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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86화 (186/212)
  • 186화

    그녀의 물음에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녀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것이 환각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가 확신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언젠가 들어 본 목소리 같았다. 아마… 용의 노심을 만드는 데 성공했던 날.”

    그날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자신과 율리우스가 나오는 꿈. 그때 저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도 베스틀라가 아닌가 의심했지만….

    “푼수처럼 말투가 바뀌기에 잊고 있었지.”

    「누가 푼수예요!」

    그녀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이제야 그녀답다는 생각에 알렌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긴장감은 한결 적어졌다.

    “어쨌든 네 질문에 답해 주자면… 너에 관한 이야기만 없지 않았나.”

    「아.」

    자신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보여 주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삶에서 하이젤과 같이 큰 변수라 할 만한 건 그녀가 유일했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만 빠져 있었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나 보지?”

    차라리 그랬다면 알렌도 그녀가 베스틀라라고 확신하지는 못했겠지. 스콜의 이름을 지어 주는 거나, 유적의 괴물을 알아보는 것이나.

    알렌이 일부러 묻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에 관한 궁금증은 자신이 제일 컸다.

    “그래서, 네 진짜 정체는 뭐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저희가 가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알렌의 앞으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익숙한 시야와 눈높이. 자신이 바라보는 시점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와 같을 것이다.

    「그 안에 다 이야기하기도 힘들고요.」

    “…나, 인가?”

    「정확히는 그 몸을 차지한 다른 놈이지만요.」

    화면으로 보이는 전투는 격렬했다. 하이젤은 아까 보여 준 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끝도 없이 다양한 수단을 꺼내 들었고, ‘알렌’은 그 모든 것을 깨부쉈다.

    그것으로 모자라 하이젤이 조금씩 밀리는 것이 그의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버틸 때까지가 기회예요. 본래 이것도 힘들었지만, 그녀 덕분에….」

    “그녀라면, 밀레드?”

    「네. 아마 그녀가 원한 것도 당신이 직접 이 광경을 보는 것이었을 거예요.」

    저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이렇게 당신과 대화하게 되었지만요.

    알렌은 잠시 밀레드에 관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이런 짓을 해 줬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건가? 혹시 그렇다면 그녀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나?’

    알 수 없다.

    알렌은 풀리지 않는 고민을 접어두고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능력을 쓰고 잠들어야 한다는 것도 거짓인가?”

    「아뇨? 그건 진짠데요? 단지 혹시나 해서 며칠 전에 깨어나고 잠든 척한 것뿐이에요.」

    그는 그녀가 잠들기 직전 보인 기세를 떠올리고는 수긍했다. 검에 갇혀 능력이 제한되었더라도 그만한 힘을 가졌다면 오래 잠드는 것도 이상하다.

    「시간이 짧은 건 아니지만 넉넉하지도 않으니 얼른 질문해 봐요. 진짜 늦으면 밖에서 대화 못 한다니까요?」

    “그럼….”

    알렌은 고민했다. 무엇을 물어야 하지? 하이젤에 대한 것? 그녀의 정체? 모든 게 궁금했지만 한 가지를 꼽자면….

    “진짜, 율리우스는 어디 있지?”

    그는 이 물음을 던질 때 긴장 어린 얼굴을 했다. 그만큼, 그에게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에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몰라요.」

    “…그런가.”

    그의 얼굴에 드러난 실망감 때문일까, 그녀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알렌 엄청 미안한데 저도 몰래 율리우스가 가까이 왔을 때 사라진 영혼에 대해 추적을 해보려 했는데…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더라고요.」

    “도와주려 했던 건 고맙군.”

    「찾지도 못했는데요.」

    그녀 정도의 실력자도 모른다? 그 말은 그보다 더 위의, 자신의 몸을 차지한 놈들이….

    밝지 않은 전망에 알렌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그들이 진정 그랬는지 알 수 없었으니.

    하지만 알렌도 지금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아는 듯 어두운 표정을 지웠다.

    아니라도 그래야 했다.

    비통해한다고 상황은 해결되지 않으니.

    원래 모습을 되찾은 그가 말했다.

    “…시간을 낭비해서 미안하군. 질문할 거리를 정리하려고 하니, 아까 말하던 것을 계속해 주지 않겠나?”

    베스틀라는 급한 마음이 묻어나오는 듯 거절하지 않았다.

    「알렌, 아까 보여 줬듯이 당신의 행적이 과거의 누군가와 닮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거예요. 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은근히 따르는 행운과 잘 풀리는 사건. 고난은 있을지언정 그 문턱이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테고요.」

    “부정하고 싶지만… 그렇지.”

    지금껏 자신의 힘으로 넘겨 왔던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 김우진과 다를 것 없다니.

    “그럼, 내가 한 행동 모든 것이 운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건가?”

    그의 얼굴에 나타난 허탈감에 그녀는 단호히 부정했다.

    「그건 아니에요.」

    “…아까는 같다고 하지 않았나?”

    「미리 말해 두자면… 알렌, 당신은 굴레에 집어넣기에 자격이 부족한 인물이에요. 」

    알렌은 그녀의 말을 더 들어 보겠다는 듯 침묵했다.

    「보통 ‘그들’이 원하는 인물은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는 그 시대의 주역에 어울리는가. 두 번째는 그 시대 안에서도 최상위권의 재능을 타고났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말로서 움직이기 쉬운가.」

    “그 말은….”

    「당신은 그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아요. 시대의 주역에 어울린다기에 망한 백작가의 신분, 재능도 수재라 할 수 있으나 정말 천재인 이들에게는 비할 수 없죠. 마지막으로는….」

    그녀는 진심으로 재밌는 것처럼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너무 총명해요.」

    천재는 특정 분야를 제외한다면 허술한 면이 있다. 높은 지위의 인물은 꺾을 수 없는 완고함이 있지.

    「그러나 당신은 너무 철저했어요.」

    “…내가?”

    아니다. 알렌은 최대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 다른 이들과의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지. 딱히 철저하다기에는….

    「처음부터 10년간의 계획을 철저히 짜 두고선, 뭐라고요? 처음에 당신 생각을 알았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데….」

    자신이 키워야 할 무력의 최소치. 만나야 할 사람과 필요한 자금, 포섭해야 할 인물과 달성해야 할 단기 목표.

    그때그때 얻은 정보에 따라 세세한 내용은 달라졌지만, 큰 틀 안에서 알렌은 모든 행동을 조정했다.

    편집증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그 때문에 본래는 운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도 세세하게 파고들었죠.」

    “……내 처지에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에요. 당신 동생, 아니 그놈만 봐도 알잖아요? 자신이 얻은 행운을 이용하기 바쁘지 그 근본적인 것엔 관심을 갖지 않잖아요?」

    상태창이나 퀘스트, 빙의와 같은 것들.

    알렌처럼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처럼 기껏 얻은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적다.

    「당신이 선택된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이번 시대에 방침을 변경한 것도 있고.」

    그녀는 확실치 않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 가문의 특수성도 있을 거예요. 동생과의 관계성도, 부족한 자격을 충족시켜줬다고 봐야겠죠.」

    두 명을 선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편이 서로의 대척점이나 대적자가 되어 끊임없이 경쟁하기 때문이다.

    혼자 선택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실력이 정체된다. 그들의 계획안에서, 그들은 끝없이 강해져야 했다

    “그것이 네가 말했던 굴레나 하이젤이 말했던 꼭두각시와 관련이 있나?”

    「맞아요!」

    그녀가 앞에 있었다면 정신없이 날아다녔을 정도로 시원하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쉽게 말해 아까 이상하단 것 같이, 알렌 당신처럼 하는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되는 걸 말하는 거예요.」

    “…가끔 하얀 책에서 나왔던 글귀 같은 것이로군.”

    알렌은 그것에 숨겨진 위험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누군가 설계해놓은 길을 걷듯 따르는 것. 보기에는 좋다.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이용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겠군. 정말 꼭두각시처럼 맹목적으로….”

    잠깐.

    잠시나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그는, 자신이 어느 순간 위험을 피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콜의 방칙을 바꾼 것.”

    하얀 책의 지시를 따라 유적에 간 그는, 유적 실습에서 동료 셋을 잃었다.

    그 경험 탓에 자신이 처음 세웠던 결심은 흔들렸고, 노아의 사건을 겪으며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마탑 도시에 가서 생각이 바뀌었지.

    율리우스도 중요하지만, 다른 이들 역시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저도 놀랐던 부분이에요. 정말, 우연찮게 굴레를 벗을 뻔했거든요.」

    꼭두각시, 굴레 그리고 운명.

    그를 칭하는 말은 많다.

    그러나 안의 내용은 다르지 않았다. 벗어날 수 없고, 그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알렌은 그때 한 번, 굴레를 벗을 뻔했다.

    「하얀 책이 한동안 조용했던 이유 있죠? 그것도 모두 그것 때문이었어요. 함부로 건들다가 정말로 벗어날지도 몰랐으니까요.」

    지금 다시 나타났다는 말은, 알렌이 율리우스를 구하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기에.

    그녀는 정말 입이 근질근질했다는 듯 미주알고주알 알고 있는 것을 내뱉었다.

    그렇게 입을 열던 중에 공간이 흔들렸다. 주변의 어둠이 깨질 듯 균열이 일었고, 알렌의 몸을 감싸던 빛무리도 흩어질 듯 흔들거렸다.

    화면을 보자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하이젤의 모습이 변해 있었다.

    눈 한쪽은 감겨 있었고, 몸 전체엔 상흔이 가득했다. 누더기로 변한 장비와 부러진 마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말하지 않은 게 많은데 어쩔 수 없네요. 딱 하나만 명심하세요.」

    그녀는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다급히 말을 이었다.

    「무력을 더 키워야 해요. 당신이 굴레에 반발한다고 정체되었다간 결국 후회하는 건… 당신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하지.”

    알렌도 무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진짜 율리우스를 못 찾으면, 놈을 죽이려는 생각이었다. 그가 정체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하이젤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결심한 듯 결연히 답했다.

    「알렌 나가면 잠시, 1초라도 좋아요. 조금만 버텨 줘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몰라도… 변수는 있을수록 좋아요.」

    알렌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갈등을 느낀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네가 치러야 할 대가가 뭐지?”

    「그게… 이번에도 잠들 것 같아요.」

    저번이랑 다른 점은 정말로 언제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선택은 당신에게 맡길게요. 반대하면 저도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니까. 그런데 알렌, 정말 그는….」

    “하겠다.”

    알렌은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하이젤의 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민과 기대는 그 역시 그녀가 하이젤이 무언가 해 주길 기대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균열에 다가갔다.

    그러나 움직이기 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슴이 조금 떨렸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면.”

    알렌은 제일 먼저 떠올랐으나, 묻어뒀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율리우스와 관련된 내 감정은, 진짜인가?”

    그녀가 답을 말했다.

    알렌은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렌’이 하이젤을 죽이기 직전, 그가 조용히 내뱉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지.”

    「…어, 그, 어. 제가 일부러 숨기려는 게 아니라….」

    알렌은 픽 웃고 어둠의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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