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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75화 (175/212)

175화

믿지 못할 소식에 하이젤이 직접 그 현장으로 향했다.

‘용사가 먼저 습격을 했다?’

하이젤은 인정하기 싫었으나, 용사는 용사라는 인물에 적합한 이었다.

그렇기에 용사가 힘을 사용할 때는, 마족들이 습격하거나 혹은 스스로 찾아올 때 뿐.

때문에 마족들은 용사가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용사가 노리는 적은 마왕,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동료를 소집하거나 힘을 기르기에 바빴지 국지적인 전쟁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런 그의 행동 때문에 하이젤 역시 그를 자신의 적수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성격이 경박한 것만 제외한다면.’

그의 행실은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용사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마왕도 제국을 돌아다니며 전장을 휘젓지 않았다.

그건 둘의 암묵적인 규칙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사가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 찾아오면, 마왕은 그의 도전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용사가 그걸 깼다고?

“죽어라-! 용사!”

“용사만 죽인다면 우리는 승리한다!”

“물러서지 마라!”

전장의 중심에는 용사가 피에 절여진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병사들의 비명과 폭음 그리고 죽음이 질게 흐르는 한복판에서, 용사는 묵묵히 마족들을 상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검에 몸이 갈라졌고, 한눈을 파는 순간 시야가 하늘을 날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우연이라도 용사를 죽일 수 있을까 돌격했던 반절의 병력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

그 모습에 마족들이라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몸을 움직였다. 공포만으로는 그들의 투지를 꺼트리기엔 부족했다.

“…놈은 어차피 하나다! 조금 체력이라도 빼놓는다면 마왕님께서…!”

그들 역시 절박했기에.

“아니.”

하이젤은 또다시 내리치는 용사의 검을 받아내며 그들의 앞에 내려섰다.

“용사는 내가 상대할 테니 다들 물러나라.”

“마왕님!”

그가 나서자 용사도 움직임을 멈췄다.

“부상자를 챙기고, 돌아가 정비를 끝마쳐라.”

그를 상대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

쾅-!

용사와 마왕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 난폭한 전투의 여파에 병사들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와 부딪치던 하이젤은 용사의 상태에 이상함을 느꼈다.

‘…움직임이.’

평소와 달리 난폭하다.

평소에 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던 검격은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있었고, 눈 역시 핏발이 가득해 저번과는 다르게 이성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공격을 받아친 하이젤은 한 걸음 물러나 용사를 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평소와 너무 다른데….”

“…평소와 다르다고? 하, 하하.”

용사는 그의 말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웃음을 뚝 멈추더니,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로 그를 노려봤다.

“평소의 내가 어떤데?”

“…뭐?”

“평소의 나는 어떠냐고.”

하이젤은 그의 행동에 눈을 찌푸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상대하겠다며 날뛰던 놈이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빛의 용사? 정의로운 영웅? 예언의 주인? 아니면… 마왕의 대적자?”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실소했다.

용사의 모습에 마왕은 휘둘리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떠 그를 살폈다.

‘기회인가.’

지금의 용사는 정상적이지 않다.

그럼 그를 죽이기에 적기라고 할 수 있지 않나?

하이젤이 말없이 몸을 날렸다.

용사는 방금 부딪쳤던 때와 다르게 유려하게 공격을 피했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쉽게 당할 것 같아?”

낮게 중얼거리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마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굴레를 깨야 해.”

“…그게 무슨 소리냐.”

“마왕.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니 물을게.”

용사는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너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나?”

단 한 번도?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용사는 감쪽같이 사라진 듯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제국 전역에 들끓는 불안에 황제가 직접 용사는 살아 있으며 그저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한 수련을 하고 있을 뿐이라 선포할 정도였다.

선포가 있고서야 불안감이 가라앉으며, 전쟁의 상황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하이젤은 마족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마왕님, 이번 일은 솔직하게 무리인 것 같습니다.”

“릴리트. 네가 나에게 마족을 위한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았나. 이 정도 일로 엄살을 피우는 건가?”

하이젤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용사의 것처럼.

하지만 그녀도 지난 일 년간 그에게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이젤도 찔리는 게 없지는 않은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책상 위로는, 아니 방 전체에 서류가 가득했다.

“마왕님의 일까지 제가 맡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거기다… 도시의 일까지.”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마왕성 내부의 일 뿐만 아니라 외부의 일까지 맡게 되었다.

“…대신 권력의 중추에 있게 되지 않았느냐. 마족 중에 이렇게 내 곁을 차지한 이는 없었다.”

하이젤의 뻔뻔한 소리에 그녀는 눈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대화에 그녀의 입가에 돌연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정말, 저를 놓아줄 생각은 있긴 있으세요?”

“놓아달라?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저도 갈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부터.

용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마왕은 일을 혼자서 처리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참모가 항상 뒤를 따랐고, 전쟁 외에 다른 것도 신경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고 했지?”

“예, 예… 그렇습니다.”

“빠르게 끝내지.”

농사.

“그러니까, 저 산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고?”

“…크게 뚫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 하나만 통과할….”

“적어도 오우거는 통과할 수 있어야 하겠지. 알았다.”

건축.

“능력에 대한 분류는 아직인가?”

“거, 거의 다 끝냈습니다! 이제 두 달이면 마족들의 능력을 판별하기 한층 쉬워질 겁니다.”

“일주일 내로 끝내라.”

“…네.”

교육.

“흉터가 가득한 얼굴을 되돌릴 수 있나?”

“오래된 상처라면 힘들지만, 엘릭서가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흠, 잘됐군.”

의료.

죽은 땅을 완전히 뒤엎어 지하 깊숙이 파묻힌 흙을 끌어 올리고.

빨라도 몇 주는 걸릴 작업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무리한다.

마구잡이식으로 분류하던 마족의 능력 체계를 바로잡고.

부상자와 병자에 대한 치료와 복귀에 관심을 가졌다.

어설픈 것도 있고, 실패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왕은 지금까지 정복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하이젤 역시 자신의 변화를 체감할 정도로.

“마왕님, 현재 제국의 기습 빈도가…, 마왕님?”

그의 새로운 취미는 바뀐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잠시 듣지 못했다 뭐라고?”

“요즘 자주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어조에 서린 걱정에 하이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시 머리가 아픈 것뿐이니 괜찮다. 너무 일을 많이 한 탓이겠지.”

“…그래도.”

“그렇게 걱정된다면 남은 일은 네가 하도록 해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아.”

반년이라는 시간은 관계가 진전되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럼 알아서 처리할 테니 나중에 확인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는 전처럼 위엄 있는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좀 더 부드러워졌고, 발밑을 돌볼 줄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정말 옳은지, 맞는 길인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전과 달리 홀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전투와 전장 그리고 정복에만 몰두하던 때와 다르게 생기가 있었으니.

하이젤은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마족 대군 삼만 명이 한 명에게 후퇴했다!

용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는.

용사가 다시 등장하기 무섭게 전장 전역이 끓어올랐다.

전투가 있는 곳이라면 등장해 사기를 북돋웠고, 마왕이 나타나면 귀신같이 사라졌다.

“제국에서 신무기를 사용해 피해가 급증….”

“용사가 전장에 있는 것만으로 사기의 차이가….”

“최근 안정화되었던 전장이 다시 ….”

쾅!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가!”

하이젤은 끝없이 들려오는 암울한 보고에 소리쳤다.

벌써 몇 번째인가. 커져만 가는 피해에 당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전과 다른 모습에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마왕은 눈을 감았다.

‘용사는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너는?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하지만 용사는 나와 직접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도.

‘나도?’

-다른 대책을 세우면 될 일 아닌가?

‘대책을….’

-저번에 용사가 마족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용사가 했는데 마왕이 못할 건 무엇인가?

하이젤은 멍하게 읊조렸다.

“…굴레, 굴레라 했지?”

그래, 놈이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자신도 하면 될 일이다.

“릴리트, 용사를 신경 쓰지 말고 공격을 개시하라.”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뻥긋했다가, 그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 마왕은 여러 격전지를 휘젓기 시작했다.

강자는 강자의 품격이 있다며 용사와 상대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그의 행동이 바뀌었다.

하늘을 수놓는 비공선을 땅으로 떨어트렸고, 엘프의 움직이는 숲을 통째로 불태웠다. 수백의 기사를 갈아 버렸으며, 수인들의 가죽을 벗겼다.

그럼에도 하이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먼저 행동을 바꾼 것은 용사였기에.

“…마왕님, 괜찮으십니까? 요새 전장에서 잔혹한 모습을 보이신다고….”

“이상할 것이 있나? 진짜 전쟁이 시작된 거지.”

담담히 답하는 그의 모습에 릴리트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마족들의 희생자 수가 늘어서 그렇나?

‘더 많이 죽이면 되겠군.’

그러면 그녀도 괜찮아지리라.

마왕이 그렇게 행동하기 시작하자, 이제 용사가 그를 막기 위해 전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는 용사와 맞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본 피해가 얼마인가.

그렇게 한 달 동안 마왕과 용사는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를 벌였다.

하이젤은 최선을 다해 제국을 상대하며 용사를 피했고, 용사는 여러 계획을 중단하고 마왕만을 쫓았다.

용사의 행동이 달라졌음에도 그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 당했는데 그만둔다고 따라 해야 하는가?

‘그 말이 옳다.’

-용사야말로 위선자에 불과하다. 반대로 너는 진실하지.

‘그 말도 옳다.’

-그러니… 이참에 인간계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건 어떤가.

‘그건….’

-결국, 같이 공생할 수는 없지 않나?

마침 정체되었던 하이젤의 실력도 늘기 시작했다. 학살을 반복하면 할수록 마계에 있었던 때처럼 그의 실력이 상승했다.

이제 용사를 상대해도 압도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때쯤, 그는 용사와 마주했다.

저벅저벅-

이번에 본 용사는 처음 봤을 때와도, 반년 전과도 달랐다.

진지한 얼굴에 주변을 맴도는 정적인 분위기.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확실하게 ‘달라졌다’고 느낄 수 있었다.

“용사, 오랜….”

“물들었구나.”

그런 그를 보며 하이젤이 입을 여는 순간, 그가 말을 끊었다.

“뭐라?”

“…알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어. 그저 휘둘렸을 뿐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용사의 안색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그렇다면.”

순백의 검이 밤하늘 아래서 반짝였다.

하이젤은 그의 눈을 보았고, 그곳에서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붉게 물든 눈과 온몸에 절여진 혈향.

그건 진실로 마왕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너를 도와주마.”

순백의 용사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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