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85화 (185/212)

185화

시간을 조금 되돌려 알렌이 하이젤과 만났을 즈음.

릴리트를 찌른 율리우스는 어디론가 계속해서 달렸다. 정확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란 따위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릴리트를 죽였다.’

다름 아닌 자신이.

결말에 하이젤이 폭주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음에도, 그 선택을 한 것은 자신이다. 왜?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동요하는 이유는 뭔가.

[원작의 결말을 망친 원흉인 릴리트를 살해하라. 제한 시간 : 8 : 10 : 55]

[보상 : 진실의 파편(???) x 2(완료)]

퀘스트는 진작에 해결되었다. 보상도 들어온 지 오래. 뒷감당 걱정?

그런 것 따윈 없었다.

‘하이젤과 릴리트의 감정은 아직 깊어지지 않았으니까.’ 작 중에서 그들이 처음 만난 건 마탑 도시에서였다.

그 이후에 아카데미에서 여러 사건을 함께 겪으며 마음이 깊어졌지. 은연중에 그들이 과거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으레 그렇지 않던가. 양판소에서 과거의 사건에 조명하는 일은 적다.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만으로 바쁜데 언제 그것들을 다 풀고 있겠는가.

그렇기에 죽였다.

이번만큼 더 좋은 기회가 있지는 않을 테니.

그 행동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몰래 다가가서 몇 번 찌르니 금방 끝날 만큼. 그러나 찌르기 전까지 감흥 없던 감정이 흔들리는 이유는?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죄책감?’

그건 아니다. 한낱 소설로 읽었을 때도 비호감이었으니 오히려 시원하다는 게 맞겠지. 그저…, 그래.

‘원작의 주연을 직접 처리했다는 것.’

그로 인해 앞으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불안감.

그것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최대한 원작의 조연과 주연을 모으며 그들과 힘을 합쳤다. 그러나 악역이 아닌 메인 히로인을 죽이는 건 처음이었다.

원작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는 것.

에스테도르의 이상행동으로부터 변한 원작을 앞으로는 전처럼 완벽히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자신을 동요하게 만든 원인이 분명했다.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자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김우진은 어느새 무지개 마안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스킬을 끄며 차분히 다른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릴리트를 죽였다는 사실은 하이젤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다.

과거라면 모를까, 현재의 그가 그만한 힘이 있지는 않을 테니.

마침 주변에서 마족이 날뛰며 다른 이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보였다. 저 말은 자신이 며칠간 도와준 하이젤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때 김우진은 무언가를 느낀 듯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니콘의 뿔과 부서진 성물 그리고 아라흐니 부족과 미니마 부족에서 받았던 성흔.

모든 것이 뒤섞여 그는 마기와 사기와 같은 삿된 것에 대단히 민감하게 변했다. 저 방향에서 순간적으로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하이젤이 저곳에 있구나.’

그는 우선 그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희미하던 마기가 점점 진해지며 그의 감각을 찔렀다.

그럼 앞으로의 취해야 할 스텐스는….

‘하이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볼까?’

그와 사이가 나빠졌어도, 그는 주인공이다. 그를 도와준다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되겠지. 그렇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나?’

빠르게 움직이던 발이 조금씩 느려졌다.

하이젤의 실력은 지금쯤 팔강에 도달했을 것이다. 힘숨찐 물이 으레 그렇듯 필요할 때만 사용하느라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하지만 자신도 만만치 않았다.

7위계 상위권.

불사왕의 심장까지 손에 넣었기에 자신도 결코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김우진의 자신감은 이유가 있었다.

그가 마족을 돌보며 시간을 쏟는 사이 자신은 여러 기연을 얻고, 숨어 있던 전 전대 팔강한테 붙잡혀 강제로 수련을 받았다.

망할 영감탱이라 욕은 했지만….

그 덕분에 여러 기연과 뽑기, 퀘스트로 늘어나기만 했던 스킬과 능력을 가다듬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자신이 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점점 느려지던 발걸음은 어느 순간 멈춰선 채였다.

주위의 소란도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기묘한 정적 속, 김우진의 가슴속에서 검은 불씨 하나가 타올랐다. 그건 지금껏 쌓였던 감정이었다.

욕망과 열등감, 관심, 기대, 질투, 갈망.

조금씩 쌓이던 감정이 발화하기 시작했다.

김우진은 제자리에 멈춰 서 자신이 지금까지 한 행동을 회상했다.

여러 기연을 모으고, 불행에 빠질 조연을 구하며, 미래를 대비하며 친분을 다진다.

이건 마치….

‘나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다름없지 않은가.

‘하이젤을 대신하지 못할 건 뭐지?’

원작의 주인공이다. 원래 초심은 그의 옆에서 꿀을 빨며 망한 결말만 막으려는 거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원인과 목적이 뒤바뀌었다.

‘결말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이 좋아서.’

몰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른 변명을 일삼았지. 왜?

‘하이젤이 없으면 강림할 마왕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자신이 생겼다.

지금처럼만 하면 마왕을 상대할 수 있겠다고.

저벅저벅-

발걸음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

이건 옳은 선택이다. 김우진은 몇 걸음이면 도달할 거리에서 발을 돌렸다. 하이젤이 있다면 전력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그가 존재해서 초래할 분란도 있었다.

주인공은 하나면 충분하다.

콰앙-!

“팔강도 별것 없군.”

“여기서 다른 수가 더 있겠습니까?”

발걸음을 돌리는 그때, 조롱하는 웃음과 함께 폭음이 들렸다.

“닥쳐라…!”

자크니르의 목소리 역시.

김우진은 땅을 박찼다. 지금 도시에 가장 큰 전투는 저곳일 터. 그를 도와 적을 물리친다면 스포트라이트는 자신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의 몸에서 우렛소리가 울렸다.

꽈릉-

“그럼 나는 어때?”

“…너는?”

전투에 끼어드는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지개 마안도, 상태창도.

아무것도.

* * *

알렌은 깊숙이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눈을 떴다.

머리가 핑 도는 어지러움에 다시 눈을 감기도 잠시, 이내 그는 통증이 가시자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지?

낯익은 느낌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세상은 검었다. 하늘도 땅도 없이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 주위로는 옅은 빛무리가 떠돌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머지않아 익숙함의 근원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명상으로 아침을 시작할 때, 가끔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종종 있었다. 그때면 정신이 평소보다 맑아졌었지. 바로 지금처럼.

알렌은 현재, 내면의 바닥에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곳에….’

아직 정신이 멍했다. 그는 천천히 생각을 되짚었다. 아카데미에 돌아왔을 때부터.

‘이번 사건 역시 대비했다고 생각했다.’

에스테도르의 발호가 큰 문제이긴 했어도, 일어났을 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주변 인물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며, 사건의 중심지가 될 엘피스에서 기다렸지.

“하지만 틀렸다.”

추측한 대로 흘러가리라 생각한 습격은, 뜻밖의 변수에 의해 무너졌다. 그 변수는 아마도 하이젤. 알렌이 신경 쓰지 못한 사이 그도 자신의 계획을 세운 것이다.

또 무엇이 있었지?

“…학생회장 엘리스.”

그녀가 세운 지원군 계획 뒤에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그건 그녀가 벌일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필시 아카데미 이사장의 입김이 닿아 있겠지.

마리아가 안 보인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나?

그로 인해 알렌이 세워 둔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상황을 따라가기 급급해졌다.

그 후에 하이젤과 싸웠고….

“밀레드.”

그의 몸이 우뚝 멈췄다. 알렌이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는 고요한 어둠에 녹아들었다.

기억이 떠올랐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여성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이 목소리는….’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투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구나. 어찌 깨워야 할지 걱정했는데… 그 아이 덕분에 의식이 보존되다니. 필시 평범한 아이는 아니겠지.」

“…당신은 누구십니까.”

알렌의 물음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주춤 몸을 일으켰을 때, 그의 앞에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아이가 볼 것 같은 그림책.

그 책은 손대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책장이 넘어갔다.

모두…, 알고 있는 장면들이었다.

그의 처음과 맞닿은 장면들. 각인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그의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그림들.

하얀 책과는 달리 전생의 장면마저 그려져 있었다.

처음 아버지에게 따졌을 때. 지금과 달리 아무것도 모를 전생의 일이었다.

동생의 몸을 누가 강탈했다는 사실에 분개했었다. 가문의 집사와 기사 심지어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모두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혼자라도 동생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때로는 그와 맞서고, 때로는 그의 정보를 수집하며, 때로는 동생을 찾기 위한 마법도 연구했다.

그러다, 많은 것을 잃었다.

처음은 대공자로서의 인망.

그다음은 영지민.

나중엔 약혼녀가 자살하고, 후계자 자리도 잃었지.

마지막은 다소 극단적으로 끝났다. 방법이 없다 여겼기에. 부족한 힘은 악마와의 계약으로 채우려 했다. 그것을 위해 영지민을 희생했고, 허나 그 계획마저 실패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알렌 라인하르트의 인생은 이룬 것 하나 없이 실패자로서 마감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지 못했다면.

「이상하지 않니?」

여성은 알렌이 알아채기를 바라는 듯 곧게 물었다. 알렌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반응에 실망하지 않았다.

알렌의 앞으로 그림책이 다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타난 그림은 사람을 죽이는 그의 모습이었다. 망설임 없이 영지민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 지금이라면 이해 못 할 그의 오물.

「줄곧 이상하다고 느꼈지?」

대답할 새도 없이 책장은 넘어갔다. 회귀한 후, 처음 함께한 가이엘의 시험. 그의 예상과 달리 영주는 아무 짓도 벌이지 않았다.

되려 율리우스가 간 곳의 영주가 전생과 같은 짓을 저질렀지.

「이다음이 중요해.」

그녀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방 안에 서 있는 그늘진 여왕과 알렌. 그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감정에 호소하는 짓을 했고, 그녀 역시 거절해야 맞을 제안을 허락했다.

「그녀들에게 의구심을 품었지?」

곧이어 나타난 것은 두 명의 여성이었다. 각자 운명의 사람을 찾아 프란시스카는 라인하르트 영지로, 마하 황녀는 아카데미로 찾아왔다.

「이건 어떻고?」

거대한 유적 아래서 새로운 몸을 만들었다. 고대에도 성공한 적 없는 체계를 완성하고, 이론만 있던 거인의 몸을 재현했다.

그다음도.

순조롭게 감응력을 손에 넣어 용의 감각을 얻었고,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에게서 때마침 부족했던 정신력을 보충해 줄 별의 세례를 받았다.

순환교의 사도로 공인받았고, 빙의자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그들의 힘으로 일리아나를 치료하고 가이온의 제자가 되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스콜의 대대적인 확장을 하는 동시에, 무사히 들키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탑 도시로 향하고….

그렇게.

알렌은 주요한 사건으로 진행되는 현생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특정 장면을 지정해주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듯이 이번 삶의 그가 이룬 것들을 보여 줄 뿐.

간간이 하얀 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알렌은 그녀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이 이상한가?

루피너스 가문의 악마 계약자를 죽이고, 드라기아스 가문의 사룡을 해치우며, 순환교의 문제를 해결한다.

알렌은 제삼자의 눈으로 보자, 그녀가 말했던 이상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그가 과거에 한 번 느꼈던 의문이었다.

「너무 순조롭지 않느냐?」

“그래, 과거의… 율리우스를 보는 것 같군.”

알렌은 지금까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생에 일어났던 사건이 현재에는 달라졌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내 주위의 있던 이들이 하는군.”

비단 그늘진 여왕뿐만이 아니다.

마탑 도시에서 그란델을 죽였지만, 아무도 자신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심지어 마도 여황마저도.

알렌이 만약을 대비해 짐승왕에게 부탁한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스콜의 방칙을 대대적으로 바꾸었을 때, 누군가 눈치챌 법도 하건만 아직까지도 비밀이 유지되고 있었다.

「알아챘구나. 그렇다면….」

“잠깐.”

알렌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 정도로 맞춰 줬다면 충분했다. 그는 확신을 담아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느냐? 얼마든지 답해 줄 테니 물어 보….」

“거기까지 하지 베스틀라.”

「……나는 베스틀라가 아니다.」

“평소대로 하는 게 더 편하지 않나? 내가 아는 너라면 그럴 텐데….”

그녀의 말이 뚝- 끊겼다. 잠시간의 침묵 후,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물쭈물하는 목소리.

「…그렇게 티가 나요?」

베스틀라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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