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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83화 (183/212)

183화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차례의 굉음과 함께 소리가 잦아들었다. 밀레드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알렌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 했지만….

공간이 닫혀있다.

안에서 누군가 잠그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고민했다. 알렌의 고립은 알렌 스스로가 원했거나 혹은 안의 있는 누군가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했을 가능성이 컸다.

밀레드는 당장이라도 봉인을 부수고 싶었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아카데미에 오는 것도 겨우 허락을 받아낸 것.

만약 사고라도 친다면 그녀는 저 칙칙한 북쪽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온 것도 ‘어머니’께 학교생활을 무사히 마치는 걸 조건을 내세웠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대륙에 여러 혼란이 일어나며 상황이 바뀌면서 이제 그만 학교 놀이를 그만두라는 압박이 심해졌다.

‘하지만 틈을 내는 건 가능해.’

그녀의 실력으로는 저 안에 들어가서 돕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그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결심을 세웠다.

밀레드의 몸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도와야 한다.

알렌의 말처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밀레드는 알렌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알렌은 그녀가 죄책감을 가진 이유가 유적 실습의 일이라 알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에 기인했다는 것을 그는 알까.

그녀는.

굴레를 알고 있었다.

* * *

보통의 상대에게 있어 팔강이란,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무인이든 마법사든 일평생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존재이자, 일반적인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존재들.

그렇기에 항상 도전받으며, 더 위를 향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범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분야에서 그 누구보다 특출나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름은 대륙의 그 누구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장기전으로 가면 안 된다. 최대한 몰아붙이도록 하지.”

“어차피 ‘그것’이 있으니 틈을 노리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비장의 무기가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팔강 개개인에 대한 약점과 전투 방식이 널리 퍼져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자크니르는 수백 개의 광구로 벽을 세우며 상대를 확인했다. 그 역시 공간이 섞여들기 전 퍼져나온 여섯 개의 강한 기척을 확인했다.

그는 그 기척을 확인하자마자 튀어 나갔다.

짐승왕에 비해 살짝 느렸지만,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향하던 중, 뒤섞인 공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가 마법으로 외부의 현실을 뒤튼다면, 무인은 내면에 집중해 스스로의 몸으로 현실을 비튼다.

자크니르는 뒤섞인 공간에 무식하게 저항할 수 없었다. 다만 우월한 감지 능력을 바탕으로 어디 있을지 추측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과 마주친 것이 지금이었다.

자크니르의 마력이 순백의 빛을 발했다. 빛의 광구가 모여들며 방패를 형성했다가 순식간에 둔기로 변했다.

하늘의 방패라 불린다 한들, 정말 수비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꽈아앙!

순백의 둔기가 달려드는 두 명 중 하나를 땅에 박아 넣었다. 그러나 공격이 성공한 것과 달리 그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감촉이 가볍다.

남은 하나 역시 땅에 박힌 이를 걱정하지 않는지 그대로 다시 공격해 왔다.

자크니르의 곁으로 수천의 광구가 맴돌며 셋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방패, 하나는 둔기, 그리고 하나는….

“…설마 했더니 흡혈귀라.”

감옥.

자크니르는 발밑에서 솟구치는 닿기 전, 그를 가뒀다. 하얀 광구에 갇힌 놈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광구를 후려쳤다.

그렇다고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겠지만.

“에스테도르도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구석에 숨은 당신들을 끌어들일 줄이야.”

자크니르는 그를 무시하고 다른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흡혈귀의 실력은 팔강의 아랫급에 해당한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고전했겠지만, 방어 하나로 윗 등급 강자마저 막아낼 수 있는 그에게는 문제없었다.

둘의 협공을 이겨내는 건 힘들어도 시간을 끄는 건 자신 있다.

다만, 생각해 볼 건 지금 상황마저 저들이 꾸몄느냐인데…. 그는 아나스타샤가 현재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개인적인 일이라 생각해 참견하지 않았을 뿐.

그건 짐승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남은 하나를 상대하던 중,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왜.’

필사적이지 않지?

남은 하나가 붙잡혔다면 어떻게든 풀어 주거나 도망치기 위해 준비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놈은 시종일관 여유롭게 자신을 상대했다.

오싹한 감각에 그는 얼른 놈의 얼굴을 봤다.

흡혈귀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위기감에 다급히 한 명을 가둬 놓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푸슉-

화살 하나가 그의 신성 마법을 자연스레 뚫고 들어와 배에 박혀 들었다.

“늦었다.”

웃고 있던 흡혈귀가 속삭였다.

자크니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배에 박혀 든 화살을 잡았다.

자신의 마법을 뚫을 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성물.”

“타락한 성물이지.”

흡혈귀는 웃으며 정정하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끈적한 피가 발밑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자크니르가 되었다.

갈수록 상처가 악화할 테니.

그들은 여유롭게 그를 상대하다 시체를 거두면 그만이다.

자크니르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표정을 구겼다.

“이제부터 술래를 바꿔 보지. 시간이 없으니….”

빨리 쫓아오는 것이 좋을 거야.

흡혈귀들의 몸이 다른 이들을 노리려는 것처럼 피 안개로 변했다. 자크니르의 신영이 하얀 잔영을 그리며 그들을 쫓았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가이온과 흡혈귀 셋의 전투는 공간을 계속 이동하다 이제는 갈슈딘 사막의 한구석까지 갔다.

그는 시종일관 저들을 압도했지만, 흡혈귀 특유의 재생력과 괴이한 수단 때문에 잠시라도 시선을 돌리면 금세 몸을 회복하기 일쑤였다.

결국, 가이온은 힘을 모두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틀었는지 격렬한 폭음이 끊이지 않았다.

자크니르는 배에 화살이 박힌 채 두 흡혈귀와 전투를 치렀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크니르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가이온처럼 사막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른 이들을 노리는 흡혈귀의 공격까지 막아내느라 상태가 더욱 빠르게 악화되었다.

남은 흡혈귀 하나는 혼란이 일어나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아카데미의 지하 인공유적에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그의 주위는 빛 한 점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통이라면 흡혈귀인 자신에게 더 없이 유리한 공간이었지만…, 상대가 그늘진 여왕이라면 달랐다.

그녀는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을 사냥하듯 차근차근 놈을 조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마도 여황이 있는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 관한 화면이 사라지기 직전, 한 남자가 등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검게 물들었다. 어렴풋이 유지르라는 이름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도시는 갑작스레 등장한 마족에게 맞서 전투를 벌였고, 비록 주요 전력이 빠졌지만 남은 생도들과 교수가 힘을 합쳐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잃을 것 없이 들이닥치는 마족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다.

“…372명.”

일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만큼이나 죽었다.

마족들이 마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피해가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겠지.

마리아는 무표정하게 그것을 바라봤다.

“…373, 아니 375명.”

아직 아나스타샤가 말했던 것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것의 몇 배에 달하는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 극적으로 등장해 마족을 물리치고,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 치료하며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위상을 구축해야겠지.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할까.

마리아는 그녀의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검게 변한 또 다른 화면으로 향했다.

“…알렌.”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녀는 여전히 고민했다.

선택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 * *

웃음기를 지운 놈이 덮쳐온다.

겉으로 날카로운 예기를 두른 하이젤은 소환했던 괴물들과 다르게 무절제하고 난폭하지 않은, 절제된 살기를 흩뿌렸다.

검게 물든 검이 떨어져 내린다. 알렌은 땅에 다리를 박아 넣고 검을 강하게 쥐었다. 가이온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물어뜯으라고.

인간의 방식을 버려야 한다. 거인이라면 거인처럼. 애매하게 검술과 기교를 수련해 봤자 다른 이들을 넘을 수 없다.

노심에서 실타래가 풀려나왔다. 그건 알렌의 몸 곳곳을 넘어 순환하며 그의 신체를 강화했다. 알렌은 작게 호흡했다.

알렌은 인간의 거인이다.

베스틀라가 그렇게 말했기에 알렌은 그리 믿었다.

허나 그렇기에 서로 검을 맞대며 약점을 노리는 방식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거인의 몸뚱이는, 저 고대의 괴물들에게 뒤지지 않기에.

팽팽하게 조여든 근육이 단숨에 폭발했다. 참격이 공기를 밀어내며 마기에 물든 검과 부딪쳤다.

꽈아앙-!

폭음이 터졌다.

손에 밀려든 저항감은 더 강한 악력에 부스러졌다. 겨우 잡은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진각을 밟으며 팔을 휘둘렀다.

안개와 같은 마기가 시야를 막고 마기를 이용한 여러 공격이 쏟아졌다.

무시했다.

정면으로 덮치는 여러 갈래의 검기를 깨부수며 전진했다. 오우거를 단숨에 도륙 낼 법한 공격도 그의 몸에는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 고대의 거인(巨人)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

하지만, 그 용맹은 하이젤의 어둠을 깨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알렌 자신도 알고 있다. 자신은 짐승왕이 아니었다. 호쾌하게 원하는 것을 위해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그와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따라 할 수는 있었다.

어설프더라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더라도. 그의 제자이기에. 나름대로 그의 곁에서 배웠기에.

검은 무기일 뿐이다.

적어도, 짐승왕에게는 그랬다.

그가 든 것이 대검이 아닌 몽둥이나 거창일지라도 그는 그저 짐승왕이다.

그런 그에게 배운 것은 하나뿐이었다.

물러서지 않는 것.

-너는 생각이 많다.

알렌은 일상에서 대화 계획을 짜거나 어떤 일을 꾸밈에 있어 수십 가지의 생각을 한다. 그건 그가 배웠던 귀족의 제왕학과 과거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짐승왕은 그것이 쓸모없다 했다.

-결국, 패배할까 걱정이면, 이기면 되지 않느냐?

전투에 들어간다면, 상대를 죽이고 이길 생각만을 해라. 그를 위해서 검을 쓰든 주먹질을 하든, 이빨로 물어뜯든 상관없다.

거인의 몸을 가졌다면 그에 맞추면 되는 것이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그래?”

꽝!

잠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알렌은 물러나려는 발에 힘을 가했다. 다리에 힘줄이 돋아나며 그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이를 악물었다.

쾅!

하이젤의 얼굴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입에서 터진 피가 비릿한 맛을 냈다. 무시한다. 어차피 재생될 것이다.

시선을 내리니 뭉개지고 갈라진 상처가 많았다. 알렌은 코웃음 치며 고개를 들었다.

잠시 물러난 하이젤이 코끝을 비볐다.

두 갈래의 피가 흘러내렸다.

쌍코피였다. 알렌이 비웃음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래, 상대를 도발하려면 뭐라고 하라 그랬더라….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군.”

“…뭐?”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뒷골목 시정잡배의 욕은 잘 알지 못했다. 베스틀라가 있었으면 더 나았을까.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전투에 집중해야 한다.

하이젤은 다음을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놈이 방심할 때,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기회였다.

‘강하게.’

더.

베스틀라의 크기가 늘어났다.

아직 고대 거인의 유적지에서 처음 봤을 때만큼은 못하지만 근처에 굴러다니는 괴물들을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거검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하이젤을 감싼 어둠이 솟구쳤다. 거검이 괴물들을 갈아 흩날려 버렸다.

터져 나오는 굉음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 하나 했더니, 너도 부러우면 하나 만들어 줄게.”

하이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2차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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