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72화 (172/212)
  • 172화

    와아아아-

    수백 대의 마차가 환호를 받으며 도시를 빠져나갔다.

    마차는 육중한 크기였고 말이 아닌 기계가 이끌고 있었다. 그 뒤에는 처음 보는 무기를 이끌고 있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과 자원한 용병과 모험가 그리고 교수들이 나뉘어져 서부로 출발했다.

    네 개로 조직된 연합군 중 서부 지원군의 출병일이었다.

    학생회장이 알렌에게 말했던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에서 지원군에 자원할 이들을 모집했고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홀로 떠나봤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두려움. 그리고 에스테도르에 관한 공포까지.

    대륙에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사고를 터트린 그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들불처럼 번져있었고, 그 시기에 나선 아카데미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6위계와 7위계의 실력자가 즐비한 교수들이 함께하는 건 물론이고 아카데미 보고까지 개방하여 엘릭서를 비롯한 충분한 지원까지 해준다.

    거기다 지원군에 들어가서 공적을 세울 때마다 공적치까지 준다고 하니.

    아카데미의 파격적인 선언에 고민하던 이들도 결국 참가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리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우선순위가 달랐을 뿐.

    단기간에 수천이 넘게 빠져나간 엘피스는 한산하게 변했다.

    전력 대부분이 빠져나간 도시는 누군가 습격하기에 절호의 기회였지만, 특수한 지리적 위치와 성검 그리고 자리를 지키는 팔강이 남아 있는 덕에 생각보다 염려하는 이들은 적었다.

    “후배는 정말 안 가도 괜찮아?”

    줄줄이 이어진 마차의 꼬리를 보던 밀레드가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라인하르트 영지는 엘프 대수림과 가깝다고 들었는데….”

    “그 사이에 산맥이 천연의 장벽이 되어 주기에 정작 방어할 곳은 몇 곳 안 됩니다.”

    알렌의 지인들은 이 기회를 빌려 지원군에 참가했다.

    2황자 일라이자는 망설이다 동부 연합군에 들어갔으며, 프란시스카 역시 동부에서 연락이 끊긴 프린달이 걱정되어 동부 연합군에 지원했다.

    일리아나는 갈까 말까 갈등하다가 결국 북부 지원군에 들어갔다.

    수인 연합에 나타났다는 괴이한 괴물의 몸에 기계가 섞여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는 공학 연구가 정체된 상황이었다.

    알렌 역시 그녀가 회귀 전 발명한 무기가 그들을 상대하며 발명시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막지 않았다.

    “그래도 약혼자가 떠났는데 괜찮겠어?”

    “그건….”

    알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첼 역시 가문이 걱정된다고 한번 살펴봐야겠다며 서부 연합군에 들어가려던 때, 그에게도 같이 가자며 찾아왔다.

    “괜찮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알렌은 갈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마리아가 그에게 이야기한 것도 있었고, 학생회장이 그를 따로 부른 이유 역시 알렌을 도시에서 내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영 찜찜했다.

    서운한 듯 그를 보는 레이첼에게 알렌은 자신 대신 린벨을 함께 보냈다.

    마침 엘프 대수림에 갇혔다는 소네드와 아칸더스가 걱정되기도 했고 린벨이라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떠난 가운데, 알렌은 밀레드와 함께 엘피스를 걸었다.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온 엘피스는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근심을 모두 벗겨낼 순 없었기에 불안감은 벗어날 수 없는 회류처럼 남은 이들의 곁을 감돌았다.

    “후배는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 있어서 여기에 남은 거 맞지?”

    밀레드는 서부 연합군을 배웅한 후에도 그를 쫓아왔다.

    알렌은 밀레드를 보았다. 저번의 대화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그녀의 표정에 서린 희미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적 실습 이후 그녀는 알렌을 피해 다녔다.

    ‘죄책감이라….’

    그가 보기에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알렌 역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히벨의 키메라 사건을 겪은 직후 알렌은 골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그의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알렌은 그게 자신의 탓이라 느꼈다.

    “알렌 후배는 이제 2학년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앞으로….”

    알렌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 밀레드를 보았다.

    “선배.”

    “…응?”

    그의 분위기가 변해서일까, 자신의 태도가 상대를 귀찮게 한다는 것을 그녀도 아는 탓일까.

    ‘어차피 이제 기다리는 것뿐이니.’

    알렌은 자칫 차갑게 보일 수 있는 표정을 풀며 그녀를 바라봤다.

    “제가 선배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이야기?”

    그녀의 얼굴에 당황함이 서렸다.

    그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녀가 급히 그의 곁으로 따라왔다.

    “예.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라서 말입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살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치를 보듯 힐끔거리는 시선과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그녀는 명백히 자신 때문에 알렌이 분노했나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들으시겠습니까?”

    “…응, 들을게. 지금까지 나만 떠들었으니 안 들을 수 없잖아.”

    “그럼….”

    알렌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밀레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흔히 벌어지는 후계자 다툼을 하다 사고가 벌어진 뒤.

    방에 틀어박힌 겁쟁이 하나가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마주 보지 못하는, 멍청한 남자가.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 * *

    “…괜찮겠지?”

    “괜찮지, 이 사람아. 마차 행렬 못 봤어? 몇 달 걸리지 않아 다 끝날 것이야.”

    하이젤의 취미는 도시를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것이었다.

    “정말인가?”

    옛날 발전했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현저히 쇠퇴했지만, 그때와 다른 흥취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당연하고말고.”

    가판대를 정리하던 남자는 자신에게 말하듯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으로 일이 해결되는 것처럼.

    하이젤은 그들의 모습을 힐끔 보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하이젤은 그가 평소에 보던 것과 같은 광경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장의 활발함과 암시장의 화려함.

    용병들의 거친 투기와 그사이에 깃든 생명력.

    대장간의 일정한 단조 소리와 편안한 침묵이 감도는 연구지대.

    그 모든 곳은 몇 달 전과 달리 조용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보고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사실 지금도, 환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하이젤은 도시를 돌아다녔다. 목적지는 어디든 좋았다. 자신만의 비밀 장소를 찾으면 기쁨을 느꼈고,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과거와 다름을 실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게이트를 찾아 마족을 모으고.

    또 그들을 위한 차원문을 계획하기까지.

    그 모든 것에는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이건 그가 마왕일 적에 겪은 일에 대한 상흔이었고, 앞으로도 그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하이젤이 평소처럼 걸음을 옮길 때, 누군가 곁에서 입을 열었다.

    “어디 가시게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환생하기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내가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는 숨어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하이젤은 그의 팔을 슬며시 잡는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청초한 얼굴에 허리께까지 내려온 흑발. 그녀에게서는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향기가 났다.

    “…앞으로 못 볼 수도 있는데 이 정도는 봐주세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릴리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가 정말 돌아가라고 할까 봐 불안한 눈빛을 했다.

    하이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기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서큐버스가 그 정도도 못 한다면 종족의 수치랍니다.”

    그녀는 자신감 어린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는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익숙한 분위기네요.”

    하이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긴장감.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함을 애써 숨기고, 거짓과 같은 일상을 보내며 내일의 안녕을 바란다.

    과거에는 익숙하게 보았던 광경이다.

    그는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이 좋았다. 과거와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기에.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그가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과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이젤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익숙한 모습을 찾으려는 것처럼.

    “하이젤 님.”

    그런 그를 보던 릴리트가 입을 열었다.

    “…후회하세요?”

    멈칫-

    잠시 하이젤의 발이 멈췄다. 그러나 그는 못 들은 것처럼 다시 걸음을 재개했다.

    “하고 싶지 않으시면, 하지 않아도 돼요. 희생하는 건 한 번….”

    “내가.”

    그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원해서 하는 거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저 때문에….”

    탁-

    릴리트는 하이젤이 도착한 목적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곳은 아카데미의 중심, 용사의 검이 꽂혀 있는 광장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검.

    하이젤은 저 무기의 주인과 수십 번, 수백 번을 넘게 겨뤘다.

    그 전투의 중심에는 그의 의지도 있었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충동 역시 존재했다.

    그때의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에 꼭두각시처럼 따랐지. 지금의 율리우스랑 다를 것도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 최소한의 저항은 했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그런 그를 마지막에 도와준 것은 용사였다.

    인간이되 인간 같지 않던 남자.

    선을 따르며, 정의를 수호하고, 적에게도 한 번의 자비를 베풀기도 했던.

    용사라는 이름에 그만큼 어울리는 이는 없었다.

    그에게 이런 정보를 알려준 것도 용사였다.

    ‘굴레를 끊어야 한다고 했지.’

    그렇기에 그는 마리아를 봤을 때 실망했다.

    그가 기억하던 것과 달랐으니까.

    그녀는 용사의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가 기억했던 용사의 성정과 달리 미숙한 아이에 불과했다.

    만약 그에게 마족이랑 얽힐 일이 없었다면, 과거의 은혜를 갚고자 그녀를 도와줬을지도 모른다.

    진짜 용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지만….

    ‘율리우스.’

    모든 것은 율리우스가 찾아왔던 그때 달라졌다.

    그 때문에 주기적으로 게이트가 열려 마족들이 소환된다는 것을 알았고, 용사가 말했던 굴레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리트.”

    하이젤은 옛 과거의 기억들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내 마지막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건 마왕으로서, 그의 마지막 긍지였다.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아닌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으니.

    “용사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빚을 졌다. 그가 아니었다면 너를 살릴 수 없었을 테니.”

    “…마왕님.”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어두운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 나는 너를 용서했으니. 지금은 하이젤(Hazel)이다. 하이젤 카일루스.”

    하이젤(Hazel)의 이름은 개암나무에서 따 왔다.

    하이젤은 조금은 경박하게,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가 없을 테니.”

    개암나무의 꽃말은 화해, 평화적이고 냉정한 사람을 뜻한다.

    그가 그렇게 살기를 다짐했기에 지은 이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