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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79화 (179/212)

179화

“…또, 비밀기지를 만들었다고요?”

“아니, 비밀기지가 아니라 그냥 도시에 숨어 있는 장소들이지.”

“그게 그거 아니에요?”

하이젤은 그녀의 한심하다는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도 자신의 취미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 탓에 생긴 취미라 할 수 있겠지.

과거 그녀와 몰래 도시를 돌아본 이후, 하이젤은 자신 때문에 바뀐 도시를 돌아보는 것을 좋아했다. 한 번은 업무를 빼놓고 나갔다가 그녀가 자신의 일까지 도맡은 일도 있었다.

“여기서는 네가 해야 할 일이 없어서 그렇잖아.”

“…그때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때는… 그래, 그랬지.”

굴레에 지배당하기 전에는.

그녀는 하이젤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자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 후에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혼자 마왕성에 있으니 제가 마왕이 된 것 같기도 했고… 그래도 가끔씩 찾아오셔서 성에 갇힌 공주 기분도….”

그녀가 말을 할수록 하이젤의 표정이 계속 어두워지자 그녀는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노점상 하나를 발견하고는 화색을 띄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목, 마르시죠?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그녀가 사라지자 하이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어지곤 했다.

릴리트에 대한 죄책감은 남아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닌 모든 마족에게도.

그러나 그는 그 감정에 매몰될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맞겠지?’

환생한 이후, 인간으로 몸으로 태어난 그는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바뀐 세상을 구경하기도 하고, 꼭두각시로 살았던 생과 반대로 하고 싶은 모든 걸 결심했지.

다행히 세상은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는 달랐지만, 그럭저럭 굴러갔다.

하늘을 가득 채우던 비행선이나, 신기한 효과를 가진 식물, 쇳덩이를 쏘아 내는 기계와 어디에나 새겨진 마법진, 그 모습은 이제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다.

자신이 마왕 하이젤이 아닌, 하이젤 카일루스라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듯이.

하지만, 율리우스에게 게이트에 대한 것을 듣고는 자신은 여전히 마족과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마기에 대해 거리낌도 없어졌고, 일을 저지를 땐 인간보다 마족을 우선으로 생각했지만….

‘이번 일을 무사히 마치면.’

남은 마족들에게 차원문에 대한 것을 알리기만 하면, 자신은 할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그들의 뒤처리를 해 줄 수 없다.

아무리 그들이 자신을 마왕이라 부르고 충성을 바쳐도 지금의 자신은 인간 하이젤 카일루스였으니.

하지만 변수가 발생하면….

그가 릴리트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기도 잠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웅-

“…이 파동은, 공간, 차원?”

마족들인가?

아니, 자신이 준비한 차원문은 앞으로 며칠은 더 있어야 했다.

지금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겼다.’

당장 자리를 떠야 한다. 어차피 이 소란에 나설 이유는 없으니 율리우스가 해결할 때까지 숨어있으면 될 테지.

그런 그가 움직이려는 순간, 다른 방향에서 공간이 울렸다.

주변의 공간이 유리 조각처럼 박살 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끝에서 나타난 강자들이 내뿜어내는 파동과 깨지기 시작하는 공간을 본 하이젤은 땅을 박찼다.

‘당장.’

릴리트를 데려가야 한다.

그녀도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자신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하이젤의 안색이 급변했다.

쾅-!

그가 속도를 높였다.

릴리트가 그의 이상함을 눈치챈 듯, 뒤를 돌아봤다.

파지지직-

그녀의 눈이 크게 변했다.

공간이 부서지며 그녀의 몸이 부서진 곳으로 빨려 들어가 이내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런 시발!”

하이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도 그곳으로 향했다.

그 역시 그녀가 사라진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주변의 공간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하얀 구름이 하이젤의 흔적을 따라 쫓아갔다.

* * *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살려줘요!”

“이게 갑자기 무슨….”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의 고함이 주변을 가득 울렸다.

알렌은 유리처럼 깨진 공간과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두 차례 울린 파동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깨진 거울 공간.’

공간 계통 마법을 깊이 연구했기에 알고 있는 현상이었다.

공간 마법과 공간 마법이 충돌해서 발생하는 일로 공간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옛날 서클 체계 마법이 체계화되기 전에는 연구가 활발했으나, 서클 마법이 정립된 이후 공간 마법사의 수도 줄어들어 이 현상을 아는 사람이 적었다.

‘보통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진 공간은 자동으로 복구될 텐데….’

도대체 얼마나 큰 규모의 마법이 부딪쳤기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실타래를 뿜어내며 주변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공간의 면이 느껴졌다.

‘누구의 짓이지?’

이것도 에스테도르의 짓인가?

“…깨진 거울 현상?”

알렌은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 차렸다.

“아시는군요.”

“…고문서를 보는 취미를 가졌으니까.”

알렌은 그녀가 유적에서 옛 고어를 읽었던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일 좋은 건 가만히 있는 거지만.”

그녀의 시선이 부서진 거울처럼 잔해를 떨어트리는 공간과 사라지는 사람들, 부서진 공간 너머로 꼬인 도시의 정경을 향했다.

“이만한 규모의 현상에 가만히 있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

“어차피 저희도 피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공간의 면이 다 박살 난다면 주변의 공간은 뒤엉킨다.

기숙사로 향했는데 뜬금없이 광장에 도착할 수도 있고, 도시를 빠져나가려 했다가 아카데미 내부로 올 수도 있지.

여기는 그런 공간이었다.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율리우스.’

그의 곁에 간다면 해결책이 나타날 것이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제가 공간 계통을 익혔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나을 겁니다.”

“…응, 알았어.”

콰아앙-

그들이 움직이기도 잠시, 주변 공간 중 한 곳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주변의 공간이 부서지는 것을 느낀 강자들이 분명했다.

알렌은 그곳으로 향할까 고민했지만, 발걸음을 돌렸다. 우연히 마주치면 모를까, 지금은 다른 이들과 합류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카데미도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 않을 테고.’

알렌이 실타래로 공간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 * *

“너희 같은 놈들은 본 적이 없는데….”

가이온의 앞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세 인물이 보였다.

가이온은 눈앞의 인물들이 강한 존재감을 발하자마자 그들을 찾아간 것이다.

중간에 공간이 뒤흔들리며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했지만, 그는 짐승왕이었다. 팔강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도 저항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스테도르에서 왔나?”

그가 사납게 웃으며 그들을 살폈다.

자신보다 조금은 약한…, 비유하자면 팔강급에 근접한다고 볼 수 있는 강자들.

대륙에는 팔강에 비견할 만한 강자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눈앞의 이들은 가이온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하나가 좀 익숙한데.’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다.

그런 기묘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잠시, 그가 신경 쓰던 이가 입을 열었다.

“수인족 중에 이만한 강자가 나오다니… 경사로구나.”

“날 아나?”

“팔강인 짐승왕을 모를 수도 있나?”

“자신 있으면 얼굴이나 보게 로브를 벗어라. 아니면….”

내가 벗겨도 상관없고.

가이온이 대검을 들자 검붉은 오러가 맺히며 흉흉한 빛을 발했다.

상대가 누구든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상 이사장과의 약속에 따라 그들을 죽여야 한다. 이만한 실력자는 팔강을 제외하고는 상대할 수 없으니.

‘…제자 놈은 가능할까?’

곁에 있으면 시켜 봤을 텐데.

그는 요즘 찾아오지도 않는 괘씸한 제자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흐…. 아니 우리 먹잇감 중에서 이만한 강자가 나온 것이 우스워서 그렇다.”

“…먹이.”

떠오른 것이 있는지 가이온의 얼굴이 굳었다.

“안 그런가? 20년 전이 마지막이니 이런 강자가 생기기도 하는군.”

“아니, 그때도 저놈은 있지 않았나? 자네가 잠들었을 때니 헷갈릴 만도 하군.”

“아, 레이븐 경.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때 진조 한 분이 직접 상대해 보겠다며 외출했을 때.”

어두운 로브의 어둠 속에서 피처럼 붉은 시선이 가이온을 향했다.

“저놈의 부족을 청소하러 같이 가지 않았나.”

“…아.”

가이온의 기세가 미친 듯이 폭발했다.

그는 익숙함의 원인을 찾았다. 그가 평생 찾던 모기 새끼들. 잠시 외출한 틈을 타 부족을 멸족시킨 존재이자, 자신이 갈슈딘 아카데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든 이유.

흡혈귀들.

그가 아까와는 달리 웃음기 하나 없이 물었다.

그의 노란 동공이 쫓던 사냥감을 찾은 듯 서늘하게 변했다.

“그림자 열도, 거기서 온 것이 맞나?”

“짐승 놈이 우리를 알긴 아는군. 역시 키우는 가축 중에서도 영리한….”

쾅-

벨두크. 도발을 감행하던 흡혈귀의 머리가 박살 났다. 그는 흩어지는 시야를 바라보며 짐승왕의 평가를 수정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무력은 최소 한 단계 위.’

그의 몸이 피안개로 변하더니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다시 몸 상태를 변화시켰을 때는 이미 머리는 재생된 뒤였다.

벗겨진 로브 사이로 사교장이라도 나가는 듯 빗겨진 머리와 고급스러운 옷 그리고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몰랐다면 귀족 도련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복장.

“레이븐 경. 시체 놈들이 알려준 것보다 한 단계는 더 강해 보이는군.”

“…쯧, 나중에 놈들에게 값을 따로 받을 수밖에. 어쨌든 못할 것도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 일단 팔강의 시체 두 구를 달라 했으니….”

먼저 죽이고 보지.

세 개의 핏빛이 번쩍이며 그를 습격했다.

가이온은 평소에 짓던 웃음없이 땅을 박찼다.

“일단 너희를 해치운 후에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아보면 되겠어.”

쾅-!

팔강급 네 명의 전투가 막을 올렸다.

* * *

릴리트는 하이젤의 표정을 본 즉시 다시 공간을 넘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뒤돌아봤지만, 그녀가 빠져나온 통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간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마왕님.”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가 짓던 표정을, 그녀는 잊지 못했다. 이번만큼은 그가 자신 때문에 휘둘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왕은 약점이 없어야 한다.’

만약 자신 때문에 하이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하이젤 님이 나를 필요로 하니.’

잠시간은 괜찮을 것이다.

인간계에 있는 그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그에게 부족한 것이 없게끔 도와주는 것뿐이다.

‘정말, 그것뿐이야?’

그녀는 피어나는 사사로운 감정을 갈무리했다.

지금은 하이젤 님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푸슉-

왼쪽 가슴으로 긴 날붙이가 밀려들어 왔다.

“아…?”

그녀는 고개를 내리고 가슴을 꿰뚫고 들어온 검이 무엇을 뜻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내가….”

죽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광경에 고개를 돌리자, 짙푸른 청발을 지닌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작은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건 하이젤을 위해서지….”

그녀의 의식이 점차 검게 물들며 소리가 멀어졌다. 전신에 힘이 빠졌고, 흘러내린 피 웅덩이는 따뜻했다.

“…라인하르트?”

간신이 한 마디를 내뱉자, 놈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푸욱-

그러다 갑자기 다시 칼날을 후벼팠다.

연거푸 찌른 손속엔 망설임 따윈 없었고,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그녀의 말에 겁이라도 먹은 듯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피 웅덩이로 몸이 무너지자 다급하게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릴리트는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멍하니 손을 움직였다.

멀리서 검은 머리가 보인 것 같았다.

그녀의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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