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알렌은 밀레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는 짧지 않았지만 온종일 이야기할 정도로 길지는 않았다.
알렌은 담담하게 그리고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이야기를 끝냈다.
“…그러니 과거에 신경 쓰더라도, 그것에 매몰되기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일 겁니다.”
“…….”
그녀는 알렌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알렌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그녀에게 하는 이야기였지만, 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윌리엄의 동생.”
자신과 이름 한 글자가 다른 동생을 찾는다고 했지.
“그리고…, 바로크 가문에도 한 번 들르는 게 좋겠지요.”
에반의 가문.
실질적으로 자신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단지, 다이크 상단이나 스콜을 이용해 수면 밑으로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광장 앞이었다.
그녀는 광장 입구에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아까와 달리 뭔가 결정을 내린 듯 후련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워, 후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후배의 말대로… 윌리엄의 동생을 찾아볼 생각이야. 찾아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네 말대로 앞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 아니겠어?”
알렌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는 그녀를 보고는, 슬쩍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을 묻기에는 지금이 적기였다.
“…선배님의 가문도 있지 않습니까?”
“가문?”
“예, 제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 프세우도.
밀레드 프세우도스.
“이사장님과 성이 비슷하지 않으십니까.”
두 사람의 성은 지나칠 정도로 비슷했다.
현대의 공용어가 고대 제국에서 온 것인 만큼 변형을 여러 번 거쳤거나 혹은 지금은 쓰지 않는 사어와 고어가 섞여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가문 명은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가문에 대한 귀족들의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하니.
“혹시 어떤 관계가 있으신 겁니까? 아니면 제 착각일 뿐입니까. 제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착각이라고 말은 해도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이 존재하고 있기에, 대륙 어디에서든 라이온하트 가문은 존재할 수 없다.
가문이란 그런 것이다.
비슷해서도 안 되며 독보적이고, 유일해야 한다.
이름은 겹칠 수 있을지언정 가문 명은 비슷해서도 안 된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가문의 여기사 카밀라 카터의 조상처럼 마부란 직업을 대대손손 물려받았을 경우, 카터(Carter)의 성을 받을 수 있다.
“……그건.”
알렌의 물음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갈등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결심을 했는지 결연히 눈을 빛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후배,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마. 내 성인 프세우도스는-.”
그러나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쿠구궁-
방울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도시 근처에서 여섯 개의 강대한 힘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알렌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즉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선배,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습니다. 일단 먼저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렌 후배, 이게 무슨….”
알렌은 그녀와 만나기 전 파악해 둔 율리우스의 동선을 생각했다.
‘그늘진 여왕이 엘피스 주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몰려든다고 했지.’
지금까지의 흐름을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측할 수 있었다. 율리우스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가정하면?
결국, 아카데미에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혼란을 일으키는 건 에스테도르가 될 테고, 해결하는 건 율리우스의 역할이 되겠지.
밀레드는 강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알렌이 향하려 하자 기겁했다.
“잠깐, 후배 무엇을 하려는 거야!”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말을 하던 알렌의 표정이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굳어졌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한 번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던 공간이 또 한 번 흔들리자 정말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지직-
거울이 깨지듯 땅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주변의 공간이 박살 났다.
엘피스 주변이 부서지며 뒤섞이고 있었다.
* * *
“…아직도 준비가 안 되었다고?”
그녀를 질책하는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는 괴팍한 늙은이라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담담히 답했다.
“마도여황, 조금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 건가요? 늙으면 느긋해진다잖아요.”
“나보다 더 늙어서 느긋이 준비하는 건가?”
“…제가 당신보다 젊을 텐데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사장을 맡았으면서 무슨…, 적당히 하고 준비나 해!”
베네사 사브리나는 그녀에게 질책하면서도 수인을 맺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 작업은 8위계 끝에 다다른 그녀조차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차원문 설치와 개방.
영혼 식별과 탐색.
그리고 마족의 추방.
우선적으로 엘피스와 갈슈딘 사막의 일부를 범위에 넣어서 준비했던 마법을 발동시킨다. 마법이 정상적으로 발동한다면 마탑에서 준비한 유물로 대륙 전체로 범위를 넓힌다.
그녀 혼자였다면 몇 년이 걸려도 모자랐겠지만, 아나스타샤와 힘을 합치니 몇 개월이면 충분했다.
“마왕이 등장하면 이 방법은 통하지도 않을 게야.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잠시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하며 때를 기다렸다.
-아나스타샤 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엘피스의 인근에 도달했습니다.
그녀와 연결된 사령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나스타샤는 그걸 듣자마자 마력을 끌어 올렸다.
수백 미터의 거대한 원의 중앙에서 그녀가 본격적으로 마법을 발동시키자, 마법진 안에 새겨진 작은 글자들이 푸른빛으로 변해 하늘로 떠올랐다.
베네사는 그녀를 보조해 아나스타샤의 부담을 덜었다.
마법진의 끝에는 커다란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마법진을 채웠다.
아나스타샤의 고리 여덞 개가 크게 진동했고, 그녀가 감았던 눈을 떴다.
천상의 시선(Heavenly Gaze)
파란색 글자는 한곳으로 모이나 싶더니, 거대한 구름이 되어 빠르게 흩어졌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베네사가 다음 마법을 이어받았다.
‘이제 숨어 있는 마족들의 모습이 드러날 테니….’
베네사의 몸에서 일곱 가지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력을 무지개처럼 일곱 가지 색으로 본다.
그건 그녀만의 재능이자, 마도여황이 되어 마탑도시를 군림하고 지배할 수 있게끔 한 원천이었다.
어쩌면 조상 중에 용이나 거인 같은 고대 종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베네사는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며, 손을 휘둘렀다. 미리 만들어진 마법진에 마력이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갔다.
마법진의 위로 무채색의 빛이 떠오르더니 마력이 빨려 들어갈수록 공간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빛은 그녀들이 몇 달간 준비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쿠구궁-
“이제 고생도 끝이구나.”
베네사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회수하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차질없이 성공한다면, 이제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갈 일만 남았다.
‘마리아가 잘해 줘야겠지.’
아나스타샤는 도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그녀를 생각했다. 그러나 마법이 발동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쿠우웅-
베네사가 심각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아나스타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줘야 할 거 같은데?”
그러나 놀란 건 일을 계획했던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차원문이 등장했다.
* * *
“…이제 거의 다 되었구나.”
“모두 마왕님 덕분이지.”
마족들은 지하의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을 바라봤다.
그건 그들이 따로 손보지 않아도 옅은 빛무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마법진의 중간에는 방대한 마력을 공급할 드레이크 하트가 동력원이 되어 중간에 놓여 있었다.
하이젤은 이 모든 것을 몇 번이고 해 봤던 것처럼 능숙하게 설치한 후에 대기하고 있으라 그랬다.
“역시 초대 마왕님인가….”
“용사와 싸우고 마족을 위해 인간계에 쳐들어간 최초의 분인데 당연하지.”
그들에게 있어 하이젤은 유명했다.
마계에 등장한 최초의 마왕이자 인간계를 침공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마족.
그의 행적에 대한 전설은 마계 곳곳으로 퍼졌었고, 인간계로 쳐들어간 이후에도 승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간간이 들려왔다.
다만 아쉽게도 전쟁이 심화된 이후부턴 소식이 영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용사와 함께 공멸했다는 소식과 동시에 침공이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졌다.
비록 침공에는 실패했지만 유일하게 마족을 위해 일어섰다는 점과 사실상 침공에 거의 성공했다는 점 때문에 마계 내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말 그대로 전설 속 대상.
그런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줄이야.
“분명히 다시 인간계를 노리시는 거겠지?”
“…아마, 힘을 회복하신 뒤에 다시 마계와의 차원문을 열 생각이신 건 아닐까?”
그들은 그럴듯한 가설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따르면 좋겠지만…, 우리 힘은 약하니까 안 되겠지?”
“하이젤 님이 고생하시는 거 못 봤냐? 우리 같은 약소 종족은… 방해만 된다고.”
이곳에서도.
그리고 마계에서도.
그들이 마계에서 이곳으로 보내진 이유는 단 하나. 약했기 때문이다.
하이젤의 사후, 마왕을 자칭하는 이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마왕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그를 제외하고, 새롭게 오른 현 마왕밖에 없었다.
정말로 마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
그는 포악하고 오만했으나 무력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계를 다시 침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함부로 침공했다가는 초대 마왕처럼 실패할 수도 있는 일.
그는 우선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약소 종족들을 인간계로 보내 정보를 모으라 했다.
“릴리트 님은 이곳에 계실까?”
“…아마도.”
그건 약소 종족들을 대변하던 릴리트도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도망칠 구석을 마련하고 나서야 인간계로 보내졌다.
그랬던 그녀가 다시 하이젤을 만났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화가 복이 되었다 할 수 있었다.
마족들의 충성심은 엄청났다.
마계에서는 타의로 인간계로 보내지고, 인간계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었음에도 그들은 마왕을 섬겼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하이젤은 유일한 그들의 편이었다.
우우웅-
그때 마법진이 진동했다.
반절이 조금 넘게 남았던 마력이 갑작스럽게 차올랐고, 마법진이 발동되려는 듯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이젤이 말했던 차원문이 열리려는 전조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지지직-
허공이 깨져나가며 금이 갔다.
마족들은 그 현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일평생 살아남게 만들었던 생존 감각이 더없이 날카롭게 여길 떠나라 일렀다.
“당장 떠나야 한다! 당장! 하이젤 님이 말해 준 사항에 이런 일은 없었다!”
다른 이들도 금방 동의했다.
하이젤이 말한 대로라면 마법진이 발동하는 즉시 그 위로 마계로 향하는 구멍이 뚫려야 했다.
그 구멍은 마계의 외곽과 연결되어 현마왕의 눈에 걸릴 수 있으니 숨어있으라고만 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나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건 마법진이든 외부의 영향이든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허나, 그들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 하얀 연기가 스며들어 그들을 휘감았다.
그 탓에 마족들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쾅-!
그 멈칫거림이 도망칠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