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남부 지원군이라….”
알렌은 아카데미를 빠져나오며 그녀가 했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현재 대륙에는 마탑 도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귀족이나 고위층에 있는 이들은 무사하겠지만, 평범한 마을이라면 그 위치가 내륙에 있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 혼란은 커지면 커졌지, 쉽게 수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니 밀레드가 했던 말처럼 학생들은 큰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아카데미를 그만두더라도 다른 대안이 넘치는 귀족층과 다르게 평민 학생들은 제 발로 아카데미를 걸어 나간다면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몇 년만 버티면 졸업장과 함께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아카데미를 나간다면?
운이 좋다면 쌓아 온 인연을 통해 다른 귀족의 영지로 갈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이는 모험가나 용병이 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귀족의 가신이 되거나 상류층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졸업장은 매우 중요한 증표였다.
그러니 평민 학생들을 비롯한 약소 귀족들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위험에 처했다는 자신의 고향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지금 아카데미를 나간다는 말은 미래의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래도 가족을 선택해 이곳을 나가고자 하는 학생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성공하려는 것보다, 성공하려는 이유를 더 중요시하는 이들.
그런 이들은 소식이 들리자마자 행정부로 몰려들었다.
아카데미 측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자체적으로 다른 방도를 찾아봤다고 한다.
과연 몇 달 전 변경한 정책을 다시 변경할지.
저들을 휴학 처리하고 잠시간 고향에 돌아가게 할지.
그것도 아니면 평소 규정대로 자퇴 처리할지.
교수들 사이에서도 이번 사항은 여러 의견이 분분했기, 마지막에 이사장이 직접 중재하고 나서야 상황이 해결되었다.
이사장이 제시한 해결책은 방금 그녀가 말한 남부지원군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원하는 이들을 모아서 지원군을 조직한다.”
아카데미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에스테도르의 손길이 닿지 않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남부, 서부, 북부, 동부로 나뉘어 그곳을 지원하러 갈 학생들을 모집한다고 공고했다.
알렌을 부른 이유는 학생회 출신인 벤자민과 그가 친분이 있기도 했고, 서부 쪽의 상황은 비교적 안전했기 때문이다.
엘프 대수림이 산맥을 두고 있기에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안전할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영지가 망할 일은 없겠지.’
아버지 곁의 제3세력이 막을 것이고, 어머니도 암중에서 신경 쓸 테니.
엘리스의 말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다.
알렌이 뒤늦게 이 소식을 알았다고 해도 서부 연합군에 자원할 일도 없을 것이니 그녀의 태도는 단지 학생회의 일원인 벤자민을 챙기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르겠군.’
정말 그게 전부인가?
알렌은 대화하는 내내 그녀의 실력을 가늠해봤다. 위계는 7위계 초반. 밀레드가 괴물이라 칭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명성을 널리 떨치기에 부족하지 않은 실력.
그런데 왜 그녀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지?
그녀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벤자민이 학생회의 일원이었기에 챙기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건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왜 그때가 아닌 지금 말을 꺼내는 것일까.
‘단순히 시기가 맞아서?’
수상한 점을 하나 찾자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제일 간단한 이유로는 자신을 그곳에 보내기 위함인가.
왜?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봐야겠군.’
이넬리아에게 시킨 일도 확인해 봐야 했고, 비공선을 일리아나에게 공개해야 할지 결정도 해야 했다.
그렇게 알렌이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 골목에서 갑자기 팔 하나가 획- 튀어나왔다.
알렌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튀어나온 팔은 그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알렌은 끌려가면서도 다른 손으로 반쯤 검을 뽑은 채였다. 좁은 골목에서 자칫해서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주변의 피해가 커지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누구….”
하지만 알렌은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뽑았던 검을 다시 넣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
“가지 마.”
마리아는 언제나처럼 맥락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알렌은 잠시 고민해 보다가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남부 연합군을 말하는 건가?”
“응.”
“왜?”
그녀는 그 물음에 고민이라도 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작게 한 마디만을 속삭였다.
“…부탁해.”
알렌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의 그녀는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무표정한 얼굴에 짧은 말투 그리고 행동까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지만….
‘조금 다급해 보이는군.’
루피너스 가문에서 그의 방에 갑작스럽게 들어왔을 때. 그때와 같았다. 알지 못할 간절한 갈망이 서린 듯 손을 달라고 했다.
알렌은 어차피 남부로 갈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럼 됐어.”
진실이냐는 듯 그의 눈을 쳐다보던 그녀는 그를 불러들였을 때와 같이 빠르게 사라졌다. 마치 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것처럼.
알렌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기숙사는 반대쪽이다.”
탁-
옆 골목으로 사라지려던 그녀는 알렌의 말에 몸을 멈췄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알렌을 향해 다가왔다.
부끄러운 탓인지 아까보다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진 그녀는, 알렌의 몸을 스쳐 지나가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래.”
알렌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녀의 등에 입을 열었다.
“혹시… 회색 재앙에 대해 알고 있나?”
그녀는 알렌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사라졌다.
알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알렌은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있던 자리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타났다 바닥으로 사라졌다.
* * *
아칸더스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깔끔하게 정리한 백발과 인자한 미소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도 중후하다 할 수 있는 얼굴. 그의 차림새가 집사 복이 아니었다면 어디의 귀족이라 소개해도 무방한 모습이었다.
“아칸더스 페른, 페른 남작의 장자이자 장차 페른 영지의 후계자가 될 이가 맞습니까?”
“정정하자면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지만.
가델은 아칸더스의 말투에 서린 희미한 불쾌감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자 함이었으니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알렌 님의 편이니 말입니다.”
“’저희’라고?”
아칸더스는 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곳을 집중했다.
그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가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소네드는 아칸더스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맡긴 듯 입을 열지 않았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총집사, 가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그림자가 솟아나더니 방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누군가 도청하는 것 같은 기색이 없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한때 그늘진 여왕의 제자이자 암왕 중 하나로 활동했습니다. 현재는 엘리자 님의 아래에서 가문의 일을 돌보고 있지요.”
아칸더스는 그의 소개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가델은 미소 지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쪽도 알고 온 게 아니었나?”
아칸더스는 알렌과 그늘진 여왕의 관계를 알았다.
그가 어떻게 그녀와 접점을 만들었는지 정확히는 몰랐으나 그 계기가 라인하르트 가문의 총집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가델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도 자신이 알렌의 수하로 들어간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는 거겠고.
“들은 것보다 더 총명하시군요. 알렌 공자님께서 좋은 인재를 얻으셨습니다.”
“그것보다 질문 몇 가지 좀 할 수 있겠나?”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소네드는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몇 번은 만난 것처럼 대화하는 모습에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이곳에 혼자 갇혀 있을 때, 그가 찾아왔다면 자신은 그에게 휘둘렸을 것이라고.
아칸더스는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여기를 들어왔지?”
“엘프라고 해서 회유할 수 없다는 법이 있습니까?”
소네드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뜬 것과 다르게 아칸더스는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음 질문을 입에 담았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외부인을 철저히 가둬 둔 거지?”
“엘프 대수림을 감쌀 정도의 대규모 마경이 발생했습니다.”
“자, 잠깐 그게 정말입니까!”
벌떡 일어난 그는, 두 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자신의 반응이 이상한가 싶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죄송합니다.”
소네드가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흥분을 가다듬는 가운데, 아칸더스는 자신이 추측한 바가 맞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래서 엘프들이 외부와 분리한 건가….”
“예, 외부인 중에 흑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결계는 마경의 기운이 숲에 섞여들지 않게 하기 위함인가?”
“정확히 파악하고 계십니다.”
엘프의 근본은 숲에 있다.
그들이 숲에 가지는 집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니 그들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공격하는 것보다 숲을 오염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다.
‘…그렇다고 대수림 전체를 노리는 규모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아칸더스는 그 단서만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일어난 혼란은 대수림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세력,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일으킨 혼란일 것이다.
그것으로 노리는 것은 모든 세력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는 것.
‘그 사이에 그들이 노리는 곳은….’
그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전에 가델이 대화 중이라는 것을 알리듯 입을 열었다.
“더 궁금한 점은 없습니까?”
“…당신을 이곳으로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나?”
“엘리자 님입니다.”
“성은?”
아칸더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비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신분이 증명되는 셈이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안주인이시니, 라인하르트가 맞지만… 이 대답을 원하시는 게 아니겠지요.”
그가 입 모양으로 단어를 내뱉었다.
루피너스.
대답을 들은 아칸더스는 정신을 차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그의 말투는 예의 바르게 바뀐 채였다.
“…이거 참, 의심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누구나 사칭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방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히려 이런 인재가 공자님의 곁에 있어 안심됩니다.”
아칸더스는 그가 진짜 정보를 알려 주며, 신분을 증명할 만한 비밀을 알리자 그를 믿을 수 있다 판단했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에 부른 자는 누구인가.’
처음에는 가델이 그와 연결될 줄 알았으나, 그는 아닌 것 같았다.
아칸더스는 생각을 미뤄 두고 입을 열었다. 정보를 알았고, 그의 신분을 눈치챘다. 이제 제대로 된 본론에 들어갈 차례다.
“이제 슬슬 이야기도 끝났으니, 정리하시지요. 만나실 분이 계십니다.”
그는 가델이 누구를 뜻하는지 말하지 않았으나, 엘리자를 만나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네드….”
“괜찮습니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요.”
소네드는 아칸더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은밀히 탈출해야 했다. 상행에 쓰인 짐이나 상품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의 흔쾌한 동의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가델의 발끝에 있던 그림자가 그들을 휘감았다.
“잠시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셋의 몸이 순식간에 그림자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잠시 후, 그들이 있던 방에 수 명의 엘프들이 들어와 아칸더스와 소네드가 있었다는 흔적을 모두 지웠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방은 누가 왔었냐는 듯 침묵에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