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아직 때가 타지 않아 고풍스러운 모습은 없었으나, 갓 지어진 듯 깨끗함이 돋보이는 집무실.
그곳에 알렌이 앉아 있었다.
“……말씀해주신 부분을 다 처리했습니다. 떠도는 유민 중 범죄 경력이 있는 이와 심성이 악독한 이는 걸러냈고, 일시적으로 늘어난 노예를 구할 수 있는 만큼 모두 사들였습니다.”
“식량이나 거처의 부족함이 있지는 않았나?”
“처음부터 대도시를 세울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했기에 충분히 수용 가능합니다.”
“잘했다. 이넬리아.”
그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렌은 제법 일에 익숙해진 듯 완숙함이 엿보였다. 그는 도시의 문제가 적힌 서류를 처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리아나와 프란시스카는 아직인가?”
“거리를 고려해본다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다른 인재들도?”
“예, 새로 생기는 도시인만큼 기반 시설의 열악함이나 올라갈 수 있는 자리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곳에서 일하겠다 자원한 이들은 적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가롭게 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알렌의 영지에는 단 하나의 도시만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말 그대로 하나만 있다는 의미는 아니였다. 그의 눈에 보기에, 아니 페르타나 엘피스에 살던 이들이 보기에 도시 비다르를 제외한 곳은 도시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시설이 낙후되어 있었다.
소도시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작기도 했고.
그렇기에 새롭게 영지의 주인이 된 그가 세운 도시는 이 일대의 유일한 도시라고 해도 무방했다.
새로 도시의 행정을 담당할 이들은 그것도 모른 채 희희낙락하는 것 같았으나….
“그들의 선택이니 어쩔 수 없지.”
“이미 계약은 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배치받자마자 받게 될,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의 양에 일차로 질릴 것이다. 계약 날짜가 몇 년은 더 남았다는 것에 이차로 절망할 것이고.
“스콜 쪽에서는 아직 성과가 없나? 분명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처음엔 도시 하나 정도의 규모밖에 되지 않았던 스콜은, 현재 많은 성장을 거쳐 알렌조차 모든 이들을 알지 못할 정도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대륙이 혼란스러움을 타 각 세력에 숨어들었다.
여기에는 순환교의 노하우는 물론, 그늘진 여왕의 도움까지 있어 이제 더는 정보를 얻기 위해 정보 길드에 들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만들어질 무렵만 해도 조직의 특정상 무력은 부족했지만, 그것도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그늘진 여왕 덕분이었다.
그늘진 여왕은 이렇게 있다가 음지를 되찾는 것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리리라 생각했는지 재능이 있는 이들을 뽑아 훈련을 시켰다.
얼마 전부터는 슬슬 그녀를 배신한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선다는 소식도 들었으니 곧 성과가 나올 터.
알렌은 굳이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자들을 죽이고 그들이 그 지역의 음지에 자리 잡는다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에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의아한 점은 그렇게 해 봤자 알렌 자신의 세력, 스콜이 장차 음지를 장악하게 될 텐데 그녀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 확실한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상 아카데미가 습격당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도저히 모르겠군.”
“…네? 무엇을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이넬리아가 불쑥 내뱉은 그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알렌은 고개를 저으며 스콜에 관한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지금은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쪽에는 별다른 말이 없나?”
“그게, 엘리자 님이 아직은 괜찮지만 순환교도들이 더 필요할지 모르니 더 보내 달라고….”
“또 인가….”
알렌은 그녀의 부탁에 이마를 눌렀다. 벌써 지난주에 일백 명의 순환교도들을 보내 놓았다. 그런데 또 보내 달라니.
“벌써 몇 명이나 간 건지.”
어머니가 자신에게 사도의 직위를 언급한 3년 전부터, 그는 그녀의 요청으로 꾸준히 순환교도들을 보냈다.
그것을 위해 사도의 권력이 남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순환교 쪽에서는 아무 말이 없던가?”
“예, 오히려 원한다면 다 보내도 상관없다고.”
“…신성력 때문이군.”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순환교는 달에 수십 명씩 순환교도들을 데리고 하는 실험에 믿음이 그리 크지 못했다. 그저, 사도가 하자는 일이었기에 별 불만을 품지 않았을뿐.
신성력을 인공적으로 되살리는 실험이라니, 말이 되는가?
그 상황이 바뀌게 된 건 우습게도 진짜 신성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나타나면서였다.
광휘교.
‘아마 죽기 직전에 율리우스와 함께 있던 이들이겠지.’
그들의 정체에 관해 짐작이 가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등장에 진짜 신성력이 사용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생겨나자 순환교는 어머니의 실험에 전폭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업무 몇 개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어도 개의치 않았다. 광휘교의 존재가 그렇듯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은 믿음을 증명하고 교세를 넓힐 수 있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후, 원하는 대로 보내 주도록 하고….”
알렌은 그녀가 따로 건네준 서류를 살폈다.
그의 세력은 지금 기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스콜과 순환교 그리고 어머니의 세력.
그러나 그들은 연계되어 있음에도 서로의 정확한 정체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몇 명은 짐작하고 있겠지.’
어머니의 일과 같이 완전한 협력이 아닌 필요할 때만 돕는 방식.
그 방식은 비밀을 지키고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상층부의 존재를 숨길 수 있었지만…, 효율이 너무 낮았다.
지금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충분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힘들겠지.
그러나 선뜻 서로의 정체를 공개하기 어려웠다.
‘율리우스에 대항하려는 목적을 지닌 스콜과 어머니가 직접 만든 세력이 제대로 협력할 수 있을까?’
그들 처지에서는 주군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나, 그 스콜의 주인 역시 주군의 아들인 기묘한 상황.
거기다 더 문제는 순환교였다.
대륙이 대표적인 사교를 뽑으면 나올 이름으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종교.
앞의 둘은 어찌어찌 융화시키더라도 순환교를 드러내는 순간 난감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알렌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다음 일을 처리하기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난 잠시 생각할 일이 있으니 저녁 시간이 된다면 부르게.”
“예, 알겠습니다.”
“일리아나랑 프란시스카가 도착하면 곧바로 알리고. 아, 그리고….”
알렌은 잠시 말을 골랐다.
“린벨은 안 돌아온다던가?”
“…네.”
그녀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린벨 또한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 라인하르트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간 후, 편지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연락이 없었다.
더 강한 힘을 갖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는데….
“…알았다. 너무 늦으면 내가 말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철컥-
이넬리아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기더니 방을 나섰다.
알렌은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는 익숙해진 가주실. 대수림에서 특별히 주문한 가구뿐만 아니라 일리아나가 봤으면 좋아할 기계로 만들어진 것들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지난 3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아카데미를 나온 이후 후계자 수업이자 경쟁의 일환으로 영지를 수여 받고… 앞으로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미래를 준비했다.
도시를 대도시 못지않게 키우려는 것도 그렇고, 알렌이 이넬리아를 비롯한 몇 명에게 순환교의 존재를 알린 것도 그렇다.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을 뽑자면 이것이었다.
“벌써 3년 전이군.”
그 일로 인해 그는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의 앞으로 세 권의 책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검은 책, 하얀 책, 회색 책.
그중 검은 책과 하얀 책은 중앙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로 무형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하이젤의 공격으로 꿰뚫린 두 권의 책은 봉인이라도 된 듯 다시 열리지 않게 되었지.
처음에는…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목적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율리우스를 되찾는 방법을 찾고, 그것이 어려워진다면 김우진을 죽인다.
그것과 관련된 정보를 모았고, 방법을 찾으려 했으며, 조직을 세웠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었기에,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갈피를 잃었다는 게 맞는 말이리라.
무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다음은?’
베스틀라의 대화 덕분에 그와 율리우스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젤이 말하던 꼭두각시는 그들의 목적도 모른 채 움직이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고, 책들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준 혜택이었지.
그가 하는 일에 약간의 행운이 따라붙은 것도 그의 일환일 것이다.
물론 아직 모르는 일도 많았다.
도대체 끝이 어떻길래 그렇게 경계하는 건지.
절대적인 힘을 가진 그들이 나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이 선택된 것과 별개로 존재하는 가문의 비밀은 어떤 것인지.
하지만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했던 일을 계속해도 상관없는 것인가? 아니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끝을 대비하며, 무슨 행동을 해야 되지? 강림한다는 마왕은 그것과 다른 건가? 그렇다면 시기는….
베스틀라는 잠들어 있었고,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때, 나타난 것이 이것이었다.
알렌의 시선이 남은 한 권의 책으로 향했다.
회색 책.
예전엔 쇠사슬로 감기어 열 수 없었던 책이 지금 아무런 제약 없이 그의 앞에 떠 있었다.
‘환생자.’
그런 제목으로 쓰였던 것과 달리 진실로 환생자로 칭할 만한 하이젤 앞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 때문에 하이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알렌이 책장을 넘겼다.
‘회색 책은 다른 두 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건 알렌이 처음 책을 펼칠 수 있었을 때부터 느꼈던 감상이었다. 회색 책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에 책의 뒷쪽은 찢기기라도 한 듯 사라진 상태였지.
알렌이 책의 이용법을 알아낸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원하는 것을 보여 준다라….”
자신이 알고 싶은 정보의 단서를 주는 것.
그것이 알렌이 파악한 회색 책의 효과였다.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몰랐으나 3년간 책을 연구한 그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그의 시선이 책의 그림에 향했다.
첫 장에 그려진 건 하늘을 뚫을 듯 거대한 검과 그 밑에 모인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제단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제단 위에는 한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그 주위로 용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뒷장에는 거대한 옥좌에 언데드로 변한 거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앞으로 수천의 언데드 군세가 늘어서 있었다.
앞 장에 그려진 그림의 의미가 명확해졌다.
이런 그림이 나온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상담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베스틀라를 원했다.
그렇기에 그림이 베스틀라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베스틀라와 거인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일 테니.’
앞 장에 나온 것은 명확했다.
크기가 달라졌다고 자신의 검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문제는 뒷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3년 전의 이야기.
“우연인가, 아니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책의 농간인가.”
언데드 궁전은 나스트론드 평야의 중심에 있다.
알렌이 여러 모험가를 고용해 알아본 결과였다. 그는 언데드가 무수히 존재하는 마경에 많은 재원을 소비해 정보를 수집했고, 의뢰를 내건 지 한 달 만에 정보를 찾아냈다.
나스트론드 평야, 즉 무수한 언데드가 넘치는 마경의 중심까지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알렌은 베스틀라를 깨우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움직임에 제약이 있던 스콜의 본거지를 이곳으로 옮겨야 하기도 했고, 그의 기반이 될 장소인 만큼 빈 평야나 다름없는 이곳을 최대한 발전시켜 놓기도 해야 했다.
개인의 무력을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
검술 쪽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지만, 마법 쪽에서는 뜻밖의 성취가 있었다.
앞으로 실전에 나간다면 어떨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영지를 떠나도 상관없겠지.”
알렌은 나스트론드 평야의 중심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