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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84화 (184/212)

184화

상대와의 격차는 크다.

알렌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동급의 존재와 겨뤄 본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상대는?

‘능숙한 것을 넘어 익숙할 테지.’

그렇기에 처음부터 수를 감추지 않았다. 운명 마법과 요툰스베르드 그리고 검의 능력과 거인의 몸까지.

하이젤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을 때가 기회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대비도 했었고, 위험성도 깨달았다. 짐승왕의 조언까지 받아들여 최선을 다했는데.

‘이 정도라고?’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뒤틀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음에도 내디뎠던 걸음을 물리진 않았다. 그럼에도 하이젤과의 격차는 유효했다.

전투가 무르익을수록 놈의 속도는 빨라졌다. 통증은 익숙했다. 정신과 육체 어느 쪽이든. 상처는 재생되며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기에.

그러나.

상처가 쌓이는 게 회복되는 것보다 빨랐다.

꽈앙-

다시 충돌. 무너진 건물의 잔재가 어지러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건 다시 부서지며 점점 더 작아졌고, 끝내 부스러기로 변해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마기는 마력과 다르다.

그러나 힘을 다루는 그 근본적인 감각은 비슷할 것이다.

하이젤의 마기에 온 사방이 검게 물들었다.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장악력. 불현듯 서늘한 감각에 몸을 비틀었다. 약간 늦었는지 몸의 핏줄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마기가 칼날처럼 변화했다. 알렌이 달려 나가며 손끝을 튕겼다.

수백 가닥의 실타래가 엉키며 창날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막지 못한 것은 그대로 두었다. 하이젤은 어둠의 위에 있었다. 알렌은 발을 굴러 위로 향했다. 지면이 멀어지며 놈이 더 가까워졌다.

알렌은 인간의 방식을 포기했으나, 하이젤은 되려 인간의 방식으로 사냥하려 했다.

이번에 그는, 피하지 않았다.

충돌.

일대의 어둠이 갈라졌다. 몸이 추락한다. 하이젤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그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은 보이지 않았다. 알렌이 용의 감각을 이용해 검을 들었으나 가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 일대는 완전히 망가진 지 오래였다. 공간이 막힌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누가 있었다면 피해가 막대하게 불어났을 테니.

육체는 멈추지 않고 상처 난 몸을 재생했다. 온몸은 피로 물들었으나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새로운 피에 덮였다.

그저 계속해서 강하게 휘두를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놈의 궤적이 조금은 흐트러졌다. 그 행동이 그저 힘을 빼기 위함일지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육체는 멈추지 않았으니. 그러나….

조금씩.

정신이 흔들렸다.

용의 노심에서 끌어내는 마력과 거인의 신체에서 나오는 활력. 마력은 끝없이 육체를 순환하며 부담을 줄여 주었고, 그 잠시간으로 육체는 다시 회복되었다.

육체는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까지 일계를 남용해 본 적은 없었는데.’

검날이 붉게 물들며 찔러오는 검을 후려쳤다. 빈틈 가득한 자세에서도 일계는 정확히 터져 나왔다.

어디서든 위력을 내는 공격. 그렇기에 하이젤의 기습에도 대응하기 좋았지만, 알렌 역시 부담을 지고 있었다.

알렌의 공세가 더욱 난폭하게 변했다.

이성이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다. 알렌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일계부터 오계까지 막힘없이 쏟아져 나왔다.

분노, 그림자, 태양, 한기, 죽음.

사방을 메우던 어둠이 찢겨 나가며, 먹구름이 흩어지고 빛이 쬐어 왔다.

그러나 갈수록…, 알렌의 정신 역시 무너지고 있었다. 강대한 정신력은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소모되었다. 터진 실핏줄 탓일까 시야마저 붉게 물들었다.

하이젤 역시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알렌의 치명상은 늘어만 갔다.

혼미해진 정신은 곧 이 전투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전투를 벌여야 하지? 왜 이곳에 있는가. 그건… 사전에 세웠던 계획이 무너진 탓이다. 그 탓에 상황에 휩쓸려 버렸고, 하이젤과 부딪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하는가.

『하이젤을 죽여야 한다. 애초부터 그렇게 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하얀 책이 반응한 직후 회유와 살해 중 회유를 택하려 했으나…, 하이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패배시킨다 해도 그가 따를지 알 수 없었고.

『변수는 줄여야 한다. 미래를 대비한다고 해도 결국 원하는 건, 율리우스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부정할 수 없었다. 모든 행동의 근간에는 그 이유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있나?』

그건 맞지만…. 위화감이 있었다. 원래부터 자신이 이런 결정을 내렸나? 그러나 오래 고민할 틈은 없었다.

마기에 물든 몸뚱이가 들이닥쳤다. 소리 없이 튀어나온 주먹이 어깨를 박살 냈다. 덜렁거리는 팔을 빼며 물러나니 시야가 번쩍였다.

쩌억-

가슴이 갈라졌다.

육체가 죽음을 향해 치닫는 도중에도 생각은 이어졌다.

‘그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죽일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지는 않지. 잠시 정신을 놓는 게 어떤가. 분노에 몸을 맡기면… 의외의 수가 나올지 모르지.』

절로 거부감이 들었다. 전투에서 정신을 놓으라고?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나?』

하이젤의 안색이 굳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끌었다는 생각에 그의 주먹 위로 거대한 손이 겹쳐졌다.

마계에서 얻었던 고대 마신의 유해.

평소에는 이것에도 무슨 장난질이 쳐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라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슉-

작은 소리가 났다. 하이젤의 주먹은 알렌의 눈에 보일 정도로 천천히 그의 몸에 맞닿았다. 그러나 결과마저 그렇지는 않았다.

펑.

알렌의 어깻죽지를 비롯한 왼쪽 팔이 떨어졌다. 그의 몸은 웬만한 금속보다 질기고 단단했다. 그러나 하이젤의 일격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어떻게 할 거지? 시간이 없다.』

하이젤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팔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가 자신의 몸을 터트리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하이젤은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속도를 늦췄다.

그 탓에 알렌은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정말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알렌이 갈등하고 하이젤의 공세가 늦춰지던 그 때, 그 사이를 노린 듯 두 사람 사이로 공간이 갈라졌다.

후웅-

그와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후배!”

밀레드의 목소리. 알렌은 급히 고개를 돌리다 하이젤의 표정을 보았다. 그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쯧, 벌써 시간이 다 됐나. 아니, 혹시….”

잠시 생각하던 하이젤은 팔을 내렸다. 공중에서 무채색의 거대한 손이 떠오르며 떨어져 내렸다. 알렌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을 듯했다.

그것이…, 그의 눈에 느리게 보였다.

밀레드는 하이젤의 공격을 막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저항해 봤자 다진 고기로 변할 뿐이겠지. 그건 알렌도 알고 있었지만….

밀레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후배한테는 조금 미안한데….’

그녀가 두 명의 전투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그대로 놔뒀다가는 알렌은 굴레대로 정해진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되겠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날수록 굴레는 더욱 그를 조일 것이고, 끝내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전엔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갈등하다 결국 늦어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늦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손이 그녀를 내려찍기 전, 작은 빛 덩이가 순식간에 알렌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 광경은, 잠깐 사이에 일어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쾅-

밀레드의 몸이 사라졌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뿐이었다. 그 모습은, 알렌에게 과거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적 실습.

한 조.

에반, 에리엘 그리고 윌리엄.

율리우스.

그리고.

그들의 죽음.

“아.”

알렌의 입에서 작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나마 냉정하게 생각하려던 머리가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거칠게 뛰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한순간이나마 현실이 멀어 보였다. 은밀히 움직이던 실타래 역시 완전히 멈췄다.

완전히 비어 버린 머리에서 무언가 뒤늦게 차올랐다.

그것은, 분노였다.

‘당장, 놈을, 방금, 유적에서, 과거에, 다시, 나는.’

생각이 뒤죽박죽 섞인 머리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이성을 녹아내렸다. 가슴이 미친 듯이 펄떡거렸다.

뭐라고 입을 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야가 획획 뒤바뀌었고, 하이젤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깊은 늪이 그를 끌어당겼다.

처음에는 소리가 멀어졌고, 그다음은 시야, 후각, 감촉 마지막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알렌의 의식이 깊은 곳에 처박히기 전.

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간섭을 하지 않았더니 정신이 너무 견고해졌어. 다행히 더 늦지 않았다.』

아니, 두 개의 목소리가.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네요. 알렌.」

알렌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 * *

쿠웅.

지금껏 상대하던 적이 빈틈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하이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움직인다고 해서 상대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쯤, 하이젤이 입을 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바라봤다.

“아. 아아.”

놈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대는 알렌이되, 알렌이 아니었다. 알렌의 몸을 가진 놈은 두 개의 시선 중 하나였다. 하이젤이 지금껏 기다린 ‘진짜’ 상대기도 하고.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심호흡하며 몸을 가다듬었다. 지금껏 했던 행동들? 모두 연기에 불과했다. 릴리트의 복수를 위해 도시 전체를 죽여서 그가 얻을 게 뭐가 있지?

하이젤은 마왕이었다.

죽음에 익숙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를 죽인 자.

‘아니 그건 두 번째인가?’

그는 제힘으로 공간을 틀어막으며 알렌을 죽이려 했다. 만약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진짜 죽였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는 그들이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알렌은 계획의 제일 중요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죽일 듯 몰아붙이면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물론, 처음 일을 벌일 때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도… 다르지는 않다.

단지, 관련 없는 이를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았을 뿐.

하지만 상대가 그 모든 것을 조종한 이라면 달랐다.

“■■■■.”

하이젤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까지 막아 두는 건가… 졸렬하기는.”

“그건 현명하다고 하는 거다.”

조정을 끝마쳤는지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그’가 말했다. 하이젤은 우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건 기록하나 못 남기게 하면서 무슨.”

“불필요한 변수를 초래할 필요는 없지.”

“그럼 나를 왜 환생시켰지?”

그건 그가 느꼈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였다. 그가 알고 있는 놈들은, 자신 같은 변수가 돌아다니게 놔두지 않을 텐데. 대체 왜?

하이젤이 빈정거리는 얼굴로 묻자, ‘알렌’은 알 수 없는 얼굴로 답했다.

“스스로 되살아난 게 아니었나?”

“…뭐라고? 아니… 하, 하하, 하하하하. 그런가?”

문득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 하이젤은 그 생각이 구체화되기 전에 폭소를 터트렸다. 생각과 감정마저 들여다보는 놈들이다. 지금의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겠지만, 또 모르지.

방법이 있을지도.

그 생각이 사실인 듯 ‘알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왜,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더니 이건 모르겠나?”

“…아니, 더는 상관없지.”

오늘을 기점으로 더는 통제되지 않는 변수는 없을 테니.

“얌전히 계획을 도와라. 그렇다면 후의 삶을 보장해 주겠다.”

“내가 그럴 것 같나?”

“그렇겠지.”

‘알렌’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맴돌며 거칠게 맥동했다. 그건, 아직 알렌이 모르는 거인의 힘이었다. 마력을 가진 용과 대항할 수 있는 거인의 진짜 능력.

거인은 분노할수록 강해진다.

‘알렌’은 분노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몸에서 거인의 힘을 이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달려들기 전, 하이젤은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책은 몇 권이지? 세 권인가?”

“뭐?”

‘그’가 움찔하며 하이젤을 바라봤다. 놈의 반응으로 모든 걸 깨달은 하이젤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역시 놈들에게 엿 먹이려는 이들은 자신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몸을 뺄 필요는 없지.

‘릴리트.’

그녀의 핏값을 받아야 할 테니.

하이젤이 냉소하는 얼굴로 몸을 날렸다. 그는 전력으로 힘을 끌어냈다. 더는 참을 필요 없었다.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가운데, 새로운 국면의 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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