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쿠구구구궁-
땅이 진동하는 소리에 알렌이 눈을 떴다. 무장을 챙기기 무섭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렌은 급히 숙소를 뛰쳐나갔다.
그렇게 마주한 도시의 풍경은 알던 것과 달랐다.
쿠궁-
바닥이 붕괴한다.
갈라진 도로, 뻥 뚫린 지하로 건물들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건물에서는 급히 무장을 착용한 병사와 신도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발만 동동 굴렀다.
밖에는 먼저 이상을 감지했던 이넬리아가 나와 있었다.
“공자님.”
이넬리아가 입을 열었다. 뒷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얼굴은 당장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도 붕괴는 가속화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명확했다.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것만으로 며칠간 지속된 지진이 이번 사태를 일으킨 원인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도님!”
“사도님이라도 도망치십시오!”
“지금이 아니면 늦습니다!”
주변에서 그를 알아본 신도들이 외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도망치라며 소리쳤다. 그들의 마음에는 그들보다 사도의 생존이 더 중요했다.
신도들이야 충원되면 그만이지만, 사도는 유일하다.
그가 죽는다면, 미래의 종말을 증명할 사람이 없어진다.
이넬리아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그의 결정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그건 시녀의 위치를 잊는 행위였다.
알렌은 급박한 와중에도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흔들리는 대지와 무너지는 건물. 소리치는 신도와 갈등하는 사도.
어찌해야 하나.
‘이곳에서 빠져나가더라도 상관은 없다.’
이곳을 빠져나간다고 해서 순환교의 사도라는 자리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다.
말 그대로 자신은 유일한 존재니. 메마른 물결과 바스러진 쇠붙이 역시 이 사태에 죽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그냥 후에 물러났다 돌아와도 된다.
그들도 그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정말로?
“베스틀라.”
「왜요.」
“저번에 말한 비장의 수라는 거, 지금 상황에도 유효하나?”
알렌은 쓸데없는 생각을 집어치웠다. 앞으로 이루어질 순환교의 관계와 이것으로 얻을 비공선 그리고 자신이 정치적인 입장까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고 아닌 문제가 있다.
이건 후자였다.
「지금 상황에도 되기는 한데, 진짜 지금 하게요?」
“그래.”
이걸 사용하는 대가로 그녀는 며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했지. 그 기간은 그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지진을 막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고.
그러나 마녀의 숲에서도.
일전의 드라기아스 가문에서도.
그녀는 늘 방법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도….」
그녀는 잠시 뭔가 걸리는 것처럼 주저했지만, 거대한 굉음이 울리자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공중에 떠올랐다. 그녀가 빠르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할게요. 당신, 제가 깨어날 때까지 무사해야 해요. 꼭.」
알렌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검신이 빛났다. 검신에 새겨진 24개의 문자 중 7개가 빛나며 옅은 빛무리를 흘렀다.
「? - 에이와즈(eihwaz)」
방어.
「? - 알기즈(algiz) ? - 투리사즈(þurisaz)」
자기보호. 문.
한 글자 한 글자가 더해질수록 광채가 더해갔다. 그보고 소리치던 신도들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에 만약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 같기도, 어떤 주술 같기도 했으며,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 - 라구즈(laguz) ? - 버카난(berkanan) ? - 카우난(kaunan)」
흐름. 성장. 개시.
이윽고 그렇게 읊조리던 그녀가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 - 이사즈(?saz)」
정지.
그 순간, 검에서 나오던 빛무리가 순식간에 폭증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알렌은 순간적으로 검에서 뿜어진 압박감에 숨을 들이켜야 했다. 그 위압감은 별의 세례로 강화된 그의 정신력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났다.
콰득-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당부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아니 알렌은 그녀의 경고가 약했다 느낄 정도로.
그리고 그 위압감은 빛무리가 주위로 흩어지는 동시에 사라졌다.
알렌은 검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떨리는 팔을 붙잡았다.
‘한순간이나마….’ 짐승왕보다 위라고 느꼈다.
팔강 중 세 손가락 안으로 평가받는 그보다 강하다고 느껴진다면 그 위.
‘베르세르크 기사단의 단장 더글라스 아벨이나…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졌다 전해지는, 팔강 중 최강 무신 샨 미야크.’
알렌은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나, 최소한 그들 정도가 아니고서야 압박만으로 그를 기진맥진하게 만들 수 없다 여겼다.
알렌이 고개를 들자 어둡게 변한 도시 위로 은하수가 흘렀다.
반짝이던 빛들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갈라진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적이 일었다.
“…끝인가?”
“사, 사도님이 해내셨다!”
“역시 사도님이다!”
다른 이들이 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영문을 모르던 이들도 지진이 가라앉자 얼른 두 손을 치켜들고 알렌의 이름을 찬양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이넬리아가 알렌의 힘이 빠졌다는 걸 깨닫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뒤를 받쳤다.
다른 이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힘이 빠져 쓰러지거나 부축받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알렌은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속으로 베스틀라를 불렀다.
‘베스틀라, 이 정도의 힘은 얼마나…. 아.’
얼마간 정신을 잃는다고 했지.
그녀는 답이 없었다.
몇 번이고 불러도 마찬가지.
검의 크기를 키우는 것을 비롯한 검의 기능은 남아 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알렌은 일 년 이상을 함께한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에 잠시 허전함을 느꼈으나, 상황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끼이익-
지진이 끝났으나 지금까지 무너지고 쓰러진 건물, 그리고 아직까지 뻥 뚫려 있는 지하의 구멍 역시 남아 있었다.
마침 무너지는 건물 앞에 있던 신도 하나가 공포에 질린 눈을 했다.
알렌에게 시선을 주는 나머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건물에 깔리기 직전, 건물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쓰러지거나 넘어진 벽과 건물 모두가 분해되기 시작했다.
건물의 벽과 바닥이 작은 돌덩이로 분리되고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분해된 돌덩이는 돌조각으로 잘게 변했다.
“…바스러진 쇠붙이.”
네 번째 선지자.
알렌의 말이 맞다는 듯 분해된 돌조각은 구멍을 채우려는 듯 도로 땅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동쪽에서 여명이 밝아 올 때쯤 도시에는)성곽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진 상태였다.
허허벌판같이 변한 도시를 둘러보던 그때, 그를 향해 여자 신도 하나가 달려왔다.
알렌이 검을 뽑고 균형을 잡자, 이넬리아 역시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사도님! 흐하, 후.”
“천천히 말하도록. 무슨 일이지?”
“선지자님들이 찾으십니다!”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고비를 넘겼다.
* * *
오두막은 그 지진에서도 멀쩡했다. 주위의 건물은 다 무너진 가운데 오두막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에 이상함을 느낄 만했으나 알렌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꼈다.
‘회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겨냈으니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은 이번에도 열려 있었다.
안에는 메마른 물결과 바스러진 쇠붙이 모두 자리해있었다.
알렌이 안으로 들어가자 이넬리아 역시 따라 들어왔다. 메마른 물결은 그녀의 자격을 인정했는지, 현 상황에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 대가면 저렴하게 치른 것이지요.”
그의 몸은 전체적으로 줄어있었다.
커다랬던 덩치가 작아졌다는 것을 확연히 눈치챌 정도였는데…,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만한 힘의 행사다.’
단순히 성벽을 세우거나 광물을 지상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무너지려는 건물을 멈추고, 그 안의 돌과 쇠 모두를 작은 조각으로 분리해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 사건의 원인이라 짐작될 지반의 틈을 다 틀어 막았다.
그 섬세한 작업을 그만한 대가로 치렀다면 그의 말대로 옳은 거겠지.
수명을 사용하는 건 그의 권리이자 책임이었다.
알렌이 참견할 권리는 없었다.
“그래서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렌이 이곳까지 오며 본 광경으로는 신도들이 혼란을 진정시키고 다른 사람을 돕기 시작했다.
그 난리에 다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죽거나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게 어떻게 된 거이냐면….”
“그건 내가 말해주겠다.”
바스러진 쇠붙이의 말을 멈춘 메마른 물결은 겉으로는 똑같았지만, 말 깊은 곳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바스러진 쇠붙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잠시 홀쭉해진 팔이 어색한지 몇 번 자세를 고치던 그를 보던 메마른 물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스테도르, 그 시체 냄새나는 놈들이 원인이다.”
“그렇습니까.”
알렌은 놀라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의아한 참이었다.
에스테도르는 마지막 봉인만을 남겨둔 채 몇 개월째 정체되어 있었다.
그러니 회귀 전 에스테도르 본단이 망했을 때, 그리고 알렌이 죽인 그 사도 행세를 하던 노인이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비공선을 얻고 도망칠 수 있었을까.
‘하나뿐이지.’
에스테도르 역시 저 봉인을 풀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다.
“며칠간 울리던 지진은 도시 지하의 지반이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놈들의 수작이었다.”
봉인을 열 수 없으면 부수자고.
“애초에 지하 아래를 완전히 텅 빌 정도로 만들지 않는 이상 땅이 무너져내리기 쉽지 않지요.”
바스러진 쇠붙이가 설명을 보충했다.
“방금 네 번째가 지하를 메꾸며 확인해 본 결과, 유적 아래에 거대한 통로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에스테도르는 유적 전체를 지하로 떨어트려 부순 후에 비공선을 회수하려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공격 역시 눈을 가리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회귀 전에는 그것이 성공했지만, 결국 전투에는 패배했는지 남아 있던 순환교가 비공선을 얻어 떠난 것이고.
이번에는 베스틀라의 조치와 그때를 안 놓친 바스러진 쇠붙이의 희생 덕분에 그들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제 일어날 일은 명확하군.’
구구구궁-
지진이 일어났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소리.
“언데드가 쳐들어왔다!”
“부상자들을 빼고 남은 자들은 준비해라!”
“사도님, 선지자님에게 알려라!”
작전이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직접 전투로 몰살시킨 후, 다시 시도할 수밖에.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메마른 물결은 변함없는 어조였다.
“사도는 네 번째와 함께 흔적을 쫓아 일을 벌인 이들을 징벌해라.”
“그럼 이곳은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알렌의 말에 서린 희미한 걱정에 그녀의 변함없던 표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사도와 네 번째가 오기 전까지, 이곳을 홀로 막던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다시 본래 표정으로 돌아와 이넬리아를 쳐다봤다.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저들을 홀로 막기에는 역부족이겠지. 사도의 시녀가 도와준다면 후에 보상하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넬리아 역시 군말 없이 나섰다.
“그럼, 무운을 빌지.”
바닥에서 산호로 만든 지팡이를 꺼낸 그녀가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이넬리아 역시 알렌에게 한 번 고개 숙이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스러진 쇠붙이는 밖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사도님은 높은 곳이나 어두운 장소를 무서워하십니까?”
“아니, 그다지 두렵지는 않군.”
“그렇습니까? 그럼 다행입니다.”
그가 손을 휘둘렀다.
오두막의 바닥이 흔들리더니 돌조각과 쇳덩어리가 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알렌과 그의 앞으로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겨났다.
“조금 깊이 들어가야 할 테니 말입니다.”
골렘이 그 말과 함께 뛰어내렸다.
알렌도 피식 웃고는 망설임 없이 어두운 구멍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이제 반격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