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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62화 (162/212)
  • 162화

    클라인은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최하층은 다른 층계와 다르게 기다란 통로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향하는 곳은 그 통로의 끝이었다.

    클라인은 짧은 통로를 걸어가며 유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했다.

    “유적의 봉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수호자가 자리한 유적과 시험자의 지식을 시험하는 유적.

    보통 대형 유적에는 그 두 가지가 섞인 형태가 자리하고 있다고 보면 됐다. 아카데미에서 실습하러 갔던 유적도 마찬가지.

    “최하층까지는 큰 피해가 있었으나 결국 무사히 발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들은 통로의 끝에 있는 문에 도착했다.

    알렌은 문을 천천히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뭐지?”

    문의 재질은 이질적이었다.

    강철과 파이프, 톱니로 이루어진 주위의 모습과 다르게 문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위로 옛 신화를 그려 놓은 듯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의 중앙에, 열쇠를 넣는 것 같은 구멍이 있었다.

    “세계 식물원과 관련된 유적에나 있을 법한 봉인이 왜 이 유적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 유적이 주제에 맞춰 발굴되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그런데 왜 요정왕의 피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이 구멍은… 내가 생각한 것이 맞나?”

    알렌의 시선은 벽면의 그림에 향해 있었다.

    왕관을 쓴 남자가 손바닥에 상처를 내고 팔을 문으로 꽂아 넣고 있었다.

    “저희가 문에 새겨진 그림과 글을 해석해 본 결과, 요정족의 피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클라인이 눈짓하자 그들 사이에 있던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선이 가는 남자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었다. 그러자 이넬리아와 같은 뾰족한 귀가 드러났다. 그는 단검 하나를 뽑더니, 그녀를 보며 물었다.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부탁해요. 사리안.”

    “그럼….”

    촤악-

    손바닥에 작게 상처를 낸 그는 벽에 새겨진 남자처럼 손을 꽂아 넣었다.

    잠시 한차례 진동하던 벽은 열릴 듯 진동하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멈췄다.

    사리안이라 불린 엘프는 몇 번이나 해 본 일이라는 듯 팔을 다시 뽑고는 포션을 부었다.

    “사리안, 고마워요. 사용한 포션은 말해 둘 테니 다시 보급받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알렌에게 다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실험해 본 결과 요정의 피를 제외한 다른 피에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세 번째 선지자께서 들러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는 진동의 세기가 더 강해져 문이 움직였으나 끝내 열리지는 않았다고.

    “대신이라고 하지만…. 몇 번이고 시도한 끝에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지요.”

    비공선.

    제국에서 미친 듯이 찾아다니며 지금까지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유물.

    “그러니 어제 보였던 이넬리아 님의 모습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알렌은 이해했다는 얼굴로 이넬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팔찌에 살짝 작은 빛이 맴돌며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불안하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넬리아는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들의 앞에 나선 그녀는 어제 보였던 모습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변화시켰다.

    잿빛 피부와 열두 쌍의 날개, 눈은 겹눈이 되어 나누어졌고, 분위기는 조금 전과 같은 사람이라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졌다.

    “오… 저게.”

    “이번에는 될까요?”

    “사도님이 데려오신 분이니 당연히.”

    그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는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베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구멍으로 팔을 꽂아 넣었다.

    쿠궁-

    잠시 흔들리던 석문은 진동의 세기가 더 강해지더니 이내 덜컥- 멈췄다.

    “…이걸로 끝인가?”

    다른 이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던 그때, 이넬리아의 뒤로 눈동자 하나가 드러났다.

    「알렌, 저거 여기서 드러내는 건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녀도 생각이 있겠지.’ 그녀가 괜히 저런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알렌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그녀는 요정왕의 권능을 사용했다.

    거대한 위압감이 그녀의 등 뒤로 소환된 눈동자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러자 다시 석문이 진동했다.

    드드드드득-

    마치 강제로 문을 여는 것처럼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역시.”

    “드디어!”

    “이제 돌아가겠구나….”

    그러나 문이 열리는 속도는 지나치게 느렸다.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듯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열리던 문은, 오 분이 지났을 때 멈췄다.

    이넬리아는 변신을 풀고 창백한 안색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레나 사제는 조금 열리고 멈춘 모습에 입을 열었다.

    “이넬리아 님!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열 수 있는데 왜…!”

    “에레나, 그만하세요.”

    그녀는 알렌이 말없이 그녀를 맞이하는 것을 보며 눈치 없는 어린 사제를 말렸다.

    “헙.”

    에레나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클라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알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괜한 기대를 드려 자칫 압박감을 드린 게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아니, 괜찮다. 그리고….”

    알렌의 시선이 석문으로 향하자, 다른 이들의 시선 역시 그를 따랐다.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닌 것 같으니.”

    석문의 문은, 썩어버린 뿌리 때와 다르게 멈춰 있었다. 이들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서린 것을 보며 알렌은 평온히 말했다.

    “앞으로 몇 번만 더 시도하면 완전히 열릴 것 같군.”

    * * *

    그 이후로 이넬리아는 하루에 한 번씩 최하위층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오…! 이제 아흐레, 아니 일주일만 더 있으면….”

    “사람 하나는 지나갈 틈이 생기겠습니다.”

    “역시 사도님은 계획이 있으셨군요.”

    오늘로 오 일째, 알렌은 이제 작은 동물 정도는 들어갈 정도로 벌어진 틈을 바라봤다.

    안에는 옅은 빛이 공간을 어둡지 않게 만들었는데, 그 중앙에 거대한 비공선이 먼지만 쌓인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넬리아가 다시 작업을 끝마친 순간, 다시 바닥이 흔들렸다.

    “앗.”

    알렌은 넘어질 뻔한 옆의 신도를 부축해 주었다.

    “…감사드립니다. 사도님.”

    며칠 전 그들에게 시범을 보였던 사리안은, 엘프이면서도 정령술을 비롯한 엘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여러 차별을 받아 왔다고.

    엘프들은 하프 엘프들도 포용할 만큼 관대한 편이지만, 그것이 완전한 평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숲 한편에 그들이 살 곳을 만들어 줄 뿐.

    동등한 권리를 주는 듯 보여도 그 속에는 수명과 옅어진 피에 대한 반감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리안은 그런 엘프 사이에서 하프엘프보다 못한 능력을 갖춘 존재.

    그는 엘프 쪽에서는 알게 모르게 기피당했고, 하프 엘프에게는 축적된 열등감을 뽐낼 상대가 되었다.

    그렇기에 도망쳤다.

    그리고 순환교로 들어왔다.

    “아니, 그냥 붙잡아 준 것 가지고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 없다.”

    알렌이 그렇게 말하며 그의 팔을 놓았다.

    ‘그런데….’

    그는 요새 주기가 잦아진 듯한 흔들림에 의문을 느꼈다.

    이만한 도시 규모에 필요한 재료와 광물, 그리고 며칠 전 땅속에서 뽑아낸 수 겹의 성벽을 생각한다면 지반의 층이 약해진 것은 맞겠지.

    ‘보통 이렇게 흔들리기만 하고 끝이던가?’

    지진이 자주 일어난 것치고는 땅이 움푹 꺼지거나 해서 일어난 사고는 없었다.

    심지어 언데드들 역시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데, 그곳의 바닥이 무너진 적도 없었지.

    ‘그리고…?’

    알렌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그의 앞으로 다가온 이넬리아가 보였다.

    그녀는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한마디를 툭 내뱉는다.

    “저도 넘어질 뻔했습니다.”

    알렌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신경 쓰겠다.”

    “예, 부탁드립니다.”

    그들의 곁에 있던 사리안은 다른 인간들에게서 보았던 것과 다른 기묘한 주종 관계를 보며 알아서 납득했다.

    사도님의 시녀 역시 특별하니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렇게 그녀가 유적에 향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알렌은 언데드들을 막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틀 간격으로 쳐들어오는 언데드 대군과 주변을 돌아다니는 소규모 무리들, 어디서 그리 많은 시체가 나타났는지 몰라도 그들은 때가 되면 갑작스레 나타났다.

    알렌은 차라리 본진을 해치우는 게 낫다 여겨 온종일 그들을 쫓았으나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그 후로는 오는 족족 죽이며 방어만 하고 있지.

    「왜 더 강한 적이 없을까요?」

    ‘어제까지는 쉽게 적을 죽여서 시원하다고 하더니.’

    「그건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니까요?」

    알렌은 그녀의 변덕에 답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요툰스베르드 사계 카스니플(J?tunnsverd 四界 Kaltnifl) 차가운 안개 속에 남아 있던 모든 언데드를 휩쓸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발버둥 쳐 보려 했지만, 사계는 죽은 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공격.

    그들은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얼음 동상이 되어 바닥에 굴렀다.

    “후우.”

    알렌은 그런 그들을 보며 베스틀라의 크기를 키웠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까지 불어난 거검을 휘두르자, 주위를 가득 채우던 동상들이 박살 나며 작은 얼음 조각들로 반짝거렸다.

    알렌은 주변에 남은 언데드가 없는 걸 확인하고 땅을 박찼다.

    여러 겹의 성벽을 가볍게 뛰어넘어 돌아가자, 성곽에서 신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고하셨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사도님!”

    알렌은 익숙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아들이고, 마지막에 그를 부른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알렌과 눈을 마주친 즉시 입을 열었다.

    “메마른 물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착하신 즉시 와 달라 하셨습니다.”

    “알겠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의 신도들도 괜히 몸을 막지 않고 비켜섰다.

    알렌이 그를 따라 오두막 앞에 도착하자,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할 일이 있는 듯 곧바로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가 문 앞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다.”

    철컥-

    알렌은 느긋이 욕조에서 꼬리를 파닥이는 인어를 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늦었구나. 사도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도록 해라.”

    알렌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본래 그녀의 역할은 알렌이 지금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힘을 쓰기 힘든 바스러진 쇠붙이를 대신해 언데드 대군을 맞이하는 것. 그러나 해저에 살던 그녀가 지상에서 움직이는 게 쉬울 리 없지.

    이곳은 수원도 적어 그녀의 장기를 발휘하기 어려웠다.

    지금 수조에 몸을 담그는 것도 그녀의 종족 특성상 피부가 건조하게 변해서는 안 되기에 이렇게 있는 거라고.

    “…팔자가 좋아 보이십니다.”

    “사도 덕분에 쉴 수 있어 좋기는 하다.”

    알렌은 쓸데없는 논쟁을 집어치우고 용건을 꺼냈다.

    그녀와의 만남은 그가 먼저 요청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내일이면 유적이 완전히 정복될 겁니다. 제가 원하는 건….”

    “원하는 때 비공선을 사도에게 넘기겠다. 그것을 묻기 위해 왔는가?”

    그녀는 제국이 원하는 보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깔끔하게 답했다.

    그 모습에 알렌은 마지막 다른 용건을 꺼내 들었다.

    “혹시…, 아벨린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멈칫-

    그 이름이 들린 순간, 여유롭게 꼬리를 살랑거리던 그녀가 멈췄다.

    그녀는 알렌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알렌이 보기에 그녀의 몸은 조금 경직돼 있었다.

    “사도는 성녀를 아는가?”

    “알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멸망을 안다면, 미래의 정보도 아는 건가?”

    알렌은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잠시 빛났으나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언제 멈췄다는 듯 다시 꼬리를 살랑이며 입을 열었다.

    “아벨린은 우리 교에서 키워 낸 성녀다. 어느 날 갑자기 도망쳤지.”

    그녀의 표정과 행동 모두 처음과 같았으나… 알렌은 그녀가 아벨린에게 제법 마음을 쏟았다고 느꼈다.

    “왜 도망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날 본단에 들어온 고서를 읽더니 사라져 버렸지.”

    “다시 찾을 생각은 없습니까?”

    그녀는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처럼 알렌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떠났다. 성녀도 우리 성교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 괜히 경거망동하지 못할 터. 사도가 없었다면 찾으려 노력을 해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아카데미에서 순환교가 일으키려던 습격을 막은 것도 사실상 알렌이었으니.

    알렌은 그녀가 그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에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그 고서에 대해 저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들고 갔기에 그것에 대해 아는 건… 아마 첫 번째뿐 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더 할 말이 있는가?”

    알렌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수면 아래로 머리를 담갔다.

    알아서 나가라는 행동에 그는 오두막을 나섰다.

    ‘이제….’

    비공선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계획했던 일 대부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아카데미에서 검은 책의 정보를 참고하며 김우진과 친분을 유지하고, 이렇게 일으킨 세력을 키우면 되겠지.

    ‘그리고 하이젤.’

    그와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알렌은 생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은 율리우스를 되찾을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알렌은 신역에 대해 알아보다 잠자리에 들었다.

    ………….

    ……….

    …….

    ….

    .

    그리고 그날 밤.

    쿠구구구구구궁-

    도시 전체가 흔들리며 바닥부터 무너져 내렸다.

    도시가 반쯤 지하로 잠겨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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