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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88화 (188/212)
  • 188화

    하이젤이 알렌의 몸을 차지한 놈과 전투를 하던 그때, 마리아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나서야 할까.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할까.

    아나스타샤가 말했던 시간까지는 아직 더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상황이 변했다. 아나스타샤가 말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고 팔강의 전투도 각자 무르익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황이 달라졌으니….

    ‘나서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각인(刻印).

    어린 새가 제일 처음 본 이를 자신의 어미로 여겨 졸졸 따라다니는 본능. 그녀는 어릴 적부터 무수한 훈련과 아나스타샤의 조정을 거쳐 왔다.

    지금의 그녀는 도저히 아나스타샤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마리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것뿐. 알렌과 만나는 것도 아나스타샤가 반쯤 묵인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것도 이번 사태가 끝나면 렌을 처리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만약 아나스타샤가 자신에게 알렌을 만나지 말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요즘 아나스타샤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알렌에게 회색의 끝에 대해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도 들켰을지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다시 조정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고.

    조정받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로 발돋움하는 그 기분.

    짧은 전투에도 엄청난 심력과 감정이 거세되는 감각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는데…. 아나스타샤에게 행동을 다시 교정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약 선택하게 된다면.’

    마리아는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끝에는 버티지 못하고….

    그녀가 갈등하던 그때, 들릴 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사라진 천상의 잔재를 보게 될 줄이야.”

    마리아는 목소리가 들린 즉시 반응했다. 아니, 반응 ‘하려’ 했다. 남자가 먼저 자신의 어깨를 누르기 전까진.

    꾸욱-

    “워워, 진정해. 너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단지 흥미가 돋아서 말이야.”

    그녀는 그것만으로 저항을 포기했다. 순식간에 계산을 끝마친 그녀의 머리는 ‘어떠한’ 수를 사용해도 그에게 닿을 수 없으리라고 속삭였다.

    “물건만 가져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런 작품을 또 볼 줄은 몰랐네.”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지나간 세월을 증명하듯 뿌리 쪽이 하얀 흑발과 그에 반비례한 젊은 얼굴. 눈빛이 맑다는 것을 제외하면 밖에서도 흔히 보일 평범한 얼굴이었다.

    “선지자는 거절하고, 시녀 쪽도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하고. 다시는 이런 작품을 못 보리라 생각했는데…, 운이 좋아.”

    그녀는 말없이 그를 관찰했다. 조금의 틈이라도 나올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너, 나랑 같이 갈래?”

    마리아는 거절을 입에 담으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아차,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네. 내 이름은 샨 미야크이자… 세간에서는 무신이라 불리고 있지. 지금은 왈홀의 부탁을 받고 여기에 왔어.”

    무신(武神) 샨 미야크.

    몇 년쯤 돌연 모습을 감추었고, 생사도 파악되지 않는 자.

    세간에서는 도전을 받지 못하는 팔강이니, 그가 아무리 팔강 중 제일이라 해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둥 말이 많은 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어딜 가는지 모르겠지? 뭐, 지금은 몰라도 돼. 어쨌든… 이제 내가 누군지 안 것 같으니까 다시 물을게.”

    그는 멈칫거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활짝 웃었다.

    “날 따라올래? 그러면 지금 네가 생각하는 건… 어지간히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시선이 꺼진 화면을 향했다.

    아나스타샤의 것이 아닌, 알렌의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셋의 전투가 끝나는 순간 무조건 들킬 것 같으니까.”

    샨 미야크는 웃으며 허공에 발을 내디뎠다.

    그의 몸이 마리아의 앞에서 사라졌다. 마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화면을 응시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 * *

    “…그게 끝이냐?”

    가이온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짐승 같은 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상대의 목을 쥐었다. 그의 손에 잡힌 흡혈귀는 조여 오는 손아귀에 하얗던 낯빛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렸다.

    같이 왔던 셋 중 둘은 죽었다.

    “그래, 그게 끝이다.”

    흡혈귀는 보통 불사의 존재로 불린다.

    피 한 방울만 있으면 살아난다는 진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은 여느 뱀파이어 클랜의 로드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 장담했다.

    그런 이를 가이온은 아무렇지 않게 쳐 죽였다.

    ‘특히 재생력의 대책이랍시고 산 채로 불태우는 모습은….’

    미친놈이나 다름없었다.

    가이온은 남은 둘의 협공을 받아 내면서 기어코 다른 하나를 붙잡아 불태웠다. 그 탓에 자신의 팔도 화상을 입어 검게 그을렸으나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거기에 숨겨져 있다….”

    “들어가려는 생각인가? 역시 짐승답게 열등하군. 감히 혈족도 아닌… 커억.”

    “닥쳐라.”

    가이온은 손아귀를 틀어쥐고 있는 힘껏 머리를 박았다. 으르렁거릴 때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그를 물어뜯을 듯 서늘하게 반짝였다.

    “넌 정보만 뱉으면 된다. 아니면 남은 둘의 곁으로 금방 따라가고 싶나?”

    “…카흐흐, 그래도 상관없지.”

    그는 죽은 다른 둘과 같이 산 채로 불탈 상황에 처했어도 이죽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목숨보다 기품이 더 중요했다. 흡혈귀 벨두크는 조소하며 그를 바라봤다.

    “네가 강한 건 인정한다. 로드 급 실력을 가진 우리를 처리했으니 우스워 보일 만도 하지.”

    짐승왕의 강함은 확실히 그들이 알던 것보다 강했다.

    “하지만 고작 우리가 끝일 것 같나?”

    가이온은 그의 말을 막지 않았다. 흡혈귀들이 머무르는 그림자 열도에 관한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것을 위해 몇 분간 살려두는 것쯤은 고려할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모기가 모여봐야 어르신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

    벨두크는 가이온이 정보를 캐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의 물음에 어울려주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셋.”

    “…뭐?”

    “내가 이길 수 없다 장담하는 이들의 숫자다. 왜, 놀랍나?”

    그는 가이온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서렸던 놀람을 읽어냈다. 벨두크는 자신이 살아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놈의 겁먹은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실력은 나쁘지 않다. 본토에서도 어지간한 이들보다 강하지.”

    그건 가이온도 인정했다.

    팔강 급이 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대결이 성립하지 않을 정도. 끔찍한 재생력과 기상천외한 공격 수단은 그것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이번 일로 나와 비슷한 로드 급 실력자 셋을 잃었다. 다른 쪽 상황도 다르지 않겠지. 도망쳐봐야 고작 하나 정도일까.”

    총 여섯의 준 팔강 급 실력자.

    대륙에서도 매년 팔강에게 도전하는 만큼 강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지금 벨두크의 말은 마탑주 급의 강자들이 이번 전투에 목숨을 잃었다는 말이었다.

    “나와 비슷한 이들이 열은 더 있고, 그런 이들을 다 합쳐도 못 이기는 실력자가 셋이 더 있지. 다시 말해….”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너만 한 강자가 셋은 더 있다는 말이다. 이제 이해했나? 감히 짐승 따위가 우리의….”

    뚜두둑-

    목이 부러지자 천하의 흡혈귀도 공기 빠지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가이온은 그 우스운 꼴을 지켜보면서 놈의 귓가에 속삭였다. 죽어서도 기억하도록.

    “역시 모기라 그런가, 쫑알쫑알 시끄럽기 짝이 없군.”

    그런 것 따위에 겁먹어 개처럼 꼬리 말 시기는 지났다.

    가이온은 한 손으로 놈의 덜렁이는 목을 붙잡으며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이사장에게서 받아 낸, 순수한 태양의 불을 담아냈다는 고대의 마법.

    일반적인 불로는 이만한 흡혈귀를 태워 죽이긴 힘들다.

    “쯧… 그 할망구한테 또 받아 내려면 얼마나 묶어 둘지.”

    그에게도 몇 장 남지 않은 물품이었으나 가이온은 망설임 없이 찢었다. 하얀 불이 순식간에 옮겨붙으며 놈의 몸을 태웠다. 반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끄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

    그는 고고했던 태도는 거짓이라는 듯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놈을 풀어주는 일은 없었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흡혈귀는 끔찍한 비명을 몇 분이나 내지르다 숨을 거뒀다.

    손을 놓자 땅에 부딪친 숯덩이가 바람에 날렸다.

    “…이제 때가 되었나.”

    놈의 말대로라면 마탑 급 세력, 아니 마탑과 아카데미를 합친 정도의 세력이다.

    그만한 세력을 홀로 상대한다는 건 그에게도 부담되는 일이었으나…, 그에게도 비장의 패가 있었다.

    “아니,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그곳으로 향하기에는 알렌의 실력이 불안했다.

    짐승왕 가이온.

    그가 알렌을 보자마자 제자로 받아들이려던 이유는 하나였다.

    “본래는 찾자마자 가려 했는데, 어르신만 한 강자가 셋이라….”

    계획을 바꿔야 한다. 적어도 알렌이 팔강의 최하위 급까지는 상대할 수 있을 때까지만. 얼마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제자의 성장세는 그도 놀라울 정도였으니까.

    그는 이내 상념에서 벗어나 몸을 돌렸다.

    쿠웅-

    공간의 진동이 점점 강해졌다.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율리우스의 일검이 결국 남아 있던 흡혈귀 하나의 심장에 꽂혔다.

    그러나 이 정도로 흡혈귀는 죽지 않는다. 놈이 기회를 틈타 달아나려는 찰나, 푸른 뇌전이 터져 나왔다.

    꽈르릉-

    그의 검에서 일어난 뇌전이 흡혈귀의 몸을 지졌다. 그의 마력은 마기와 사기 같은 삿된 것에 상극이라, 흡혈귀에게 영향이 없지는 않았으나 효과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흡혈귀가 언데드라 해도 결국엔 살아있었기에.

    그렇기에 그가 언데드를 해치우는 방법은 간단했다.

    ‘죽을 때까지.’

    재생력이 다 떨어져 회복하지 못할 때까지 뇌전으로 몸을 불태운다. 수고가 꽤 많이 드는 행위였으나 율리우스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번 일이 끝난다면 자신이 얻을 명성이 엄청나다는 것을.

    그는 그것을 위해 흡혈귀를 마무리 지은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자크니르와 함께 원래대로 돌아오는 공간을 돌아다니며 마족들을 죽였다.

    “감히 네놈이…!”

    “역시, 믿지 않….”

    간혹 그를 알아보는 마족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이 말을 잇기도 전에 죽였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무너진 건물 사이에 있던 주민을 구출하고, 위기에 빠진 생도들을 돕는다. 자크니르가 무리하게 움직인 반동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걸로 벌어들일 공적치가 얼마야.’

    팔강이 부상을 당했고, 그런 팔강을 도와 아카데미를 습격한 침입자를 물리친다.

    그와 동시에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출하고 마족까지 처치한다. 학교에 침입해 있던 마족들도 있었을 테니 가산점도 붙을 터.

    이 정도 공적치라면 스톰브링거를 구했던 공적치의 몇 배를 우습게 벌어들일 것이다.

    “율리우스!”

    “우리도 도울게.”

    그리고 다른 이들도 도왔다.

    아이린이나 헬레나 그리고 나타샤나 비엘리를 비롯한 고향이 있는 이들은 지원군에 가담했지만, 몇 명은 아카데미에 남아 있었다.

    대표적으로 순환교에 숨는 처지인 아벨린.

    후원받아 아카데미에 들어왔기에 고향이 없다는 세라.

    카타린느도 가문의 연락을 받았다며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김우진은 웃었다.

    자신의 선택은 옳았다.

    아니, 옳을 것이다.

    전투가 끝났다.

    “율리우스 라인하르트!”

    “와아아아아!”

    “율리우스! 율리우스! 율리우스!”

    살아남은 아카데미의 승리였다.

    ***

    율리우스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아 상까지 수여 받았다.

    수많은 공적치와 명성을 손에 넣은 그는 에스테도르로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리아는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이사장은 그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그 탓일까, 새벽이 되면 아카데미에 귀신들이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이젤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에 그들의 목적에 인재들의 납치와 살해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진위는 알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자체적으로 수색을 했으나 아카데미 역시 일손이 모자랐기에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자크니르는 아카데미 보고에 있는 특별한 엘릭서를 통해 부상을 회복했다.

    짐승왕은 이번 연도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계약을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사장은 그를 붙잡기 위해 여러 조건을 제시했으나 그는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다행히 마도 여황이 아카데미에 머물기로 하며 합의를 봤다.

    마탑 측에서는 기겁할 만한 일이었으나, 그녀가 양방향 공간 이동진, 통칭 포탈을 공개함으로써 아카데미와 마탑이 상시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기에 결국 받아들였다.

    애초에 마도 여황이 하기로 했기에 말릴 수도 없었지만.

    지원군으로 갔던 이들도 학기 말이 되었을 때쯤 다들 복귀했다.

    애초에 에스테도르가 대륙에 혼란을 일으킨 목적은 시선을 분산시키고 시간 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계획이 실패하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습을 감췄다.

    이런 혼란 때문인지, 여러 갈래로 갈라졌던 이들이 합쳐지며 하나의 세력이 되기도 하고, 제국에서는 넓혔던 영토를 도로 뱉어내야 하기도 했다.

    대신일까, 제국 무투제에 참가했던 이들이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고 제국에 투신하는 일도 있었기에 전력을 증가시킨다는 목적은 이루게 되었다.

    수인 연합은 오랜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힘을 합치겠다 선언했으며, 엘프 대수림에서는 폭등하는 식량의 가격을 낮게 조정하며 인망을 사게 되었다.

    사재기하던 상인들은 죽상이었으나, 다른 이들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죽고, 또 새롭게 이름을 떨친 가운데.

    1학년 차석 하나가 1학년을 끝으로 아카데미를 떠난 것은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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