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자신은 특별하다.
그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하이젤은 처음부터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척박한 마계.
버려진 수많은 마족들과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마물들이 뒤섞인 전장 속에서 그는 눈을 떴다.
그는 눈앞에서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마물을 때려죽였고, 며칠도 되지 않아 마기를 다루기까지 했다.
수없이 죽어가는 마족을 보며 하이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내가 마족을 다스려야 한다.’
그건 마치 본능과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본 마계는 강자존이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았고, 약한 자는 죽었다.
그렇기에 마족과 마물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해야 했다.
세상은 지옥이었고, 어디에도 낙원은 없었다.
그것을 결심한 그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하이젤은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음에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그것이 이상하다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느꼈을 뿐.
그는 살아남은 마족을 끌어모으며, 저항하는 모든 것을 죽였다.
하이젤의 세력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그에게 부하를 자청하며 들어오는 이들은 늘어만 갔다.
물론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 마계의 강자들.
갓 세력을 갖춘 그보다 수십 배는 오래 살며 자리를 지킨 괴물들은 하이젤의 움직임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겼다.”
항상 승자는 그였다.
위기가 덮쳐 오면 우연이 겹쳐 살아남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보물과 기연을 얻으며 강해졌다.
그 누구도 하이젤을 막지 못했다.
‘…저는 릴리트입니다.’
그의 등장을 반가워한 것은 숨어 살던 약소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하이젤이 세력을 넓힐 때 기꺼이 그의 아래로 들어갔다. 그의 세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가 하는 일은 변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자들을 죽이고, 다른 세력을 통일한다.
그 와중에 위기가 닥칠 때도 있었지만 마치 행운이 그를 돕듯 언제나 그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이를 깨달았을 때, 그는 ‘마왕’이란 칭호를 가진 채였다.
모든 세력을 통합한 하이젤은 명실공히 마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계는 척박했다.
누군가 마족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그의 지배 아래에 들어왔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이젤은 생각했다.
-마족들은 여전히 살아남기 힘들다.
‘그렇다면….’
-풍족한 인간계로 쳐들어가야 한다.
‘누구를 위해?’
-마족을 위해.
하이젤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인간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그 결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 마계의 귀중한 자원 모두를 소비했지만 상관없었다. 풍족한 인간계를 정복한다면 이따위 마계에 다시 올 필요 없지 않나.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예언대로 마족의 왕이 나타났다고?”
이제 갓 청년이 된 듯한 남자가 그를 막아섰다.
그는 하이젤보다 못했지만, 약하지 않은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직접 소개하기는 쑥스러운데 말하자면….”
마왕은 거기서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마주했다.
“용사. 마왕을 막을 용사다.”
* * *
마왕이 인간계에 쳐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마족들은 금방 인간계를 정복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쳐들어왔을 때만 해도 압도적인 능력으로 영역을 넓히던 그들은 금세 난관에 부딪혔다.
“피해가 어떻게 되지?”
“기사단의 기습으로 인해 오천의 병력이 당했습니다.”
“기사단은?”
“…백오십여 명을 죽이는 데 그쳤습니다.”
릴리트는 긴장한 얼굴로 하이젤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가 세력을 넓힐 때 초기에 합류한 이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현재는 제법 높은 직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렇기에 약소한 세력을 가졌던 이전과 다르게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이는 없었다.
마왕을 제외하고는.
“릴리트,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하이젤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군이 입은 피해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 모습.
그의 의중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아마 마왕 본인 말고는 아무도 없으리라. 이곳에 있는 이들도 그가 왜 마계를 통일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계로 쳐들어온 이유 역시 마찬가지.
‘힘을 더 축적해도 됐을 텐데.’
‘그렇게 인간계로 서두르려는 이유가 뭐지?’
‘이대로는 마족의 피해가 너무 커진다.’
그는 홀로 있는 시간이 길었고, 커다란 결정 역시 그가 혼자서 처리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의 명을 받들기 위해 있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물러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물러나자고?”
그의 물음에 다른 이들은 눈을 피했다.
마왕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에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릴리트는 억지로 입을 열어야 했다. 이곳 병력에는 그녀의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여기서 입을 다문다면 그들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족의 수가 많다지만, 여기는 인간의 땅입니다. 처음과 다르게 인간들도 반격을 시작했으니 인간들이 유리한 시점에서 싸워 줄 필요는 없다 생각돼요. 그리고 인간 측의 용사도….”
그녀는 마왕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왕님께 패퇴했던 처음과 다르게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렇다고 마왕님의 승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아군의 전략적인….”
그녀는 하이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급히 변명을 더 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지켜봤다. 그들도 이곳에 자신의 종족이 있었으나, 그들 때문에 마왕에게 따질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이야기했을까.
“…그러니 저희 역시 전략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그녀는 어쩌다 속에 생각해뒀던 방법들까지 다 꺼내게 되었다.
하이젤은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제부터 참모다.”
“…예?”
그는 그것으로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밖에서부터 소름 끼치게 강한 힘의 파동이 흘러왔다. 이러한 힘의 주인은 마왕을 제외하고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마왕, 당장 나와라! 오늘이야말로 너를 끝내 주겠다!”
마왕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닥을 박찼다.
쾅!
천장에 구멍이 뚫리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폭음과 함께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제가 참모라고요?”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동정의 시선을 받으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 후로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가까이에 있게 되었다.
* * *
마왕이 인간계에 쳐들어온 지도 1년이 지났다.
이제 제국 전역에서 마왕이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고, 인간들 역시 마족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건 용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빛에 물든 검이 대기를 갈랐다.
마기마저 정화할 듯한 빛의 마력에 하이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용사가 그를 상대하며 익숙해졌듯, 마왕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마계의 깊은 곳에서 얻은 힘을 사용했다.
몸에서 무채색의 빛이 떠오르며, 허공에서 거대한 거신이 손을 내리쳤다.
형태 변형 - 신의 징벌(Flagellum Del)
거인의 손은 용사의 검기를 박살 내며 아래에 있던 용사의 몸을 짓뭉갰다.
그러나 그는 그 결과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공간의 오른쪽을 후려쳤다.
거대한 손이 지나가자 시야를 가로막던 언덕이 사과를 베어 문 듯 깊게 파였다.
그럼에도 걸리는 것이 없자 하이젤은 주저 없이 자리를 피했다. 그가 피하기 무섭게 거대한 빛의 광선이 날아와 그가 있던 자리를 녹였다.
하이젤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용사의 기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또 도망쳤나.”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와 열 번을 부딪치지 못하던 놈은, 만날 때마다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마법 같은 건 사용하지 못했었는데 어느새 용사는 검이면 검, 마법이면 마법 그 어느 하나 무시하기 힘들어졌다.
도망치는 솜씨도 마찬가지.
하이젤은 두 번째에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성장세를 느끼고 죽이려 했지만, 항상 ‘우연’이 뒤따라 그를 놓치기 일쑤였다.
옛 강자가 나타나 목숨을 건 일격으로 시간을 끌거나.
땅에 묻혀 있던 유물이 폭주해 그에게만 피해를 끼치거나.
갑자기 용사 스스로 각성해서 빠져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동료랍시고 강자들을 데려왔는데,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가 성으로 돌아오자 이제는 제법 일이 익숙해진 듯 릴리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님이 용사와 일전을 벌이는 틈을 타 놈들이 기습해왔습니다. 준비해 온 함정으로 물리쳤지만… 저희 역시 피해를 입긴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죽었지?”
“마족은 이만 명, 인간은 정예만 오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 정도면 괜찮은….”
하이젤은 문득 의문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인간보다 마족이 더 죽었는데 괜찮은 것이 맞나?’
-모든 건 마족을 위해서.
‘애초에 마족은 이제 충분한 양의 땅을 확보했다. 이 정도면 그만둬도 상관없지 않나?’
-모든 건 마족을 위해서.
‘용사를 반드시 상대할 필요도 없다. 혼자서 다른 놈들을 기습한다면….’
-모든 건 마족을 위해서.
하이젤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모든 건 마족을 위해서다.
인간이 있다면 언제든지 마족의 위협이 될 수 있다. 한 번에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야 한다. 그를 위해서 마족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희생 없이 무언가를 이뤄낼 수는 없으니.
용사의 건도 마찬가지.
자신과 같은 강자는 그에 맞는 격의 적만을 상대해야 한다. 용사가 쓰러졌다면 모를까,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른 잔챙이를 노릴 수는 없다.
‘정말로?’
하이젤은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두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가 더 깊은 생각에 빠지기 전에 다시 강한 힘의 파동이 감각의 끝에 걸렸다. 또 용사가 쳐들어왔다.
마왕이 다시 그를 상대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용사는 더 까다로워졌다. 전에는 못 보던 성검을 들기 시작했으며, 곁의 동료도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용사는 마왕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죽어라.”
마계에서 보냈던 세월은 그를 충분히 담금질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두 달이 지났다.
용사가 그와 오십 합을 넘게 겨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이젤이 승리하는 건은 변하지 않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언제쯤일까.
넉 달쯤 지났을 때, 용사는 그와 이백 합을 넘게 맞섰다.
그 후로 또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용사는 그와 하루 종일 맞서 싸웠다.
그럼에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용사는 끊임없이 성장하며 마왕의 목을 노렸고, 마왕은 마치 거기까지라는 듯 정체되었다.
석 달이 더 지나자 마왕의 몸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의 몸에 제법 큰 중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다시 두 달이 지났을 때.
“…….”
마왕은 용사에게 밀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미세하게 밀리고 있는 마왕의 모습을 보며 용사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되겠네?”
마왕의 표정이 처음으로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