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알렌은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오른 하얀 책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저, 힐끔 본 후에 다시 하이젤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추측이 터져 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몇 달간 아무런 반응도 없던 하얀 책이,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고?’
아니, 그보다 ■■가 뜻하는 것은 역시… 마왕이었다.
‘…추측이 맞았군.’
그것이 기쁘지는 않았다.
생각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만 할 뿐.
예전, 유적 실습을 향하기 전 알렌은 저것이 뜻하는 바가 마왕일 거라 생각했다.
하얀 책과 검은 책은 자신이 무언가를 하기를 바랐고, 그것은 마왕과 그의 세력을 무찌르는 것이라 추측했다.
허나 그것이 뜻하는 바가 마왕이라면 반응했을, 무수한 사건에서 책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의혹으로만 남았는데….
‘도대체.’
나타나는 조건이 뭐지?
마왕과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아니면, 그로 인해 세계에 미치는 영향?
그보다 선택지 두 가지를 주며 자신의 선택에 맡기는 건 지금껏 본 적이 없는 현상이었다.
“왜 말이 없냐. 누가 나를 죽이라고 시키든?”
하이젤은 낄낄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알렌이 애써 시선을 주지 않던 하얀 책에 닿아 있었다.
“아니면 회유하거나 뭐 그러래?”
알렌은 주변에 자리한 시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이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우선 정보를 얻는다.
알렌의 최종적인 적은 하이젤이 아니다.
이번의 사건 역시 마족들이 나왔다고 한들, 알렌은 하이젤이 고의로 일을 벌였으리라 판단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원작의 그라면….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말을….”
“내가 왜?”
그러나.
“가만히 기다렸다가, 일이 터지자마자 나타난 너를.”
하이젤은 알렌과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었다.
“내가 어째서?”
그 말에 알렌의 말이 멈췄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감정은 분명했다.
적대감과 혐오.
다만,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져 무감정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러다 평소에 짓던 웃음을 내보였다.
가볍게.
“조금만 일찍 찾아왔으면 도와줬을지 모르겠는데.”
더 경박하게.
“아니잖아?”
하이젤은 숫제 즐겁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알렌과 더 대화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어느덧 그의 온몸에서는 검은 마기가 새어 나와 알렌에게 커다란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다시 하얀 책에서 선택지가 떠올랐다.
『?악의 길로 돌아서려는 마왕을 막아내고 죽이십시오.』
『혹은.』
『?그의 악행을 막고 동료로 끌어들이십시오.』
‘죽이거나 동료로 끌어들이라….’ 알렌은 조여드는 긴장감 아래서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그의 피부에 닿는 압박감만 따지면 지금껏 상대한 적들보다 결코 아래가 아닐진대.
“협상의 여지는 없겠습니까?”
말을 하며 마력을 순환시킨다.
용의 노심에서 뻗어 나온 실타래는 언제라도 튀어나올 듯 그의 주위로 너울거렸고, 적당한 힘을 준 손은 베스틀라에 닿아 있었다.
“협상의 여지? 진짜 그럴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하나 있겠네.”
어느샌가 알렌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놈들의 계획을 망치는 것. 물론 네가 그걸 할 수는 없을 테니….”
알렌의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그를 내리쳤다.
“그냥 죽어.”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피한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알렌의 몸이 홀연 듯 그림자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순간 그는 검을 휘둘렀다.
쾅!
베스틀라는 위에서 내려치는 상대의 검을 반쯤 파고들었다.
위에서 검을 휘두르던 하이젤은 단 한 번에 박살 난 무기에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 무기 좋은 거 쓰네. 그런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고, 알아?
시야에서 그의 몸이 사라졌다. 대비하기도 전에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맞닿았다. 급히 몸을 낮추기 무섭게 알렌의 눈이 커졌다.
“왜 이런 건 신기해?”
하이젤은 쪼그려 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보란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검은 마기가 뭉쳐 그의 몸을 때렸다. 알렌은 가까스로 몸을 비틀며 뒤로 살짝 몸을 띄웠다.
-콰앙!
충격은 크지 않았다. 일부러 버티지 않은 탓에 몸이 밀려날 뿐이었지.
알렌은 실타래로 몸을 감싼 뒤, 금방 자세를 가다듬고 땅으로 내려섰다. 하이젤은 그때까지 그를 보기만 할 뿐 공격을 해 오지는 않았다.
알렌은 그의 수법에 주의하며 그를 응시했다.
“처음 당해 보지? 하긴, 지금 시대에 이런 잡기를 쓸 이유가 어디 있겠어.”
“…살기를 구체화해서 특정 부위에만 쏘아 낸 건가?”
알렌이 확신이 없다는 듯 툭 던진 말에 하이젤은 제법 놀란 듯 작게 중얼거렸다.
“선택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건가. 그래, 그게 맞겠지.”
마왕과 용사도 그랬는데, 그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간다.
하이젤의 몸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알렌은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감지력을 뻗으며 땅을 박찼다.
마법을 사용하기에 시간이 모자라다.
정면으로 맞서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준비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하이젤은 팔에 마기만 두른 채로 그에게 손을 쭉 뻗었다.
알렌의 검이 붉게 물들며 그의 팔을 막았다. 그러나 하이젤의 팔은 검을 통과하여 그의 머리를 노려왔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손.
‘검으로는 늦는다.’
알렌은 강제로 몸을 비틀었다.
관절이 삐걱대며 소리를 냈지만, 거인의 튼튼한 몸은 이 정도로 망가질 우려는 없었다.
팡!
왼쪽 귓가에 이명이 일며 공격의 여파에 생채기가 생겼다.
알렌은 그의 머리를 박살 낼 듯 다가오는 다른 손의 모습에 망설임 없이 노심의 마력을 검에 밀어 넣었다.
삼계, 료스솔.
빛의 태양이 바짝 달라붙은 둘의 사이에서 빛났다.
“같이 죽자고?”
“설마.”
콰과광-!
일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몸뚱이를 뒤흔들었다. 알렌은 흔들리는 시야를 가다듬으며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에 몸을 뺐나.’
그걸 정통으로 맞고 괜찮은 건 자신과 같이 튼튼한 몸을 가진 놈들뿐이지.
하이젤의 전생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이젤은 충격 범위의 밖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튼튼하네.”
“한 번 맞아 보는 건 어떻습니까.”
“사양하도록 하지.”
그는 알렌이 망설임 없이 자폭하는 모습에 신기한 얼굴을 했다.
알렌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저런 행동을 하는 놈들은 전쟁의 후반에나 많이 보였다.
그는 이내 상관없다는 듯 다시 몸을 날렸다.
다시 사라진 그의 모습에 알렌은 오감을 열었다. 감응력이 뒤섞이며 용의 감각을 재현시켰다.
‘오른쪽 위.’
어깨를 비스듬히 빼며 검을 내려쳤다. 하이젤은 알렌의 반응이 기껍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검격을 보지도 않고 검면을 때렸다.
알렌의 검이 튕기며 그를 비껴갔다.
하이젤은 알렌이 양파처럼 계속 새로운 능력을 선보임에도 당황한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하긴 마지막에 그걸 상대할 놈들인데.’
이 정도에 흔들리는 게 우습다.
지금은 단지 상대를 재보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능력이 있는지, 무슨 수단을 가지고 있는지, 알렌의 출력의 범위와 인식의 한계까지.
용사와 수백 번을 겨룬 마왕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정도로 미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렌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렌은 최대한 능력을 숨기는 하이젤과 다르게 제 능력을 아낌없이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투의 경험 자체가 다르다.’
알렌의 작은 행동 하나만으로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순식간에 자신의 버릇이나 틈을 파악하고 찔러 들어오는 공격과 어디로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는 유령 같은 공격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파앙-
후웁. 잠시 신경이 분산된 사이 하이젤의 주먹이 방어를 뚫고 들어왔다. 알렌은 그림자로 몸을 변환시키며 주위에 차가운 안개를 내뿜었다.
이게 마왕인가?
아직 제대로 전력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렇다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뭐 해?”
피슉-
그의 손을 휘감던 마기가 짐승의 손처럼 변하더니 그의 얼굴을 갈랐다. 가까스로 피했지만, 뺨으로 핏줄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숨돌릴 틈도 없었다.
다시 멀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가까이에 나타난 하이젤이 팔을 뻗었다.
알렌의 검이 이때를 노린 듯 붉게 물들며 가속했다. 실타래는 창날로 엮여 들며 그의 등을 노렸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노리는 공격에 그의 반응은 간단했다.
그는 내지르던 손을 휙 내렸다.
알렌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그는 그 공격을 신경 쓰지 않았다.
‘버티면 그만이다.’
애초에 거인의 몸을 고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부족한 근접 전투의 상황에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가 부상을 입더라도 상대의 팔을 하나 가져갈 수 있다면 이득이다. 바닥의 살얼음이 끼며 하이젤의 몸에 서리가 맺혔다.
요툰스베르드 일계, 마나그람. 사계 카스니플.
언데드에게 효과적인 사계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 효과가 없는 건 아니….
“이 정도는.”
콰직-
알렌의 눈이 가라앉았다. 하이젤은 담담하게 얼어붙은 몸을 깨부수며 자리를 피했다. 뒤에서 날아오던 창날은 보지도 않았다.
전방을 가르던 검이 한 바퀴 돌았다.
일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뭉갤 듯 내려오는 손바닥을 갈랐다.
끼기긱-
저항감에 힘을 더하자 거대한 손 역시 반으로 갈라져 그의 양옆으로 떨어졌다.
지면이 움푹 들어가며 깊은 자국을 냈다.
하이젤은 처음에 그를 맞이했던 장소에서 그를 응시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 전부면 조금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
알렌은 강해야 한다.
옛날의 마왕과 용사처럼.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강함을 가지며 계획의 중심이어야 하고, 그의 죽음이 놈들에게 비수를 찌를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의미가 없으니.
알렌은 냉정한 정신으로 그에게 물었다.
“왜 전력을 다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상태를 보라.
알렌은 멀쩡한 하이젤과 달리 엉망이었다.
옷은 찢어졌고, 비록 회복하긴 했으나 상처가 났던 피부 위로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자신이 엉망진창이 된 것과 다르게 하이젤은 겉으로 보이는 피해는 없었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그래.
“따지자면… 네 동생을 기다리고 있지.”
그는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율리우스를?”
“그래, 처리할 거면 한꺼번에 하는 게 나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죽이려고 전력을 다한다고 한들 알렌은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느껴지는 시선은 알렌을 감싸듯 돌고 있으니.
어차피 기회는 한 번.
그렇다면 두 명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은가.
하지만….
쿠웅-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네.”
주위의 공간이 흐릿하게 흔들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것이 보였다. 공간이 회복되려는 징조였다.
“너 하나를 끝내기에는 충분하지만….”
그를 죽이면 모든 게 끝날까?
천만에.
마음 같아서는 도시의 모든 인간을 갈아 마셔도 모자랐다.
그러니.
“아쉽게도 먼저 죽어야겠다.”
하이젤의 몸 위로 폭발적으로 마기가 치솟았다.
“곧이어 동생도 따라갈 테니 걱정은 하지 말고.”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격류 속에서 그의 몸이 천천히 변화했다.
양옆에 치솟은 뿔과 붉게 뒤덮인 흰자. 이빨은 날카롭게 갈렸고 피부의 위로는 검은 문신이 떠올랐다.
지금과 비교해도 배는 커진 육체와 자연스럽게 주위를 뒤덮는 위압감.
전생재현(前生再現)
만마도래(萬魔到來)
“…그래도 다행이야. 너라도 먼저 찾아와서.”
그렇지 않았다면…. 하이젤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충분히 예상이 갔다.
홀로 날뛰다 자멸하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주위로 울려 퍼졌다.
“빠르게 끝내자. 너만 상대할 것도 아니니.”
그가 눈을 떴다.
과거의 죽었던 마왕(魔王)이 드디어 미몽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