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늘진 여왕에게 일을 맡긴 알렌은 잠시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빠졌다.
조용한 방 안에서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지만, 시끄러운 소리를 배경 삼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변함없이 철을 두드리는 대장장이와 물건을 파는 호객꾼, 마법사와 조수가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고 용병들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운다.
“이번에 소식 들었나?”
“어디, 남부?”
“남부만 시끄럽던가? 어딜 가든 그렇지.”
그러나 평소와 같은 그런 엘피스의 분위기 속에서도 불안함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에스테도르가 이번에 벌인 짓은 전 대륙적인 규모였다.
마탑도시 습격처럼 마탑주가 죽는, 한 세력의 고위층이 죽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 아래의 수많은 일반인이 피해를 입을 거라는 것은 당연했다.
갈슈딘 대사막에 있는 엘피스는 그 대륙적 혼란에서 비껴간 느낌이었지만… 남의 일처럼 볼 수는 없었다.
그들 모두 다른 곳에 고향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렌은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에스테도르를 미리 막을 방법은 없다.’
에스테도르의 수장은 137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저력은 그가 회귀하기 전이든, 율리우스가 언급한 원작이든 두 시간선 모두에서 유일하게 승자라 말할 수 있었다.
알렌이 그의 계획 몇 가지를 방해했다고 하지만, 그의 모든 계획을 알 수는 없다.
이번 사태로 추측하자면, 에스테도르의 수장은 언제든지 계획을 유동적으로 수정하며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였다.
순환교 비공선 건도 마찬가지.
끝까지 건드려 볼 법도 하지만, 완벽한 계획을 위해 망설임 없이 지금까지 들인 공을 포기했다.
그런 그가 이번 일을 벌임으로써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원하는 건 마왕 소환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만 일을 벌였다.
알렌이 키메라 술사를 처치한 것이나 마녀를 사냥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천공의 눈으로 봤을 때 대륙 전역에 퍼져있던 마녀가 얼마나 많았던가.
키메라 술사를 키워 괴물을 양산하고.
마녀를 이용해 저주를 실험한다.
네크로맨서를 이용해 유물을 모으고, 악마 계약자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킨다.
그러니 이번에도 움직임에 목적이 있을 것이다.
‘외부까지 힘을 뻗을 수 있는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침묵한 가운데, 갑자기 무엇을 위해 움직였을까.’
제물 수급? 대륙 외곽에서 벌이는 일로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전쟁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지.
일어난 일을 보면 모두 예전부터 축적해뒀던 준비의 일환일 것이다. 그들도 만만치 않은 출혈을 감수했겠지.
‘그만한 것들을 모두 쏟아부어서 얻으려는 것이라.’
알렌이 과거의 기억과 검은 책 그리고 지금껏 봤던 행보를 바탕으로 추측했지만, 정보가 모자라 확실치 않았다.
“후배.”
메마른 물결은 마왕의 강림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말했지.
“알렌 후배.”
조금 있으면 그늘진 여왕이 자세한 정보를 얻어와 줄….
“후배, 잠시만 멈춰 봐.”
알렌이 자신의 앞을 막아 세운 여성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저 못 들은 척 넘어가려 했지만, 상대는 그걸 원하지 않는 듯했다. 시선을 주자 자홍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학생회의 일원 중 하나이자, 유적 실습 조의 인솔 선배.
“밀레드 선배.”
밀레드 프세우도스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 * *
그녀의 요청에 따라 알렌은 가까운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네 고향은 괜찮냐.”
“일단 들리는 소식을 들으면 괜찮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제국에서 무투제에 모일 이들을 모집한다는데, 알고 있습니까?”
“예, 황제가 이참에 평화를 명분 삼아 영토를 확장하려….”
주변에는 이번에 벌어진 사건에 혹시나 가족이 다쳤을까 싶어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있었고, 대륙의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대화를 나누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알렌의 자리는 조용했다.
“…….”
알렌은 밀레드 선배를 바라봤다.
그녀는 정작 그를 데려와 놓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인가.’
유적 실습을 겪은 이후로 그는 그녀와의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녀도 알렌을 찾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알렌은 짐승왕과 수련을 거치고, 노아의 사건을 겪으며 변했다.
무수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탑도시에서 있었던 그란델과의 결전을 끝으로 알렌은 지금과 같이 달라졌다.
지금의 그는 과거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와 다르다고 봐도 무방했다.
“…잘 지냈지?”
그녀는 아닌 것 같았지만.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상투적인 것이었다.
“예, 잘 지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녀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얼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그거 들었어? 엘닉스 드라기아스가 갑자기 사라진 거. 평소에 자주 만났다고 해서 그런데… 알고 있었어?”
“아뇨, 몰랐습니다.”
드라기아스 가문은 추수제에서의 일을 끝으로 관심을 거뒀다.
엘닉스의 행동도 본래라면 신경 썼겠지만, 라인하르트 영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비밀을 깨닫자 그에게 신경을 할애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나중에 따로 확인은 해 봐야겠군.’
대비하지 않는 것보다는 대비하는 것이 더 생각지 못한 기습에 대처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연도에는 학기 말 축제가 열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는데 들었어?”
“지금 알았습니다.”
“지금 벌어진 사태로 아카데미가 어떻게 해야 할지 교수들끼리도 의견이 갈라지는 중이래.”
“예.”
“또 혹시나 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문의하는 학생들도 폭증하는 중인가 봐.”
“그럴 수 있지요.”
“그리고….”
알렌은 다시 침묵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여러 이야기를 꺼내는 밀레드를 바라봤다.
그가 기억하던 느긋하고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급급히 말을 쏟아 내기 바빴다. 알렌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후배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아카데미를….”
“그래서.”
밀레드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 양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그녀의 초대에 응한 이유는 그와 마주쳤을 때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연도 있고.
그러나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라면 그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알렌의 물음에 그녀는 그제야 하고 싶었던 말을 툭 내뱉었다.
“미안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표정을 잠시 찡그리더니 그와 눈을 피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윌리엄, 에반, 에리엘.”
“그게 왜 미안하다는 겁니까.”
“내가 더 잘했어야 했어. 너희가 잘한다고 끝까지 내려가는 게, 아니라 말려야 했다고.”
감정적인 흥분도 아니고 분노에 소리 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담담한 척 입을 여는 모습은 마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과 같았다.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그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가 유적 실습의 일을 극복한 것에 반해 그녀는 아직도 반년 전의 일에 침전되고 있었다.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사고였습니다. 딱히 그들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김우진의 잘못이지.
알렌은 그녀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
“…그래도.”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탁-
그녀는 그의 반응이 예상외였는지 눈치를 봤다. 알렌은 그녀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섰다.
정신적인 문제는 안타깝지만, 그녀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잠깐만.”
그러나 그녀는 알렌을 붙잡았다.
“같은 이야기라면 가겠….”
“학생회장.”
그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이번에 다른 일이라는 듯 빠르게 입을 열었다.
“학생회장이 후배를 데려오라고 했어.”
* * *
마리아는 평소에 지내던 지하의 비처나 기숙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 있었다.
“마리아. 수고했어요.”
“응.”
아나스타샤는 마리아의 변한 부분을 세심히 살폈다.
그녀는 알렌과 떨어트리는 방법으로 용사의 신기 중 하나인 부서진 갑옷을 회수하러 보냈다.
몇 달 동안 고생을 했는지 뺨이 조금 초췌하게 변해 있었지만, 그녀가 기억하던 것보다 그녀의 힘은 더 강해져 있었다.
‘이제… 7위계는 8할의 확률로 이기겠어.’
그녀의 성장은 순조롭다.
용사의 피를 통해 만들어 낸 인공적인 실험체.
수십 년의 연구와 폐기했던 수많은 실험체 중에서도 그녀는 특출났다. 성격적 결함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초대 용사의 재능을 빼다 박았다 할 수 있었다.
벌써 수백 년이다.
천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 것이.
‘준비는 거의 끝나간다.’
대몰락 이후 하늘에서 추락한 수많은 신격의 잔혼이 모여 ‘아나스타샤’의 혼이 생겨났다.
그 혼을 살아남은 고대 제국의 마지막 후예의 몸을 빼앗아 집어넣으므로 지금의 아나스타샤 프세우도가 되었다.
신(神)을 구성하는 건 영웅과 같은 업적도, 수많은 재물도 아니다.
그저 숭배.
수많은 이들의 숭배와 신앙이 필요하다.
그것을 얻기 위한 대표적인 것이 종교였고.
그러나 현시대에 신전은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부서졌고, 신상은 박살 나 집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게 되었다.
그녀가 종교를 만들어 봤자 수많은 이교 중 하나가 될 뿐이고, 사교로 취급되어 토벌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준비가 필요했어요.”
다시 천상으로 승천하기 위한.
마리아는 무표정하게 혼잣말을 하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사람은 평상시에 신을 찾지 않아요. 항상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세상이 혼란에 빠지고 대륙이 절망에 물들었을 때.”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어미는 돌아오지 않고.
들끓는 괴물과 사악한 악마가 여린 살점을 노리려는 시대에 사람은 신을 찾는다.
절망과 공포,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체념과 좌절에 젖어 들 때 인간은 신에 의지한다.
그러니 지금의 시대는 신을 의지할 이들이 생기기에 적절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믿지도 않지요.”
의심과 경계를 거듭하고 불신과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거쳐 진짜 믿음이 생긴다면.
다시 신전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녀는 그때를 생각하는 듯 황홀한 얼굴로 웃으며, 마리아를 바라봤다.
이 아이는 그녀의 걸작이었다.
세상의 진리를 꿰뚫었던 눈과 대지에 천재지변을 일으키던 권능은 없었으나, 아카데미를 세우며 모았던 모든 지식을 동원했다.
고대 제국의 마지막 혈족은 일부나마 다른 고대인들이 봉인한 것들을 풀 수 있었다.
“정말, 잘 성장해줬어요. 마리아.”
그녀는 새로운 종교의 상징이 될 것이다.
용사의 후예이자 새롭게 등장할 종교의 사도.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과 냉혈한 모습으로 악한 것들을 토벌하며 대륙을 돌아다니겠지.
이제 일어날 혼란은 그녀가 기다려왔던 계획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마족을 추방할 차원문을 만들면….’
그걸 막기 위한 벌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그녀는 그때 등장할 준비된 영웅이다.
“마리아.”
“응.”
“이번에도 충분히 기다렸다 나서도록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아나스타샤는 시간이 지나도록 들리지 않는 대답에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
“…응.”
“방금 대답했었나요?”
“……했어.”
마리아는 처음으로 거짓을 입에 담았다.
그런 그녀를 아나스타샤가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괜찮았다. 다시 조정을 하기에는 시간도 모자랐고.
“그럼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이제….”
아나스타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연보라색의 머리와 지적인 얼굴.
몸을 감싸던 옷은 생도복으로 바뀌었고, 신체도 그것에 맞게 바뀌었다.
“알렌 라인하르트 만나야 할 것 같으니까요.”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평민’ 출신의 ‘천재’로서 명망이 높은 학생회장으로 변해 있었다.
마리아가 다시 반응이 늦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자, 뒤늦게 몸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을 끝마친다면 다시 전체적인 재조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어느 정도 마쳤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학생회장님. 알렌 라인하르트를 데려왔어요.”
“아, 밀레드. 들어오도록 하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문이 열리며 알렌과 밀레드가 들어왔다.
알렌은 처음으로, 이 아카데미의 진짜 괴물이라는 학생회장을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