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알렌과 바스러진 쇠붙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시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게 끝난 상황이었다.
“공자님!”
그들이 오는 모습을 봤는지 이넬리아가 먼저 나와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알렌은 급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을 늦추며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는 흩어진 시체를 묻을 구덩이가 가득했고, 벌써 처리를 시작했는지 검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성곽도 이번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어 보였고, 땅에는 터진 육편과 뼛조각이 섞여 악취를 피웠다. 바닥은 여름날 부슬비가 온 것 같이 축축했다.
바스러진 쇠붙이는 생각보다 피해가 적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렌은 메마른 물결이 보이지 않자 그녀에게 물었다.
“두 번째 선지자는 어디 있지? 혹시 부상이라도 당했나?”
“아닙니다. 힘을 쓰고 피곤했는지 오두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이곳에 보이는 흔적도… 제가 아니라 그녀의 능력으로 생긴 흔적입니다.”
“…그 정도라고?”
알렌은 무심코 넘겼던 땅의 흔적을 다시 살폈다.
뼛조각과 육편이 무질서하게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바닥도 축축했고. 생각해 보면 요정왕의 권능으로 생기는 흔적은 없다. 모든 걸 그저 분해할 뿐이지.
‘과연, 그가 오기 전까지 홀로 이곳을 지켰다고 말할 정도의 실력은 되는군.’
이종족이라 정확한 실력을 측정할 수는 없어도 7위계에는 달하지 않을까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저런 대규모 공격은 쉽게 사용하기 힘들 테니.
그래도 비공선을 빼앗기 위해 전력을 다해 공격할 거라는 예상보다 적의 공격은 미약했다.
그렇기에 그녀도 이넬리아가 남아 주기를 바랐지 않은가.
“사도님. 이곳도 괜찮다는 게 확인되었으니….”
“예, 다시 한번 들르는 것이 좋겠군요.”
그들은 본거지가 비어 있는 것이 어떤 계획의 일환인가 싶어 급히 도시로 돌아왔다.
그러나 도시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다시 돌아가 그곳을 처리해야 했다. 가만히 놔뒀다간 좋은 곳에 쓰이지는 않을 테니.
“이번에는 이넬리아, 너도 함께 가지. 선지자님은….”
“저는 이곳의 처리를 하겠습니다.”
그는 같이 가리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이곳에 남을 것을 자처했다.
‘와이엄을 죽였으니 감정을 정리한 건가?’
아니, 애초에 인간이 아니었으니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도 웃길 따름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이넬리아가 그의 뒤를 따랐다.
알렌은 빠르게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한다.’
에스테도르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순환교가 무사하고, 스콜의 방침을 변경했을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비는 해 뒀으나, 자세한 정보를 알아야 그에 맞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겠지. 회귀 전의 에스테도르는 지금 시기에 무슨 일을 일으켰지?
‘…그저 과거와 같은 행동을 하면 좋을 텐데.’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유동적이며 상황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리니.
회귀자인 그가 행동을 달리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같은 행동을 할까? 특히 하이젤과 김우진의 관계가 변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가 어림짐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알렌은 하이젤과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하이젤을 찾을 때면 항상 엇갈렸으니.
“가시는 길은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사도님, 처리해 달라고 말씀하셨던 것 여기 있습니다.”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수많은 순환교 신도들이 자리했고, 그의 옆으로 바스러진 쇠붙이가 서 있었다.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해 주게.”
“아닙니다!”
알렌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에스테도르의 본거지 처리와 유적 발굴 작업을 모두 끝마쳤다.
할 일을 끝마친 그는 에스테도르의 마지막 모습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고 곧장 떠났지만, 순환교는 끈질겼다.
차마 그를 잡지는 못해, 그들은 알렌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에 마차를 숨겨 뒀던 장소까지 따라오고 만 것이다.
“참 사도님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알렌은 이넬리아가 받은 조사 자료를 힐끔 보며 고개를 돌렸다.
바스러진 쇠붙이는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에게 여러 선물을 건네는 신도들을 바라봤다.
“이건 안 됩니다.”
“아니, 그래도 사도님께 도움이 될 텐데….”
메마른 물결은 남은 신도들을 이끌고 도시를 정리하느라 이곳에 없었다.
“지금 사도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절대 그건 아닙니다!”
“그럼 거둬 주십시오. 사도님은 그런 유물로 몸을 숨길 만큼 약하지 않으십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 보석은….”
“사도님의 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겠습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큰 유물은 돌려보내며, 보석과 같이 작은 선물은 받아들였다.
“사도님의 시녀도 순환교에 꽤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알렌은 깐깐하게 물건을 하나하나 살피며 고르는 이넬리아를 보았다.
처음에만 해도 그들이 주는 선물에 난색을 보이던 그녀는, 선물을 골라내지 않는다면 그들이 탈 자리도 없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따졌다.
마차를 몇 대 늘리면 된다는 말도 그녀에게는 소용없었다.
‘알렌 님은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신다.’
그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녀의 눈에는 그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공선에 대한 것도 내부를 확인할 틈도 없이 순환교에게 맡기고 이곳에 온 것도 그랬다.
그녀는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그가 빨리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눈치챘다.
그렇기에 그녀가 먼저 나섰다.
그가 행동하기 전에.
마지막 물건까지 챙겨 든 그녀는 아쉬운 얼굴의 신도들을 외면하며 알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알렌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며 걸어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아카데미로 돌아가게 된 알렌은 오자마자 믿지 못할 소식을 들었다.
-주요 왕국과 제국의 전역에서 정체불명의 저주 발생.
-남부에 대량의 시체 군단 등장.
-수인 연합 동쪽의 이상한 괴물 대량 폭증.
-엘프 대수림의 연락 두절.
그야말로, 대륙 전역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 * *
율리우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기숙의 방을 돌아다녔다.
그는 주변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원작이 잘못 된 거지?’
마탑도시의 습격이 시작된 이후, 대륙은 10년간 혼란기에 접어든다.
원작에서는 중반까지는 멀쩡한 아카데미 물이었다 급격히 스케일이 확장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고.
김우진도 그 사실은 충분히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며 기연을 얻고, 쓸 만한 조연들을 구하러 다니며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너무 빨라.’
율리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명목상 10년간 일어나는 혼란을 중후반이라 퉁치긴 해도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파트로 갈렸다.
3년의 시간을 더 보내며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파트.
대륙의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재앙을 막아 내는 3년의 시간.
더 강해진 적을 상대하기 위한 2년의 수련.
마침내 마왕을 소환하려는 그들과 전쟁을 시작하는 최후의 2년.
이번에 에스테도르가 벌인 짓은 지금이 아니라 아카데미 졸업 직후에 벌어질 일이란 말이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원작의 흐름을 흔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했다.
이번에 얻은 불사왕의 심장같이 원작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기연을 얻어냈다. 퀘스트의 보상과 뽑기가 있었기에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연도 마찬가지.
고급반으로 아닌 보충반으로 향해 그곳에 숨어있던 인재들을 골라냈는데….
‘형님 탓인가?’
그는 괜히 알렌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알렌이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두각을 보였을지라도, 그것이 에스테도르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그럼 왜?
언젠가부터 원작이 조금씩 틀어지는 것 같기는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건 저번 마탑 습격에서 하이젤을 봤을 때.
마족들과 함께 있으며 마기를 사용하는 그를 보며 율리우스는 어쩌면 그가 모르는 나비 효과가 그리 간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돌아올 정도라고?
‘마탑 습격에 성공했다고 해도 아직 비장의 무기가… 아.’
비프로스트의 최소 가동 인원은 넷이 필요하다.
원작에서는 세 명이 배신했지만 넷이 남아 있었기에 마탑은 최소한의 견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 명밖에 남지 않았기에 마탑은 외부로 발을 뻗을 수 없다.
삼 대 가문도 각자의 이유로 나설 수 없는 건 마찬가지.
베르세르크 기사단도 각지에서 벌어진 일을 처리하느라 모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른 세력까지 도움을 줄 여력이 있는 세력들이 각자의 이유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은 제국이나 왕국, 수인 연합과 엘프 대수림은 자신들의 영토를 방어하는 것만으로 벅찰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시기 역시 에스테도르가 움직이기 좋은 상황이라는 것.
상황을 파악한 그는 급히 일어섰다.
‘하이젤을 만나야 한다.’
결국,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이 범국가적인 사태는 각 지역에 재앙을 초래하지만, 대륙이 멸망할 정도의 위기는 주지 못한다.
하이젤과 자신이 힘을 합친다면 원작보다 빠르게 일을 해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는 기숙사를 나온 즉시 하이젤을 찾았다.
그가 자주 가는 장소는 잘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나오기도 했고, 그의 취미가 도시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시의 곳곳에 그가 가는 곳들이 정해져 있었다.
상업지구의 지하상가.
주거지구의 햇빛여관.
연구지구의 고대제국 전시관.
공업지구의 낡은 창고.
그 외 여러 곳.
하이젤이 도시를 직접 돌아다니며 찾아낸 그만의 비밀장소였다.
그러나….
“없다.”
상가의 바에도, 여관의 안에도, 전시관의 복도와 창고의 쉼터에도 그의 그림자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자주 가는 동선을 따라가기도 했고, 아카데미에 있나 싶어 수소문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하이젤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왔다고 했는데, 다시 나갔다고?’
그럼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참을 그를 찾던 율리우스는 어느 순간 프시케의 존재에 생각이 미쳤다.
정보 조직이라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닿은 그는 아공간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냈다. 방학 때 기연 투어를 다니며 얻은 히든 피스 중 하나였다.
그는 잠시 그것을 아깝다는 듯 쳐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찢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프시케의 지부 앞이었다.
모험의 도시 카이란의 프시케 지부.
나비 문양이 그려진 낡은 간판을본 그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곳에.
“언덕마루의 양 뒷다리가 먹고 싶….”
“지부장! 내가 정보를 가지고….”
하이젤 카일루스.
그가 자리해 있었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