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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76화 (176/212)

176화

거대한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손짓 한 번에 대지가 가라앉았고, 검의 궤적에 따라 산이 갈렸다.

마왕과 용사의 전투는 하루가 넘게 지속되었다.

멀리서 그들의 전투를 구경하던 이들은 전설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실감할 정도로, 그들의 전투는 치열했다.

겉보기에는.

“용사!”

하이젤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용사는 그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얼마나 차이 나는 거지?

처음에는 자신이 압도하는 것 같았다.

한 달간의 전투로 정체되었던 실력이 성장했으니까.

그러나 왜 공격이 맞지 않는가.

하이젤의 공격은 일부러 용사를 피해가기라도 하듯 허공을 스쳤다. 그러나 용사의 검은 자신의 마기를 베어 가르며 몸에 상처를 남겼다.

작은 상처일 뿐이었으나 하이젤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명백하게 봐주고 있다는 증거.

그 모습에 분노한 그가 고함을 질렀다.

“언제까지 그따위로 할 생각이냐!”

그의 발밑에서 마기가 솟아올랐고 한순간에 주위 공간이 짓눌렸다. 용사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듯 몸이 멈칫했다. 하이젤이 기회를 잡은 듯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후웅-

허깨비처럼 용사의 몸이 빛으로 변했다.

잠시 공격을 멈춘 그는 붉게 물든 시야 사이로 그를 응시했다.

‘언제부터.’

자신을 압도하기 시작했나.

전투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니면 놈도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반년의 시간을 수련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가슴 속에서 검은 감정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마치 처음부터 그의 감정이었다는 듯 조용히 하이젤에게 스며들었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떤 방법이냐!”

그의 외침에 용사가 투명한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어떤 방법으로 강해진 거냐 용사! 말해라!”

“마왕, 정신 차려라. 너는 ■■■■에 영향을 받고 있을 뿐이다.”

용사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망설였다. 그러다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뭐?”

“■■■■과 연결되어 있을 뿐이라고.”

용사가 무어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가 귀를 기울이려던 순간, 머릿속에서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이 기회다. 방심하고 있을 때 공격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적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그래, 들을 필요가 없지.’

그는 그가 말을 하는 틈을 타 달려들었다. 용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의 공격은 당연히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가 다시 공격을 이어 나가려던 차에, 용사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직접 깨달아야 하나 보네.”

쾅!

마왕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부디,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게. 너무 늦는다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

그날 이후부터 마왕은 용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충돌했다. 이변은 없었다. 용사는 항상 그를 압도했고, 조롱이라도 하듯 마지막에는 마왕을 풀어 줬다.

“마왕, 잘 생각해 봐. 지금까지의 행동이 네 의지가 정말 맞나?”

“닥쳐라…!”

하이젤은 모든 수를 동원했다.

마계에서 얻은 필살기와 감추어 두었던 능력 전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빨리 움직여라, 아니면 늦을 거야.”

“개소리!”

그의 공격은 용사에게 닿지 않았다. 용사는 작게 속삭였다.

“굴레를 깨야 한다. 마왕.”

하이젤은 다시 틈을 노렸다. 용사는 그의 도전을 받아 주었다.

그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싸웠다. 사막에서 늪에서 바다에서 그리고 다시 평원에서.

세간에는 용사와 마왕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수십 번이 넘도록 싸운다지만, 마왕은 소문을 퍼트린 자가 용사라 짐작했다.

다른 이들은 그 진위를 구별할 수 없을 테니.

그것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어느새 가슴에 스며들었던 불씨는, 더욱 크게 타올라 꺼트리기에도 늦어 보였다.

“…용사!”

하이젤은 주먹을 후려쳤다.

쾅!

힘겹게 모은 자료가 쌓인 서재의 벽이 박살 났다.

힘이 모자랐다.

용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더해 갔고, 자신은 다시 실력이 정체되었다.

다시 실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방법이 없다.”

그런 방법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마계에서부터 모았던 자료와 새롭게 제국에서 강탈한 문서에도 단기간에 용사에 비할 만큼 힘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없었다.

‘용사가 마음을 바꾼다면….’

전쟁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힘을 끌어 올려야 한단 말이다!

초조함을 곱씹을수록 다급함이 몰려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들을 죽이며 전장을 돌아다녔을 때, 실력이 향상됐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용사가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인간이 아닌 다른 이들.

‘예컨대 마족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면….’

그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마음이 기우는 찰나, 그의 옆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마왕님. 괜찮으신가요?”

“아.”

고개를 돌리자 릴리트가 부서진 벽의 구멍으로 걸어 나왔다.

“릴리트.”

“요즘 서재에만 박혀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걱정하고 있다고?”

“예. 용사와 격전을 치르시기에 혹 부상이라도 당하셨을까….”

“하, 하….”

그녀의 말에 하이젤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굴레를 깨야 한다. 마왕.’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간, 그녀가 급히 다가왔다. 릴리트의 순한 눈매가 눈앞에 보였다. 그 속에 담긴 감정까지도.

“…정말 괜찮으신 게 맞나요? 정말 부상이 심각하시다면 후퇴 준비를….”

하이젤은 애써 그녀를 마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돌아간다면 큰 피해를 입을 거다.”

하이젤과 용사가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한 이후로 전쟁은 더 심화되었다.

전쟁의 주전장은 중부였지만, 남부와 서부 그리고 동부와 북부까지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금 등을 돌린다면 용사는 몰라도 제국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철저히 멸해 없애 버리려 들겠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네 할 일을 하도록 해.”

“…네.”

강해지는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용사 역시 단기간에 실력을 끌어 올렸으니 뭔가 부작용이 있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마족을 위해.

그러나 용사는 그의 안일한 믿음을 비웃듯, 단 한 번도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한 번이면 될 거다.’

감정은 닳아 갔고.

‘다음이 마지막이겠지.’

희망은 다해 갔다.

‘조금만 버티면….’

그렇게….

“아직까지 모르겠냐?”

일 년이 흘렀다.

하이젤은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했다. 어느덧 수백 번의 패배가 쌓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다음을 기약하던 하이젤의 눈이 탁해졌다.

“조금이면 다 끝나는데 아직도….”

용사가 어두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하이젤이 아닌 그의 위를 향해 있었다.

그 모습에 결국 하이젤의 감정이 폭발했다.

“무엇을!”

“…….”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거냐! 굴레니, 다 끝나 간다느니, 나를 조롱하니 기분이 좋나?”

“아니, 나는 도와주기 위해….”

“닥쳐라!”

하이젤은, 아니 마왕은 새로운 결심을 세웠다.

“네가 나를 붙잡아 두는 사이에 전쟁은 끝나 가고 있다.”

용사의 여덟 동료는 각지에서 활약했고, 용사가 없는 전장을 승리로 이끌었다. 마족은 열세에 처했고, 영역은 갈수록 줄어만 들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네 장단에 어울려 줘야 하나!”

그를 태우던 감정의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하이젤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굴레를 깨라고? 그래, 내가 깨 주마.”

마족을 위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나? 그리고 그 희생은 마족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도시로 돌아온 하이젤은 병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마왕님!”

“이런 누추한 곳에….”

“일어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들은 각자 불편한 자세로 하이젤을 맞이했다. 막상 그들의 모습을 본 하이젤은 흔들렸다.

‘…이것이 정말 옳은가?’

그러나 그 생각이 들기 무섭게 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노, 시샘, 질투, 불안, 초조 그리고 열등감.

그와 함께 타오르던 감정들도 함께.

-마족을 위해서다.

하이젤은 서늘하게 변한 얼굴로 자신을 우러러보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 양심일 수도 있었고…, 흔들리는 결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그러니, 나를 위해 죽어라.”

그가 손을 들었고.

아무도 반항하지 않았다.

촤악-

힘이 늘어났다.

* * *

처음이 어려울 뿐이었다.

망설였던 처음과 다르게 늘어나는 힘을 느낄수록 그의 망설임은 사라졌다.

촤악-

이걸로 다섯 번째.

부상자들을 한 번에 모아 두기 힘들었기에 여러 곳에 분산시켜 보호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모여 있는 이들은 그의 손짓 한 번에 사라졌다.

반항하는 이들은 없었다.

“…….”

릴리트는 그가 세 번째로 마족들을 죽일 때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망연하게 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뒤를 따랐다.

어쩌면 할 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도 하이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전쟁은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국도 마족도 선을 지키지 않았다.

서로 끝장을 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망설이지 않았고, 시체가 길가의 먼지처럼 굴러다녔다.

“…이제 상대할 만하나?”

“무슨 짓을 한 거야.”

“굴레를 깼지.”

하이젤이 웃었다. 용사가 경악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이젤의 공격이 그의 방어를 뚫었다.

쾅!

용사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아직인가….’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이젤은 용사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회피만 하던 용사 역시 그의 힘이 강해지니, 이전처럼 무작정 피할 수만은 없었다.

“놈들을 죽여라!”

“목숨을 바쳐라!”

“헬-크리티카.”

마왕을 위하여.

마족은 목숨을 바쳐 제국과 전투를 벌였고, 부상당한 이들은 모두 마왕에게 목숨을 바쳤다.

마왕의 힘은 늘어났고, 마족의 수는 줄어 갔다.

그가 시행했던 정책들은 자연히 수포로 돌아갔다. 도시는 망가졌고, 성은 부서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노력했다.

릴리트는 이제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서류를 정리했다.

용사와의 일전을 마친 그날, 하이젤은 오랜만에 성으로 돌아왔다.

“…왜 아직도 그걸 정리하고 있지?”

그녀의 모습을 살핀 하이젤이 멈칫했다.

그를 따라다니던 릴리트는 하이젤이 전투에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홀로 이곳을 지켰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녀가 쓰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피로에 절여 얼굴빛이 어두워졌음에도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자주 들러 주세요. 마족을 위하는 방법, 아직도 궁금하시죠?”

“……그래.”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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