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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82화 (182/212)

182화

마경(魔境)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을 말한다.

인위적인 요소나 자연적인 이유로 인해 사람이 개척할 수 없는 곳을 마경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마경이란 원래 그런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대 제국 시절에는 그런 말 자체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개척하지 못할 장소나 이겨내지 못할 환경은 극히 드물었고, 그런 환경마저도 금지(禁地)로 지정해놓을 뿐이었으니.

지금과 같이 마경이라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마경을 지금과 같은 말로 쓰이게 되었는가.

“…이 기분은 정말로 오랜만이야.”

그건 순전히 마족과의 전쟁으로 인한 탓이었다.

그들의 전쟁으로 대지는 황폐화되었고,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며 기이하게 변질된 곳도 생겨났다.

마기와 사기 그리고 마력이 뒤섞인 땅.

그런 땅을 마경이라 가리키게 되었지.

허나.

“불편한 옷을 벗은 기분이군.”

본래 마경이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였다.

악마가 있는 곳.

주위의 대지가 검게 물들었다. 그들이 자리한 공간의 위로 검은 먹구름이 끼었고, 어스름한 독 안개가 은은히 깔렸다.

“타락에 몸을 맡기는 것 같은 느낌만 뺀다면.”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변화를 마친 그의 목소리는 산뜻했다. 알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노심의 마력을 뻗어 냈다. 실타래가 공간이 이동되는 경계를 찔러 들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라는 듯 공간은 조금 전과 다르게 굳건히 잠겨 있었다.

알렌의 안색이 굳어졌다.

“인제 와서 도망치려고?”

하이젤이 중얼거렸다.

“이용할 거면 처음부터 말았어야지. 아무리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꼭두각시로서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녀를 죽이지는 말았어야지.”

구구구궁-

하이젤에게서 짙은 어둠이 솟구쳤다. 심연과 같은 마기가 그를 휘감고 있음에도 그의 붉은 안광만큼은 가리지는 못했다.

“그러니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 이게 순전히 네 탓이 아니라고 해도.”

하이젤은 공간에 손을 뻗었다.

그가 손을 다시 빼내었을 때,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마검 티르빙(Tyrfing).

3번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검의 주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만다는 검.

“영광으로 알아. 내가 이 검을 뽑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니.”

처음은 용사와의 대결에서.

둘은 시대의 끝에서.

마지막은 지금.

“헛소리….”

“그렇게 여겨도 좋지.”

그는 알렌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잘라내 버렸다. 그냥 겪어보면 될 일이다. 가슴 속에서 들끓는 마기가 요동쳤다.

하이젤은 그 진동을 온전히 느끼며 짧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데, 그건 기억해.”

그가 검을 휘둘렀다.

“부정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을 테니.”

검은 선이 그어졌다. 선은 공간을 베어 내며 다가왔다. 알렌은 하이젤과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꼭두각시라는 말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거지? 내 의지가 아니라 다른 이의 뜻대로 놀아나고 있다고?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이 달라진 적은 없을 텐데…….

그렇다고 다시 물을 수도 없었다.

하이젤은 자신을 죽이고 율리우스, 더 나아가 도시의 남은 이들까지 죽일 생각이다. 그런 그와 한가롭게 잡담을 나눌 수 있다고?

‘웃기는 소리.’

쉭.

참격은 전방의 모든 것을 가르며 순식간에 앞으로 질러왔다. 알렌은 앞으로 뛰었다.

요툰스베르드 일계 마나그람.

요툰스베르드 이계 이르파스카더스.

몸이 그림자로 변하며 수백의 인영으로 늘어났고, 검 끝은 붉게 물들며 쏘아졌다. 수백의 검격이 공간을 가르는 검은 선에 대항했다. 붉은 참격이 연이어 중첩되었다.

시커먼 선은 그 모든 것을 갈라냈다. 공간 전체에 검고 붉은빛이 연이어 터져 나갔다. 끝내 밀려난 건 검은 선이었다.

콰드드득-

하이젤의 참격이 터져 나갔다. 알렌은 튕겨 올라간 검을 강제로 되돌리며 빠르게 올려 쳤다. 내려오던 마검은 알렌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하이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대로 하겠다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검을 걷어 낸 그의 검세가 변화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수.

고작 몇 년의 경험으로 대처하기 힘든 일격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근접전에 자신감이 붙었다지만, 용사와 수백 번을 겨뤘다는 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알렌은 그림자를 이용한 눈속임으로 어깨를 찌르는 검을 피해 냈다. 몸이 뒤로 빠지며 검을 휘두르기 힘든 자세.

그 순간에 알렌이 내지른 검이 하이젤의 목을 스쳤다.

하이젤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알렌이 이를 눈치챘을 때, 어느새 하이젤의 한쪽 팔은 짐승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검의 크기가 불어났다. 하이젤의 손이 베스틀라의 위를 긁었다. 그러나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이젤의 손을 막기 위해 구부린 몸 옆으로 검이 솟아올랐다. 알렌은 오히려 몸을 가져다 대며 급소를 피해 냈다. 하이젤이 눈을 크게 떴다.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군.”

그건 어떤 의미에서 알렌이 인간에서 멀어졌다는 말이기도 했다.

전투 중의 중얼거림은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하이젤은 물러선 알렌을 쫓지 않고 검을 땅에 꽂았다.

몸에서 요동치는 마기가 그의 곁으로 모여들더니 뭉치기 시작했다. 알렌을 순수하게 검이나 다른 능력으로 죽이기는 힘들다.

아니, 죽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 옳겠지.

마왕일 적의 권능이 대부분 사라졌다고 해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적지 않다. 검술과 신체의 형태 변화 역시 하나의 수단일 따름이다. 그는 알렌을 죽이려는 것이지 쓰러트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단을 골라가며 맞춰 줄 필요는 없었다.

죽음은 거창한 것이 아니니까.

하이젤이 마계에서 쓰러트린 상대 중, 정정당당하게 상대하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자신보다 수십 배는 오래 산 노괴들과 굳이 정정당당하게 싸워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뭉쳐진 마기는 하나의 형태로 변화했다.

쿠궁-

모습을 드러낸 것은 눈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거인이었다. 키클롭스. 알렌이 대비하기도 전에 다시 마기가 뭉쳐졌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닌 수십의 마기가.

마장소환(魔將召喚)

마왕은 하나이자 군대다.

그가 죽인 적들은 마왕에게 잡아먹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르게 된다.

물론 지금 나타난 것은 진짜가 아닌 껍데기만 따라 한 모습에 가까웠다. 실제 가진 힘도 수십 분의 일로 줄어든 상태. 그러나 그걸로도 충분했다.

‘밀레드 선배를 거기 둔 건 실수 같군.’

차라리 다른 곳에 데려다줬으면 나았을까.

알렌은 전투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패배한다면? 자신이 넘어온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 역시 위험해진다.

그러나 알렌은 그녀에게 피하라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지금도 전투를 하는 틈틈이 잠긴 공간을 열 방법을 찾았지만, 봉인은 전투를 하는 동시에 깰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쿵-!

자신에게 뛰어드는 괴물들의 향연에 알렌은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마계의 옛 강자들이 쫓아온다.

비록 그들의 실력이 5위계와 6위계 사이에 그쳤지만, 그것이 수십으로 늘어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알렌의 검이 하얗게 물들더니 둥근 태양을 쏘아 냈다.

요툰스베르드 삼계 료스솔.

빛나는 태양은 적의 일부를 쓸어버렸다. 흩어진 흙먼지의 사이로 하이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커먼 어둠이 그를 감싸 안았다.

“이건, 태양의 힘에 가깝군. 위력적이긴 하지만 흡혈귀라면 모를까 위협이 될 만큼 강하지는 않아.”

수우욱-

그럼에도 다시. 다수를 상대하는 데 이만큼 쓸 만한 건 없었으니.

“그게 어떻다는….”

알렌은 한순간 흔들리는 시야에 안색이 바뀌었다. 급히 숨을 틀어막자 시야의 끝에 하이젤이 웃는 것이 보였다.

독 안개.

처음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해독하는 것이 더 빨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독 안개는 자신의 회복력이 못 따라올 정도로 농밀해진 상태였다.

쿵쿵쿵쿵-

숨 돌릴 새도 없이 괴물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알렌은 이를 악물고 발밑에 검을 꽂았다. 차가운 안개가 뿜어져 나오며 일대에 서리가 맺혔다.

요툰스베르드 사계 카스니플.

독 안개가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하이젤은 그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어둠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수십 줄기의 검은 선이 그의 틈을 노렸다.

전방에는 괴물들이 달려들고, 참격은 그의 틈을 노렸다. 게다가 회복하기까지 시간도 걸리는 상황.

알렌이 손끝을 튕겼다.

딱-

운명(運命) 제1법(法)

노른 우르드(Norn Urðr)

과거규정(過去規定)

실타래가 커다란 물레로 변화하며 참격을 막아냈다. 물레에 닿은 검은 선은 다시 마기가 되어 흩어졌다.

알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수인을 변화시켰다. 덮쳐오는 괴물들이 포악한 기세를 드러내는 순간, 물레가 움직였다.

운명(運命) 제2법(法)

노른 베르단디(Norn Verðandi)

현재역변(現在逆變)

물레에서 뽑아져 나온 실타래가 그물로 엮여 괴물들을 뒤덮었다.

괴물들은 금방이라도 그 힘을 쏟아낼 듯했지만, 갑작스레 몸을 돌려 곁의 괴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그 틈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걸로 끝이 아닐 테니.

수우우욱-

무언가 공기를 꿰뚫는 소리가 들렸다. 날아오는 건 소리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어둠을 찢은 뇌격이 그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그물이 변화한 것과 투창이 닿는 건 동시였다.

운명(運命) 제3법(法)

노른 스쿨드(Norn Skuld)

미래부지(未來不知)

콰광-

다행히 늦지 않았다. 빛과 같은 알갱이는 알렌의 몸에 구멍을 뚫으려던 투창의 피해를 막아주었다. 찢긴 어둠의 끝에 하이젤이 있었다.

“꽤 잘 버티는데.”

하늘의 먹구름이 더욱 진해졌다. 저런 마법을 가지고 있는 이상 다른 수단을 쓰기에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이젤은 결정했다.

몸에서 서늘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모든 것을 벨 듯한 예기는 그가 들고 있는 마검보다도 예리했다. 그건 살기와도 같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알렌은 두 가지 선택지를 보았다.

회유하는 것과 죽이는 것.

사실상 굴복시켜야 하니 후자보다 전자가 더 어렵다. 당연히 후에 강림할 마왕을 상대할 생각이라면 전력은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강제로 굴복한다고 해서 그가 얌전히 협력할까?

그때, 하얀 책이 알렌의 머리 위에서 펼쳐졌다.

『알렌은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합리적으로 그를 죽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아무런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에 그가 다른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시야를 다르게 본다면, 결국 인간과 마족이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의 일면이다. 하이젤이 저지른 짓은 마족이 무력하게 당하지 않게 한 것일 뿐.

『그러나 원작의 결말도 마음에 걸렸다. 하이젤의 폭주로 그가 죽자, 휘하의 마족이 모두 들고일어났으니 말이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확실한 방법은….』

하얀 책의 글귀와 머릿속의 생각이 뒤덮었다.

“하이젤을.”

죽여야 한다.

알렌은 그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한 가닥의 실타래가 움찔거리다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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