은 잠시 고민했다. 알려 줘야 하는가? 그녀에 의해 정보가 흘러갈 가능성은 적었다.
그녀의 어조에 깃든 감정은 추궁과 의심이 아닌 걱정과 미약한 불안이었기 때문이다.
‘계획의 첫 시작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알렌은 짧게 고민하더니,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영웅.”
“…네?”
“난세에 영웅은 등장하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잠깐, 그게 무슨….”
그는 거기까지 알려 줬으면 알아서 추리하라는 듯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그의 뒤로 그녀가 잔걸음으로 뒤따라왔다.
그는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 전 선수 쳐서 말했다.
“그만, 앞으로 들를 장소가 더 있으니 이 이상은 직접 생각해 보도록. 아니면… 자신 없나?”
그녀는 자존심을 건드는 발언에 꼬리가 한순간 경직되는가 싶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두고 봐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알아낼 테니까요”
“기대하지.”
알렌은 흐릿하게 웃으며 저택의 문을 지났다.
아직 그녀와 갈 곳은 한 곳이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